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32호

[향토사료] 朝鮮時代의驛道에關한硏究 -祥雲道를 中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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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537회 작성일 2021-02-2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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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1. 연구의 목적




농경에 기반했던 인류의 문명은 역용과 승용 둘 다 가능한 말을 이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명암이 바뀌었다. 말은 고된 노동과 운송에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한 동시에 참혹한 전쟁에 이용하므로 인류문화를 파괴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제주도는 대량으로 말을 길러서 공급하였으며 1000년 동안 교통 통신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으나, 오늘날 말(馬)은 과학의 발달로 경마와 승마로만 이용되고 있다. 말을 육상교통 수단으로 이용한 역사는 사라져 가고 있다.

상운도는 양양에서 동해안을 따라 양양 간성 고성 통천 흡곡까지 16개 역참을 관할한 역로로 말이 달리기를 약 700년 동안 운영되었지만, 폐도 된지 120여년이 지나가고 있다.

양양군 관내 역도의 상운관아와 속역의 역참 및 역로는 기록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교통·통신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 문화유적지 임에도 기억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우리나라 교통 통신의 역도 속역 체계를 조선시대까지 소고하고, 양양군 관내의 상운도의 5속역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2. 조선시대의 역도의 체계와 관할권




1) 조선시대 이전 역도-속역 체계



양양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적 제394호 오산리선사유적지와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이 있는 유구한 역사가 있다.

선사시대 양양인은 생존하기 위한 채집, 수렵, 사냥을 할 때 야생동물이 이동하는 좁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교통로로 이용하고, 의사소통인 통신 수단도 걷거나 속보로 전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시대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마립간 9년 3월 사방에 우역을 처음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하였다1)고 기록되어있다. [487년 3월(음)]걸어서 전달하는 것은 우(郵)이고, 말[馬]로써 전달하는 것은 역(驛)"이라고 한 데서 우역이 비롯되었다고 한다.2) 남북국시대3)의 통일신라 우역을 근간으로 고려시대 초기(919년)는 병부(兵部)의 주관하에 6과(六科) 147개 속역(屬驛) 체제에 의한 역로가 확립되었으며, 이것은 개경과 서경 및 의주를 중심으로 한 역도조직이었다. 그 뒤 1018년(현종 9)의 대폭적인 군현제 개편과 1067년(문종 21) 남경(南京)이 제도화된 때를 전후하여 역참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전국 22역도 525개 역중 개경중심(開京中心)으로 한 역이 147개 역이고, 서북, 동북, 강원도 연안에 분포되어 있었다.

중앙에 공역서(供驛署)와 지방에 관역사(館驛使) 또는 역승(驛丞)을 설치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역참조직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정호(驛丁戶)를 배정하고 공문서 전달 방식과 급마(給馬) 규정을 법제화하였다.

고려의 역승설치〔高麗置驛丞〕는 현종 때 처음 모든 길에 순관(巡官)을 배치하고 순우라 하였는데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관역사라 고치고, 공양왕 때 이르러 역승을 배치한 것을 후에 역승을 파하고 나누어 별감이라 한 것을 다시 역승으로 되찾았다.4)




2) 조선시대의 역도-속역 체계와 관할권의 변천



조선의 역도 속역체계는 고려의 역도체제를 근간으로 재편성하였다.

역은 한양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30리마다 도로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주로 대로변의 주현 각 읍에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역은 별칭으로 관(館)·참(站)·합배(合排) 등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으나, 전국 8도를 한양을 중심으로 역도(驛道)-속역체계(屬驛體系)로 조직하면서 병조에 승여사(乘輿司)를 설치하여 지방의 역승과 찰방을 지휘, 감독하였고 역승(驛丞) 및 찰방(察訪)이 속역을 관장하였다.

역도의 역승은 중종 30년(1535년)에 모두 찰방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 역도의 관할은 초기의 역승체계 → 역승·찰방 병존체계 → 찰방체계 → 겸찰방(兼察訪) 체계로 발전되었다

조선시대의 역참은 태조 1년(1392년) 7월, 태조의 즉위 교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전명(傳命), 즉 왕명을 전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왕명 및 공문서의 전달은 중앙과 지방 사이에 정치 및 행정 체계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그밖에도 역참은 진상품이나 공물의 운송, 봉명사신을 포함한 사객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위한 역마 제공, 통행인의 규찰 및 국경을 지키는 관방(關防)의 역할까지 수행하였다.

역도(驛道)는 지금의 국도를 예상하면 된다. 역도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수개 내지 수십여 개의 역(驛)을 하나로 묶어 역승(驛丞) 또는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관리하는 체계를 말한다.

『世宗實錄地理志』에는 전국에 산재한 538개의 역이 44개의 역도로 편성되어 있었다.

세조대의 역도 개편은 세조 3년(1457년), 세조 6년(1460년), 세조 8년(1462년) 등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개편은 주로 기존의 역도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었는데, 『경국대전』(1485년)에 수록된 전국의 역참조직은 41역도 543속역으로 편성되었다. 조선 전기의 역참제도는 임진왜란(1592~1598)을 당하여 그 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30년(1597년) 기발(騎撥)은 매 20리마다 1참(站)을 두고, 보발(步撥)은 30리마다 1참을 두어서 서발(西撥)·북발(北撥)·남발(南撥)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도가 성립되었다.

모든 역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고종 32년(1896년)에 근대적인 교통 통신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역참의 전통 아래 1896년 이후 현대적인 도로·교통 체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3. 驛의 構成要素및 機能




1) 驛의 構成要素



『증보문헌비고』에 전국 40개 역도 535개 역에 5,380필의 말이 있었다. 전국의 역은 9등급으로 나누어져 1등 로는 대마(大馬) 8필·중마(中馬) 13필·소마(小馬) 15필 등 도합 36필, 2등 로는 32필을, 3등 로는 28필을, 4등 로는 24필을, 5등 로는 20필을, 6등 로는 16필을 구비하여야 했다. 또한 7등 로는 대마 2필·중마 4필·소마 6필 등 도합 12필을, 8등 로는 대마 1필·중마 3필·소마 4필 등 도합 8필을, 9등 로는 대마 1필·중마 1필·소마 2필 등 도합 4필을 구비하였다. 역의 대부분은 7-9등 로에 속하였다.

도(道)에는 역승(驛丞)또는 찰방이 있고 각 역에는 역장(驛長)과 역리(驛吏)·역졸(驛卒)·역정(驛丁) 등이 배속되어 일을 맡아 하였다. 찰방과 함께 무록관(無祿官)이었다.

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이에 따른 경비가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각 역에는 토지가 지급되었으며, 각 역에는 역전(驛田)(公須田· 紙田·長田등)을 두어 그 수입으로 비용을 충당하였다. 리명 공수전리와 둔전리 양양군에 있다.

또 역마 충당을 위해 마전(馬田)이 지급되었다. 『경국대전』호전 제전조(諸田條)의 마전 지급내용을 보면, ‘대마(大馬)는 7결, 중마(中馬) 5결 50부, 소마(小馬)는 4결이었다. 긴로〔(緊路):교통량이 많은 역로〕이면 급주(急走)에게 50부를 더 주었고, 대마 1결을 더 주며, 중·소마는 각 50부를 더 준다.’고 되어 있다.

역도(驛道)에는 관아가 있고, 속역 각각에는 역사 즉 역참이 있었다.

조선후기에 남아있는 역사(驛舍)는 여러 역지(驛誌)자료에 의하면 역도의 관아는 대체적으로 동헌, 내동헌, 작청, 사령청, 관노청, 통인청, 창고, 문루, 마당, 내삼문(內三門) 3칸, 외삼문, 연못 그리고 마구와 양마청, 마부청 등으로 구성되어 각각의 기능을 맡았다. 이와 같은 역사의 건물구조상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말을 제사지내는 마당 또는 마단이 있는 점이고, 또 하나는 마구간이나 마방이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건물은 주로 역참을 이용하는 사신들의 숙박이나 역정(驛政)업무를 보기 위하여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일반 군현의 관아와는 기능상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군현의 관아구조는 읍성(邑城)안에 공해(公廨) 또는 관해(官廨)로 동헌, 내동헌, 작청, 사령청, 형옥(刑獄), 군기고, 훈련청, 창고 등의 건물이 유기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유교 문화적 전통에 따라 반드시 사직단과 향교 및 사우(祠宇)등이 배치된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일반군현의 관아는 중앙의 행정업무를 대행하는 지방 말단의 행정을 본다는 점에서 육방(六房)체제에 의하여 지방 수령의 지휘아래 이방, 형방, 호방, 예방, 병방, 공방 등의 향리(鄕吏)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지방행정을 맡은 곳이라는 점에서 역정(驛政)을 담당한 역의 관아와는 기능상, 구조상 차이가 있었다.




2) 驛의 機能



역마는 이용자의 지위에 따라 차등을 두고 지급되었다.

대군(大君)·의정(議政)에게는 상등마 1필, 하등마 3필, 태마(駄馬) 3필, 정2품 이상 관료에게는 상등마 1필, 하등마 3필, 태마 2필을, 3품 이상 당상관에게는 상등마 1필, 하등마 2필, 태마 1필을, 6품 이상 관료에게는 중등마 1필, 하등마 1필, 태마 1필을, 9품 이상의 관인에게는 중등마 1필, 태마 2필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부경사신(赴京使臣)과 부사(副使)에게는 상등마 1필, 태마 2필을 서장관(書狀官)5)에게는 중등마 1필과 태마 1필을 종사관(從事官)에게는 중등마 1필과 2명당 태마 1필을 지급하였다. 이 밖에 어사에게는 상등마 1필·하등마 1필·태마 1필을 관찰사와 절도사의 명령으로 왕에게 보고하고 돌아가는 자에게는 하등마를 지급하였다.

공무로 출장 가는 관인이 역마를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각 역에서 말을 지급받을 수 있는 증표인 마패(馬牌)를 제시하여야 하였다. 둥근 모양의 마패 한 면에는 사용자의 품계에 따라 이용 가능한 마필의 수만큼 말을 새겨 넣었고, 다른 한 면에는 자호(字號)와 주조된 연월(年月)과‘상서원인’(尙瑞院印)을 새겨 넣었다. 다만 왕족이 사용하는 마패는 산유자(山柚子)로 만든 둥근 패로서, 한쪽은 마필수를 새기고 다른 한쪽은‘마(馬)’만 새겨 넣었다.

마패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발급하였는데, 이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병조에서 발행하는 증명서를 제시하여야 하였다. 즉 중앙에서는 출장관원의 품계에 따라 병조가 문첩(文帖)을 발급하면 상서원이 마패를 내주었지만,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절도사가 마패를 항상 지니고 있다가 중앙에 보고할 일이 있거나 진상(進上)을 올려 보낼 때 수시로 발급하였다.

역마의 이용은『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1일 3식(90리, 1식은 30리)을 여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만약 이를 어긴 자나 남승(濫乘)·남급(濫給)한 자에게는 장 100·유 3천리에 처하도록 하였다. 또한 역마를 반환하지 않는 자는 장 300·도 3년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역을 통과하는 공용여행은 각 역관이 직명과 일시를 기록하였다가 매계절에 병조에 보고토록 하였다.





4. 상운도(祥雲道)



강원도의 대부분 지역은 서울에서 원주-대관령-강릉-울진-평해까지 연결되는 관동로로 불리는 제3로를 중심으로 많은 지선(支線)들이 모여 하나의 역도체계를 형성하였다. 이 가운데 양양의 상운도 관할권역은 양양-간성-고성-통천-흡곡에 이어지는 역로였다.

세조 8년(1462년)에 강원도의 역도를 은계도(銀溪道)·평릉도(平陵道·보안도(保安道)·상운도로 재편하고『세조실록』8년 8월 5일]. 그 뒤 성종대에『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16개 속역으로 구성된 상운도가 확립되었다




1) 상운도의 변천



고려시대 22역도 중 강원도에 해당하는 역도는 5개로서 그것의 방향과 주요 통과역을 고려사 병지(兵志) 참역조(站驛條)를 참조하여 작성하였다.6)

그 내용은 <표 1>과 같다.

 

 

<표 1> 고려시대 강원도 역도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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驛道 / 屬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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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源道(21역) / 용담(철원) 풍천(철원) 임단(평강) 송한(회양) 단림(회양) 은계(회양) 전원(동주) 도창(금화) 남역(금화) 단암(금화) 통언(회양) 이령(금성) 직목(금성) 웅양(금성) 기타 타도

春州道(24역) / 보안(춘주) 원양(춘주) 부창(춘주) 인람(춘주) 천원(화천) 산양(화천) 방춘(화천) 원정(화천) 수인(양구) 감천(홍천) 연봉(홍천) 횡천(횡계) 마유(인제) 남교(인제) 창봉(횡성) 함춘(횡성) 기타 타도

平丘道(30역) / 유원(원주) 단구(원주) 안양(원주) 신림(원주) 연평(영월) 온산(영월) 정양(영월) 약수(평창) 신흥(원주) 기타 타도

溟州道(28역) / 대창(강릉) 횡계(강릉) 진부(강릉) 대화(강릉) 방림(강릉) 운교(강릉) 안창(횡성) 조원(횡성) 목계(강릉) 안인(강릉) 구산(강릉) 고단(강릉) 낙풍(강릉) 동덕(강릉) 여랑(정선) 평릉(삼척) 사직(삼척) 교가(삼척) 용화(삼척) 옥원(삼척) 수산(울진) 덕신(울진) 흥부(울진) 조소(울진) 상운(양양) 익령(양양) 강선(양양) 인구(양양)

朔方道(42역) / 동덕(흡곡) 등로(통천) 초진(통천) 고잠(고성) 양인(고성) 태강(고성) 죽포(간성) 청간(간성) 관목(간성) 운근(간성) 기타 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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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지리학연구, 제34권 2호, 2000 116P 김경추

 

 

 

조선시대『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강원도 역도체계는 보안도(保安道), 대창도(大昌道), 평릉도(平陵道) 등이 있었는데 여기에 속한 역은 모두 77개였다. 역도체계의 중심도시로는 춘천, 원주, 강릉, 회양, 삼척, 양양 등이었다. 이들 지역은 군사적 거점이었을 뿐 아니라 도호부 이상의 군·현이었다.

그리고 역로의 입지는 지역 간 이동이 용이한 하천계곡이나 하천 중상류의 침식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강원도 지방의 역도-속역 관계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표 2> 세종대의 강원도 역도-속역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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驛道 / 屬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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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도(21) / 보안(춘천) 인남(춘천) 부창(춘천) 원창(춘천) 연봉(홍천) 천감(홍천) 연평(영월) 약수(평창) 평안(평창) 여량(정선) 참봉(횡성) 갈풍(횡성) 오원(횡성) 벽탄(정선)호선(정선) 안흥(횡성) 유원(원주) 신흥(원주) 양연(영월) 단구(원주) 신림(원주)

대창도(28) / 대창(강릉) 안인(강릉) 진부(강릉) 구산(강릉) 횡계(강릉) 대화(강릉) 방림(강릉) 운교(강릉) 목계(강릉) 고단(강릉) 대강(고성) 고잠(고성) 등로(통천) 낙풍(강릉) 임계(강릉) 동덕(강릉) 인구(양양) 상운(양양) 연창(양양) 강선(양양) 청간(간성) 죽포(간성) 운근(간성) 명파(간성) 양진(고성) 조진(통천) 거풍(통천) 진덕(흡곡)

평릉도(9) / 평릉(삼척) 사직(삼척) 교가(삼척) 용화(삼척) 옥원(삼척) 흥부(울진) 수산(울진) 덕신(울진) 달효(평해)

기타(19) / 은계(회양) 신안(회양) 화친(회양) 직목(금성) 서운(금성) 창도(금성) 신화(김화) 생창(평강) 임단(평강) 건천(이천) 방천(낭천) 원천(낭천) 산양(낭천) 수인(양수) 함춘(양구) 부림(인제) 마노(인제) 임천(인제) 남교(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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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대의 역도 개편은 세조 3년(1457년), 세조 6년(1460년), 세조 8년(1462년) 등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개편은 주로 기존의 역도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었는데, 이때는 강원도의 역로가 피폐하고 역승의 관품이 낮아 역무를 처리하는데 원활하지 못하다 하여 대창도와 보안도를 합하여 대창도라 칭하고 찰방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2·3차 개편은 역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여 재편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는 은계도(찰방), 보안도(찰방), 평릉도(역승), 상운도(역승) 등 4개 역로로 개편되었고, 정비된 역로는 4역도 78역으로 확립되었다.7)

그 내용은 <표 3>과 같다.

 

 

<표 3> 『경국대전』강원도 역도·속역체계 (14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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驛道 / 屬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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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계도(찰방19) 회양 / 풍전(철원) 생창(금화) 직목(금성) 창도(금성) 신안(회양) 용담(철원) 임단(평강) 옥동(평강) 건천(이천) 서운(금성) 산양(낭천) 원천(낭천) 방천(낭천) 함춘(양구) 수인(양구) 마노(인제) 부림(인제) 남교(인제) 임천(인제) (19)

보안도(찰방29) 춘천 / 안보(춘천) 천감(홍천) 인람(춘천) 원창(춘천) 부창(춘천) 연봉(홍천) 창봉(횡성) 갈풍(횡성) 오원(횡성) 안흥(횡성) 단구(원주) 유원(원주) 안창(원주) 신림(원주) 신흥(원주) 양연(영월) 연평(영월) 약수(평창) 평안(평창) 벽탄(정선) 호선(정선) 여랑(정선) 임계(강릉) 고단(강릉) 횡계(강릉) 진부(강릉) 대화(강릉) 방림(강릉) 운교(강릉) (29)

평릉도(역승15) 삼척 / 동덕(강릉) 대창(강릉) 구산(강릉) 목계(강릉) 안인(강릉) 낙풍(강릉) 신흥(삼척) 사직(삼척) 교가(삼척) 용화(삼척) 옥원(삼척) 흥부(울진) 수산(울진) 덕신(울진) 달효(평해)(15)

상운도(역승15) 양양 / 연창(양양) 오색(양양) 강선(양양) 인구(양양) 죽포(간성) 청간(간성) 운근(간성) 명파(간성) 대강(고성) 고잠(고성) 양진(고성) 조진(통천) 등로(통천) 거풍(통천) 정덕(흡곡)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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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대전』에는 강원도 모든 역도에 종 6품 찰방을 파견했다. 은계도는 임단, 부림, 임천을 폐하고 문산, 원통을 개설하였다. 또 평능도는 달효를 폐하고 신립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상운도는 오색을 폐하고 원암을 개설하였다. 그 내용은 <표4)와 같다.

 

 

<표 4> 『속대전』강원도 역도·속역체계 (17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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驛道 / 屬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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銀溪道(察訪)(18) 회양 / 豊田(철원) 生昌(금화) 直木(금성) 昌道(금성) 新安(회양) 龍潭(철원) 林丹(평강) 玉洞(평강) 乾川(이천) 瑞雲(금성) 山陽(낭천) 原川(낭천) 方川(낭천) 含春(양구) 水仁(양구) 馬奴(인제) 富林(인제) 嵐校(인제) 林川(인제). 補(보) 林丹富林林川減文山圓通加.

保安道(察訪)(29) 춘천 / 安保(춘천) 泉甘(홍천) 仁嵐(춘천) 原昌(춘천) 富昌(춘천) 連峯(홍천) 蒼峯(횡성) 葛豊(횡성) 烏原(횡성) 安興(횡성) 丹丘(원주) 由原(원주) 安昌(원주) 神林(원주) 新興(원주) 楊淵(영월) 延平(영월) 藥水(평창) 平安(평창) 碧呑(정선) 好善(정선) 餘糧(정선) 臨溪(강릉) 高丹(강릉) 橫溪(강릉) 珍富(강릉) 大和(강릉) 方林(강릉) 云交(강릉).

平陵道(察訪)(15) 삼척 / 冬德(강릉) 大昌(강릉) 丘山(강릉) 木界(강릉) 安仁(강릉) 樂豊(강릉) 新興(삼척) 史直(삼척) 交柯(삼척) 龍化(삼퍽) 沃原(삼척) 興富(울진) 守山(울진) 德神(울진) 達孝(평해).  補(보) 達孝減新立加.

祥雲道(察訪)(15) 양양 / 連倉(양양) 五色(양양) 降仙(양양) 麟丘(양양) 竹泡(간성) 淸澗(간성) 雲根(간성) 明破(간성) 大康(고성) 高岑(고성) 養珍(고성) 朝珍(통천) 登路(통천) 巨珍(통천) 貞德(흡곡).  補(보) 五色減元巖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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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六品察訪4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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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국대전』의 상운도 관할의 속역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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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襄陽府管內의 驛




상운도가 관할하던 양양도호부 관내의 역은 상운역, 연창역, 오색역, 강선역, 인구역 이었다. 뒤에 미시파령(彌時波嶺) 길을 개착(開鑿)8)함으로써 오색역은 간성현 원암역으로 이전하였다. 상운도 소관 역들은 모두 소로(小路)에 속해 있었는데, 이 역도는 1896년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고, 양양도호부 관내 역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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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운역(祥雲驛)



■ 소재지 : 손양면 상운리

■ 연 혁 : 『신증동국여지승람』권44에 부 남쪽 25리에 있다. 역승이 주재하는 본 상운도에는 속역이 15곳인데, 연창·오색·강선·인구·죽포·청간·운근·명파·대강·고잠·양진·조진·등로·거풍·정덕(連倉·五色·降仙·麟丘·竹苞·淸澗·雲根·明波·大康·高岑·養珍·朝珍·登路·巨豊·貞德) 이다. 역승(驛丞) 1명이다. 『여지도서』에 관문에서 남쪽 20리 거리에 있다. 대마(大馬) 3필(匹), 복마(卜馬) 8필(匹) 역리(驛吏) 154명, 역노(驛奴) 30명, 역비(驛婢) 29명이다. 『관동지』에 역리 163명, 역노 69명, 역비 12명이다. 『양양읍지』에는 역리와 역노 214명, 역비 10명이다.

『대동지지』에 찰방은 연창역으로 옮겨가 있다. 『여재촬요』에 찰방이 있다. 『양주읍지』에 부 남쪽 20리에 있다. 찰방의 관우(館宇)가 있었던 곳이다. 당명(堂名)은 봉일(捧日)이다.



○ 孟思誠의 祥雲道察訪逸話

조선 태종 8년(1408년) 대사성(大司成) 맹사성이 태종이 총애하던 駙馬趙大臨을 국문한 일을 기화로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을 河崙등의 諫奏(간주)로 모면하여 外方從便조치되었을 때 태종 9년(1409년) 윤4월 상운역 찰방으로 와 있다가 이듬해인 1410년 8월 京外從便조치되어 전직하였다.

잠시 상운역 찰방 때의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강원감사가 관동을 순시할 때 상운역에 들르니 孟公은 吏奴에 명하여 오찬을 준비하는데 山海珍味(산해진미)로 감사를 대접케 하고 맹공은 麥飯[보리밥]을 먹었었다. 출영할 때에도 역마를 타지 않고 黑犢[흑독:검은 송아지]을 타고 나갔다. 감사가 맹공의 특수한 것을 보고 물으니 맹공이 답하기를 “나는 죄인이라 감히 國馬를 탈 수 없고 또 맥반은 慣食(관식)이라”하니 감사가 그 뜻을 알고 監營에 돌아가 上訴하여 赦를 얻어 맹공을 內職으로 召上하였는데 世宗朝에 左議政까지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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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창역(連倉驛)



■ 소재지 : 양양읍 연창리

■ 연 혁 : 지금의 連昌里는 조선시대 까지는 連倉里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倉이 昌으로 바뀌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連倉驛으로 부내 5리에 있다. 『여지도서』에 찰방의 우관(郵官)이 여기에 있다. 대마(大馬) 3필, 복마(卜馬) 8필, 역리(驛吏) 270명, 역노(驛奴) 130명, 역비(驛婢) 70명이다.

『관동지』에 찰방의 우관(郵官)이 여기에 있다. 대마와 복마 수는 같으며, 역리 321명, 역노 23명, 역비 10명이다.『대동지지』에 옛 이름은 익령(翼嶺)이다. 동쪽 3리에 있다.

『양주읍지』에 경종 3년(1723년) 계묘에 찰방 엄한중(嚴漢重)이 관우(館宇)를 중수하였는데, 당명(堂名)은 휼운(霱雲)인데 채팽윤의 글씨이다. 지금의 임금[영조 40년(1764년)] 갑신년에 찰방 박종언(朴宗彦)이 다시 짓고 당명(堂名)을 와선당(臥仙堂) 이라 하고 외청사(外廳事)로 하였다. 대마 복마 수는 위와 같고 역리와 역노는 190명, 역비 17명이다.

○ 송자 송시열(宋子宋時烈)의 宋子大全卷142의『祥雲驛和風館記』에 의하면 송시열의 아들 기태(基泰)가 현종 12년(1671년)에 상운역도 찰방이 되어 재임 시 상운역은 풍기가 악하고 사람에 병이 심하여 부내에 좋은 곳 즉 연창역 인근에 옮겨졌던 상운 관우에 상운역화풍관(祥雲驛和風館)이라 현판을 게시했다.




3) 인구역(麟丘驛)



■ 소재지 : 현남면 인구리

■ 연 혁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洞山縣남쪽 2리에 있다. 『여지도서』에 관문에서 남쪽 50리 거리에 있다. 대마(大馬) 2필, 복마(卜馬) 3필, 역리(驛吏) 70명, 역노(驛奴) 81명, 역비(驛婢) 61명이다. 『관동지』에 역리 79명, 역조 99구, 역비 30구이다. 『대동지지』에 옛날에는 인구(鳞駒)라고 불렸다. 『양주읍지』부 남쪽 40리에 있다. 역리와 역조 151명, 역비 61명이다.




4) 강선역(降仙驛)



■ 소재지 : 강현면 강선리

■ 연 혁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 북쪽 30리에 있다. 『여지도서』는 관문에서 북쪽 20리 거리에 있다. 대마(大馬) 2필, 복마(卜馬) 4필, 역리(驛吏) 192명, 역노(驛奴) 7명, 역비(驛婢) 8명이다.

『관동지』에 관문 북쪽 20리 거리에 있다. 역리 192명, 역노 18구, 역비 3구이다. 『대동지지』에 북쪽 30리에 있다. 위의 세 역(연창·인구·강선역)은 상운도(祥雲道)에 속해있다.

『양주읍지』에 역리와 역노 209명, 역비 8명이다.




5) 오색역(五色驛) 혁폐(革廢)



■ 소재지 : 서면 오색리

■ 연 혁 : 『대동지지』에 부 서쪽 45리에 있다. 오색로가 폐쇄되면서 간성으로 옮겨 원암역이 되었다. 세종대의 강원도 역도 속역체계에는 양양도호부에 인구·상운·연창·강선역만 기록 되었다.

세조 8년(1462년) 8월 5일(정묘)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다. 기록에 상운역·연창역·오색역·강선역이상 16개역은 상운도 역승로 일컬을 것. 추강 남효온(秋江南孝溫)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조선 성종 16년(1485년) 윤 4월 15일(을미) 오색역을 출발 하였다는 기록과, 조선 성종 24년 궁벽하고 험하다하여 소동라령(所冬羅嶺)을 폐쇄하면서 간성현의 미시파령(彌矢坡嶺)을 다시 열었다. 따라서 위의 기록으로 보아 오색역은 조선 성종 24년(1493년)까지 존치하였다.

양양도호부 관내의 역마수는『여지도서』역원조(驛院條)에 의하면, 상운역에 대마 3필·복마 8필, 연창역에 대마 3필·복마 8필, 강선역에 대마 2필·복마 4필, 인구역에 대마 2필·복마 3필이었다.

상운도가 관할하던 양양도호부 관내의 역은 상운역, 연창역, 오색역, 강선역, 인구역 이었다. 상운도 소관 역들은 모두 소로(小路)에 속해 있었는데, 이 역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고, 양양도호부 관할 실태는 다음과 같다.

 

 

<표 5> 문헌상 양양도호부 관내 역 자료 총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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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獻

內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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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實錄地理志』(1454년)

역(驛)이 넷이니, 연창(連倉)·상운(祥雲)·강선(降仙)·인구(麟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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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祥雲驛: 부남쪽25리에 있다. 本道를 잇는 屬驛이 15곳인데, 연창(連倉)·오색(五色)·강선(降仙)·인구(麟丘)·죽포(竹苞)·청간(淸澗)·운근(雲根)·명파(明波)·대강(大康)·고잠(高岑)·양진(養珍)·조진(朝珍)·등로(登路)·거풍(巨豊)·정덕(貞德) 이다. 역승(驛丞)이 1名이다.

麟丘驛: 洞山縣남쪽 2리에 있다.

連倉驛: 府內5리에 있다.

降仙驛: 부 북쪽 3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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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輿地圖書』(1757∼1765년)

祥雲驛: 관문에서 남쪽 20리 거리에 있다. 대마(大馬) 3필(匹), 복마(卜馬) 8필(匹) 역리(驛吏) 154명, 역노(驛奴) 30명, 역비(驛婢) 29명

連倉驛: 관문에서 동쪽 5리 거리에 있으며, 찰방(察訪)의 郵館이 여기에 있다. 대마(大馬) 3匹, 복마(卜馬) 8匹, 역리(驛吏) 270名, 역노(驛奴) 130名, 역비(驛婢) 70名이다.

降仙驛: 관문에서 북쪽 20리 거리에 있다. 대마(大馬) 2필, 복마(卜馬) 4필, 역리(驛吏) 192 명, 역노(驛奴) 7명, 역비(驛婢) 8명이다.

麟丘驛: 관문에서 남쪽 50리 거리에 있다. 대마(大馬) 2匹, 복마(卜馬) 3匹, 역리(驛吏) 70名, 역노(驛奴) 81名, 역비(驛婢) 61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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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東誌』(1822∼1826년)『關東邑誌』同一(1871년)

祥雲驛: 관문 남쪽 20리 거리에 있다. 大馬3필, 卜馬8匹, 역리(驛吏) 163名, 역노(驛奴) 69구, 역비(驛婢) 12구이다.

連倉驛: 관문 동쪽 5리 거리에 있으며, 찰방(察訪)의 우관(郵館) 이 여기에 있다. 대마(大馬) 3匹, 복마(卜馬) 8匹, 역리(驛吏) 321名, 역노(驛奴) 23구, 역비(驛婢) 10구이다.

●邱驛: 관문 남쪽 50리 거리에 있다. 대마(大馬) 2필(必), 복마(卜馬) 3匹, 역리(驛吏) 79名, 역노(驛奴) 99구, 역비(驛婢) 30구이다

降仙驛: 관문 북쪽 20리 거리에 있다. 대마(大馬) 2필(匹), 복마(卜馬) 4匹,역리(驛吏) 192名, 역노(驛奴) 18구, 역비(驛婢) 3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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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地志』(1862∼1866년) 

祥雲道: 남쪽 25리에 있다. 찰방(察訪)은 연창역으로 옮겨가 있다.

連倉驛: 옛 이름은 익령(翼嶺)이다. 동쪽 3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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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地志』(1862∼1866년)

●邱驛: 옛날에는 인구(●駒)라고 불렸다. 남쪽 50리에 있다. 降仙驛: 북쪽 30리에 있다. 위의 3역(연창·인구·강선역)은 상운도(祥雲道)에

속해있다.

혁폐(革廢) 오색역(五色驛) : 서쪽 45 리에 있다. 오색로(五色路)가 폐쇄되면서 간성(杆城)으로 옮겨 원암역(元岩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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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輿載撮要』(1893년)

祥雲驛: 남쪽 20리에 있다. 察訪이 있다.

麟丘驛: 남쪽 2리에 있다.

連倉驛: 5리에 있다.

降仙驛: 북쪽 30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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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襄州邑誌』(1899년)『峴山誌』同一(1910년대 초반)

祥雲驛: 부 남쪽 20리에 있다. 察訪의 館宇가 있었던 곳이다. 堂名은 봉일(捧日)이다. 大馬3필, 小馬8匹, 驛吏와 驛奴214名, 驛婢10名이다.

仁邱驛: 부 남쪽 40리에 있다. 大馬2匹, 小馬3匹, 驛吏와 驛奴151名, 驛婢 61名이다.

連倉驛: 부 동쪽 5리에 있다. 경종 3년(1723년) 계묘에 察訪엄한중(嚴漢重)이관우(館宇)를 중수하였는데, 당명(堂名)은 휼운(●雲)인데 채팽윤의 글씨

이다. 지금의 임금 갑신년에 察訪박종언(朴宗彦)이다시 짓고는 堂名을 와선당(臥仙堂) 이라 하고 외청사(外廳事)로 하였다. 大馬3匹, 小馬8

匹, 驛吏와 驛奴190名, 驛婢17名이다.

降仙驛: 부 북쪽 20리에 있다. 大馬2匹, 小馬4匹, 驛吏와 驛奴209名, 驛婢8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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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原道誌』(1940년)

祥雲驛: 군 남쪽 3리 에 있다. 本道를 잇는 屬驛이 15개 역으로, 連倉·五色·降仙·麟丘·竹苞·淸澗·雲根·明波·大康·高岑·養珍·朝珍·登路·巨豊·貞德이다. 驛丞이 1인이다.

麟丘驛: 洞山縣남쪽에 있다.

連倉驛: 郡內에 있다.

降仙驛: 부 북쪽 2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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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 양양도호부 관내 역 통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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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古地圖및 驛址




1) 古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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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驛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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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3년(1590년) 상운역에 있던 상운관을 양양도호부 관아와 인접해 있는 연창역 주변에 건립하여 祥雲道15屬驛을 관할하였다.





7. 맺는말




우리나라는 문헌기록에 신라시대 우역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신라의 우역을 근간으로 개성을 중심으로 22역도 525속역 체계로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역도체제를 한양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개편하면서 정비하여 41역도 543 속역 체계를 유지하였으나 임진왜란에 피폐되었고, 그 후 파발제로 운영되다가 1896년 역도-속역체제는 폐지되었다.

본 연구자료의 중요부분인 상운역에서부터 연창역 사이의 남북 7km와 서쪽으로 4km 범위 내에는 양양국제공항, 수산항 요트마리나, 동해고속도로 하조대나들목, 7번국도, 옛 동해북부선 철로길, 해파랑길 44코스, 동해안 자전거길, 38선을 넘나들던 디모테오순례길 등의 육상·항공·해상의 교통로가 있고, 또한 인근주변에는 사이클벨로드롬 경기장, 골든비치골프리조트, 선사문화유적지와  박물관, 대명리조트 솔비치 등의 문화체육관광을 아우르는 시설들이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상운역에서부터 연창역 까지의 역로의 잔도를 복원하여 시대별 교통의 발달을 체험할 수 있고, 조선시대 공무수행을 위하여 파말 마가 달리듯이 승마로 힐링 할 수 있는 최적지로 생각되며, 더 나아가 최근 남북이 동해북부선 철도사업을 시작함에 있어 기차가 남북을 왕래하는 통일의 꿈을 가져본다.





【參考文獻】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王朝實錄

世宗實錄地理志

承政院日記

日省錄

輿載撮要

輿地圖書

大東地志

經國大典

增補文獻備考

江原道誌

關東邑誌

關東誌

襄州邑誌

襄陽郡誌

襄陽歷史資料集

襄陽의 땅 이름

김경추 지리학연구 제34권 2호, 2000

嘉梧藁略冊三

稼亭先生文集卷之十九

葵亭集卷之二

葵窓遺稿卷之二

金克己의 詩

白軒先生集卷之十

白軒先生集卷之十一

三淵集卷之九

雪峯遺稿卷之十三

十淸先生集卷之二

樂全堂集卷之三

樂全堂集卷之四

樂全堂集卷之七

樂靜先生文集卷之一

鄭樞의 詩

松齋集卷之一

市南先生文集卷之二

秋江先生文集卷之二

虛白堂詩集卷之七

虛白堂詩集卷之十

鶴洲先生全集卷之一

寒洲先生文集卷之二

海月先生文集卷之一

海左先生文集卷之六

海左先生文集卷之七

海左先生文集卷之八

《附錄》(詩·文集및 古文獻資料) → 별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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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國史記> 新羅本紀第三> 炤知麻立干三月始置四方郵驛命所司修理官道.고 기록되어 있다. [487년 03월(음)]

2)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3) 한국의 역사를 시대 구분할 때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시대

4) 초치제도순관현종이순우범어혐명개위제도관역사공양왕시치역승후파역승분위별감심복치역승 初置諸道巡官顯宗以巡宇犯於嫌名改爲諸道館驛使恭讓王始置驛丞後罷驛丞分爲別監尋復置驛丞

5) 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던 임시벼슬

6) 지리학연구, 제34권 2호, 2000 116P 김경추

7) 양양군지 상권 168, 170쪽

8) 산을 뚫거나 땅을 파서 길을 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