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2호

4월 - 조산리(造山里)와 대포영(大浦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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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19회 작성일 21-02-2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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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산리의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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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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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서원>

 

옛날 지금의 조산리 마을은 산맥이 바닷가까지 이어져 있지 않고 중간에 끊어져 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고승이“그 산맥이 끊어져 있어 훌륭한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일러주고 갔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앞날의 발전을 위하여 동리주위에 산을 만들어야 한다며 1657년 온 마을 사람들이 인력으로 흙을 운반하여 산[봉우리]을

만들었다 하여 마을이름을 조산(造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후부터 조산리에는 훌륭한 선비,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하며, 선조 38년(1605년) 을사포락(乙巳浦落)으로 산이 붕괴되어 섬이 되었던 것이 1867년 주위의 호수가 대홍수로 매몰되어 현재는 전답(田畓)으로 변하여 과거의 섬을 추상

(追想)하여 섬 뜰 즉 도평(島坪)이라 한다.

또한 이 마을의 송림 속에는 고려시대부터 나라의 예법(禮法)에 따라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풍농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왕이 친히 향축(香祝)을 내려 중사(中祀)로 제례를 올리는 신성한 동해신묘(東海神廟)와, 조선 인조(仁祖) 6년(1628년) 조위한(趙緯韓) 양양부사가 고려 말에 졸(卒)한 그의 선조(先祖)인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조인벽(趙仁壁) 선생의 위폐를 모시고자 건립한 동명서원(東溟書院), 그리고 철종(哲宗) 10년(1859년) 3월 산불로 양양부(襄

陽府)에 551여 호의 민가가 소실되고 이재민이 3,000여명에 달하자 정원기(鄭元基)가 성균관 진사였던 그의 아들과 함께 백미(白米) 천석과 현금 1,000량을 군내 이재민들에게 내주어 구휼(救恤)하여 철종 11년(1860년) 조정으로부터 가선대부중추부사오위장정원기불망비(嘉善大夫中樞府事兼五衛將鄭元基不忘碑)를 하사받은 비가 현 조산리 산봉우리아래 세워져있다.




■ 대포영(大浦營)과성안말



성(城)안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성종(成宗) 21년(1490년)에 강릉 안인포의 수군만호영이 이곳 조산리로 옮겨왔다. 이 대포영은 만호(萬戶)의 지휘 하에 동해안을 방어하던 곳이었는데, 중종(中宗) 14년 경진(庚辰)에 그 주위에 1469척, 높이 12척의 성을 쌓아 동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비(防備)하는 등 137년간 동해를 지키는 수군영(水軍營)으로 존속하다가 조선 인조 4년(1626년) 방위지가 못된다하여 폐쇄(閉鎖)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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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만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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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리에서 청곡2리에 이르는 도평뜰(약 50만평)>

 

이 대포영에는 양양출신 이봉[李芃/本貫:全州]이 중종(中宗) 정묘(丁卯)에 충무위, 병술(丙戌)에 내금위 등 내직을 지낸 다음 중종 23년인 무자(戊子) 6월에 양양부(襄陽府) 대포만호로 부임하여 재직한 후 명종(明宗) 7년(1552년) 임자(壬子)에 졸하여 대포영 인근인 기정리 진수동(眞水洞) 선산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지금 지명인 성안 말을 기준으로 뒤편 북문 뒤에, 그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우물터가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대포영까지는 함선이 드나들었는데 남대천이 양양읍내에서부터 포월리를 거쳐 조산까지 오는 동안 모래와 흙이 쌓여 호수가 생겨 포월(浦月)리를 곗달(溪月:호수의 달)이라고도 불렀고 대포성 앞에 연당(淵塘)이 남아 있었고 구안(溝岸:도랑가), 수답(水畓:물논), 남대단(南大端:남대끝), 계교목(溪橋沐:호수다리목), 계두답(溪頭畓:호수위의 논) 등 호수가 매몰되어 논으로 변한 이름이 남아 있다. 또한 남대천 상류에서 떠내려 온 모래, 자갈, 흙이 쌓여 논, 밭, 집터로 변하였고 70년대전까지 여러 곳에 호수로 남아있었다.

파도가 밀어올린 모래와 남대천 상류에서 떠내려 온 흙이 쌓이면서 바다의 수심이 얕아지면서 남대천 하구에 호수가 남아 있었는데, 당시 여름철에는 아이들 물놀이장과 낚시터로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매몰되어 호텔과 콘도, 오토캠핑장시설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활용할 수 있는 테니스장 등이 조성되어있다.

『다음은 조위한(趙緯韓) 양양부사(襄陽府使)가 1623년(癸亥) 10월부터 1628년(戊辰) 8월까지 양양부사를 재임하면서 당시 양양지역의 인재육성을 위한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던 향교(鄕校)를 크게 중창하고, 훼철(毁撤)될 위기에 처한 대포만호영 구관(舊館)에“동명서원”이라는 편액을 세운 양양 동명서원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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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기 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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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산송림>

 

 

【襄陽東溟書院記】

余以中丞.論事過當.斥補于玆土.下車之初.先以興學校育人才爲急務.重創聖廟而大之.改造齋

舍而新之.又置學田以爲諸生朝夕之供.而第念校生多有免軍之徒.紛紜雜亂.其中雖有俊秀拔萃之才.

내가 중승(中丞)으로서, 일을 지나치게 논의하다가, 좌천되어 이 땅에 처음 왔다. 먼저 학교를 일으켜 인재육성을 급무로 하고, 향교를 크게 중창, 재사를 새롭게 개조하였으며, 또 제생의 아침저녁의 제공을 위하여 학전을 설치하여 다만 생각하건데 군역을 면제받은 무리가 많이 뒤섞여 어지럽고 그 중에는 비록 재주가 출중한 준수도 있었다.

不得精業於黌齋.以此列邑皆設書院于靜散地.爲多士修養之所.而顧此邑獨無焉.

학교에서 정통의 학업이 부득하니, 이로써 여러 고을에서 모두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 서원을 설립하고 많은 선비를 수양하는바 보니 이 고을에만 유독 없다.

余慨然興喟.鳩材募工.欲效白鹿之舊制矣.




내가 개연히 탄식하고, 재목을 구하고 장인을 모아, 백록동서원의 구제도를 본받고자한다.

適値朝廷革去本府之大浦鎭.軍器軍糧.移于本府.而萬戶所居之館舍.嵬然獨存.勢將毀撤而補用於官家.

마침 조정에서 혁거한 본부의 대포진의 군기군량을 본부로 옮겼으니 만호가 살던 관사만 홀로 우뚝 솟아 있어, 장차 그 형세가 훼철될 것이므로 고쳐서 관가로 쓰고자 한다.

余翻然喜曰.此必天公感余愛士之誠.畀此一館.以爲諸生講學肄業之地.何必毀諸.乃因舊館而額

之曰.東溟書院.蓋齋房講堂.儼然維新.一鄕之父老諸生.聚而謝焉.

내가 생각을 바꾸어 기뻐하면서, 이는 필시 하느님이 선비를 사랑하는 정성으로 이 관사를 준 것이라고 나는 느끼고서. 제생이 학문을 강론하고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하고자 하니 어찌 헐겠는가.

이에 구관의 편액을 동명서원(東溟書院)이라하고 재실과 방 강당이 근엄하게 일신시켰다. 일향의 어른들과 제생이 모여 사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