양양문화32호

5월 - 양양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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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388회 작성일 2021-02-26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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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읍성은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입구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산(峴山)의 맥(脈)을 따라 성황사(城隍祠)에서 현 양양읍성 터널을 가로질러 성내리 쪽의 경사면 구릉(丘陵)지대를 따라 완만하게 돌아 양양감리교회와 양양천주교회를 지나 양양초등학교 앞의 4거리에서 양양군청에 이르는 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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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읍성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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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읍성 서벽 석축>

 

현재 양양읍성은 고려시대부터 양주성으로 불리다가 양양읍성으로 칭하였는데 그 역사는 약 천 년이 넘은 시점으로 올라가는데 이는 우리나라 중동부 변방의 방어기지로 북호남왜(北胡南倭)의 숱한 외침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1451년에 편찬한『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제7대 목종 10년(1007년)에 양주성을 처음으로 축성하였으며, 우왕 11년(1385년) 허주(許周)가 지양주사(知襄州事:고려시대 지방관직)로 있으면서 읍성을 다시 축조하였다는 내용이『세종실록』에서 전하고 있으며, 조선 제3대 태종 13년(1413년)에 도호부를 두면서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동·서·남·북문을 설치하고 석성(石城)을 길이 403尺, 높이 5尺의 규모로 쌓고 토성(土城)의 길이 2825尺(약856m)을로 쌓았으며 성안에는 2개의 우물이 있었다라고『문종실록』에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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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지(성내리 종합복지회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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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지(군행리 입구 마을회관 앞)>

 

 

이후 양양읍성은 시대에 따라 석축성과 토축성을 보수하는 등 여러 차례의 보수와 증축이 있었음을 많은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어 그 시기가 고려 초반으로 올라갈 정도로 역사적이고도 희귀성을 지닌 읍성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양양읍성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고려 제23대 고종 8년(1221년) 거란(契丹)의 침략을 잘 방어한 공으로 양주(襄州)로 승격되어 방어사(防禦使)가 임명되었다가 고종 40년(1253년) 몽고의 침략으로 양주성이 함락된 후 고종 44년(1257년) 몽고군에게 항복하여 덕령감무(德寧監務)로 강등되었다가 제24대 원종 원년(1260년)에 다시 양주로 회복되었다라고『고려사』에서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는 태조 6년(1397년)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제3대 태종 13년(1413년)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었고 태종 16년(1416년)에 비로소 양양(襄陽)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양양지역은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보아 영동과 영서의 길목에서 위치하여 많은 변화와 전란을 겪게 되자 읍성의 중요성에 비추어 양주성을 구축하고 매년 성황제(城隍祭)를 올려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성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나무나 돌 또는 흙으로 높이 쌓은 큰 담을 의미하며,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을 모두 일컬어 성곽(城郭)이라 칭한다. 영동지역의 성곽은 산성과 평산성이 주류를 이루는데 양양군내에 산재된 성곽이 여기에 속한다.

현재 양양읍성과 관련된 성벽, 건물지, 우물 등은 거의 폐허가 된 상태이고, 현산공원 진입로에서부터 이어지는 양양읍성 남벽과 현산공원의 서벽 쪽에는 아직도 남아있는 석축을 확인할 수 있으며, 북벽과 동벽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도로와 주택 등이 들어서 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데, 당시 성안의 백성들과 관원들이 사용하였던 군행리와 성내리의 매몰된 우물지는 지금이라도 표지석을 세우는 것도 바람직할 것으로 사료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관동지(關東誌)』, 『관동읍지(關東邑誌)』에 의하면 양양읍성 내에는 객사(客舍) 35간, 아사(衙舍) 108간, 향청(鄕廳) 10간, 훈련청(訓鍊廳) 14간, 군기청(軍器廳) 10간 등의 관아(官衙)건물이 상세히 기록표기되어있으며, 관동읍지 양양읍지도(襄陽邑地圖)에도 아사(衙舍), 작청(作廳), 사령청(使令廳), 군청(軍廳), 형리청(刑吏廳), 창(創), 관노청(官奴廳), 태평루(太平樓), 동문, 남문이 그려져 있으며 서문의 기록이 확인된다.

따라서 양양읍성은 지양주사 허주에 의하여 축성되었다가 몽고군이 침입한 1253년에는 읍성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문종실록』에 의하면 1451년 읍성이 보수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1530년에 반정도가 퇴락하였다고 한『신증동국여지승람』내용으로 비추어보아 양양읍성은 이 시기에 폐성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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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읍성 실측현황도(강원문화재 연구소)>

 

 

그러나『관동읍지』양양읍지도(1868~1871)에 동문[한수루:현 양양초등학교 앞 교차로]과 남문[현산정:현 양양지구대 앞 도로], 그리고 서문의 문루(門樓)가 표기되어 있음을 미루어볼 때 양양읍성은 폐성이 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퇴락이 있었을 뿐 읍성으로서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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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읍성 성곽이 그려져 있는 해동지도(1750년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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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읍성 관아 건물명이 표기되어있는 관동읍지, 양양읍지도(1868~1871)>

 

 

【주】: 동문(한수루:漢水樓)과 남문(현산정:峴山亭)은 숙종 26년(1700년) 양양부사 남치훈(南致薰)이 창건하였고, 남문인 현산정은 영조24년(1748년) 양양부사 박필정(朴弼正)이 다시 창건 하였다. 『峴山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