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어성십경창화시

어성산수록(漁城山水錄)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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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150회 작성일 2021-03-0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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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성산수록(漁城山水錄)


  현산(峴山,양양)의 남쪽 40리에 어성전(漁城田)이 있으니, 산이 둘러 쌓아 성(城)과 같았고 물은 깊어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으며, 골짜기가 깊으나 채소밭[場圃]을 서로 마주한 것이 한 골짜기 중의 명승지였다.

  그 동북쪽의 여러 산은, 곧 오대산(五臺山)의 북쪽으로, 만월산(滿月山)의 한 기슭이 북쪽으로 뻗어 와서 80~90리를 가면 큰 바위들이 뒤엉켜 신선령(神仙嶺)・철갑령(鐵甲嶺)등의 고개와 초전치(草田峙)등의 여러 산이다. 철갑령의 산기슭은 또 동북으로 향하여 와서 강령치(綱嶺峙)가 되니, 곧 어성(漁城) 동북의 여러 산이다.

  그 가운데 한 봉우리가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를 듯한 것을 향로봉(香爐峰)이라 하는데, 세상에서는 화로봉(火爐峰)이라고 한다. 내가 화(火)자를 고쳐 향(香)자로 했으니, 대개 이 봉우리는 강령(綱嶺)에 있어서 가장 높기에 올라서 멀리 보는 경치가 한수(漢水) 남쪽의 여러 봉우리보다 못하지 않다. 남쪽으로 명주(溟州,강릉)의 화비령(花飛嶺)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수성(水城,간성)의 은봉(銀峰)을 마주하니, 무릇 수백 리(里)내에 천 개의 봉우리와 만 개의 골짜기가 우뚝 솟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별이 늘어서고 바둑돌이 펼쳐진 듯하다. 동쪽으로 푸른 바다를 가리키면 만 리에 바람과 파도가 넓고 넓어 끝이 없어 대장부(大丈夫)의 심회를 펼칠 만하다.

  3월부터 5월이 되면 이 봉우리 위에 구름과 달이 담박(淡泊)하게 바뀌어 참으로 사랑할 만하다. 향로봉의 동북으로 1리(里) 쯤에 좌우로 갈라진 봉우리가 서로 끌어 온 비탈 속 한 언덕에 동쪽으로 자리 잡고 서쪽으로 향한 것을 원통암(圓通庵)이라 한다. 회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고 물과 바위가 아름다워 좌우의 산방(山房)이 매우 청정(淸淨)하며, 마주하는 곳에 문필봉(文筆峰)이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전하기를 사는 스님들이 문사(文詞)에 능한 이가 많다고 한다. 암자의 법당 앞의 집에 범종(梵鍾)이 있는데, 항상 저물녘이 되어 어두워지면 고래 소리를 요란히 내어 한적한 절의 밤 종소리와 같았다.

  환우현(喚牛峴)은 암자의 남쪽에 있고 계명암(鷄鳴巖)은 암자의 서쪽 골짜기 입구에 있다. 길 우측 사모암(紗帽巖)은 암자의 동쪽 몇 리(里)쯤에 있다. 암자의 서북쪽으로부터 한 작은 고개를 넘으면 명주사(明珠寺)가 있으니, 곧 양양(襄州)의 네 절 가운데 하나이다.

  중엽 이래 자주 화재(火災)를 겪었으니, 지금은 그 옛터로 인하여 겨우 몇 간의 불사(佛舍)짓고 지(誌)를 기록하였다. 절의 서남쪽을 와우대(臥牛臺)라 하고, 그 동북쪽을 청연암(靑蓮庵)이라 하는데, 골짜기에는 예로부터 청연암과 무심암(無心庵) 두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여 졌다.

  절의 서남쪽으로부터 청련암에 이르기까지 골짜기에 비석과 탑이 첩첩한데, 방산(舫山) 허훈(許薰)11)이 지은 「용악선사비명(聳岳禪師碑銘)」 또한 거기에 있다.

  오현(烏峴)은 청련암의 동북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갈오현(葛梧峴)이라 한다. 지세가 평탄하고 땅이 비옥하여 수십의 인가가 있다. 마을 앞의 나무는 시냇물을 따라 줄을 이루고 칡넝쿨이 숲을 덮었으며, 사계절에 밥 짓는 연기가 맑게 두르고 있어 그것을 바라보면 은연중에 거의 세상에 은둔한 것 같다. 그러나 근처에 사는 사람이 풀을 베고 밭을 일꾼 것을 만류하여도 우산(牛山)의 도끼와 자귀12) 면하지 못하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오현의 동북쪽으로부터 봉우리와 산이 서로 이어져 도운평(道雲坪)에 이르면,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이 매우 험준하게 물가에 있어서 어성(漁城)의 방위하는 문[捍門]이 된다.

  초전치(草田峙)의 동쪽 기슭은 넓게 퍼져 개전리(開田里) 및 팔미동(八美洞)이 된다. 그 서쪽 기슭이 좌로 돌아 고적치(高積峙)가 되니, 웅장하고 험준한 것이 어성(漁城)의 서남쪽에 우뚝 서려 있으면서 좌우로 나누어진 숲이 둘러싸고 있다. 또 그 원래 기슭은 학의 무릎[鶴膝]이나 벌의 허리[蜂腰]와 같기도 하면서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향하다가 어성(漁城)의 중앙으로 곧바로 나와 오현(烏峴)과 서로 마주한다. 그 북쪽을 거처하는 사람들이 평촌(坪村)이라 하며, 그 남쪽은 상촌(上村)이며, 그 서쪽은 양촌(陽村)이다.

  대체로 이 산은 세(勢)가 두텁고 기(氣)가 쌓여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장차 장맛비를 내리려 하면 뜬구름이 바위에 닿거나, 혹은 석 달 여름 동안의 비가 개면 금같은 가지와 옥 같은 잎이 영롱하게 아름다움은 모두 천만의 기이한 봉우리에서 나오니, 은자(隱者)가 기뻐할 만한 것이다.

  그 서남쪽의 여러 산은 곧 응봉령(鷹鳳嶺)의 한 자락으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수없이 거듭되는데, 50~60리를 가면 면옥치(綿玉峙)이다. 또 면옥치로부터 동쪽으로 60~70리를 가면 삼봉산(三峯山) 및 화등산(花嶝山) 등 여러 산과 고적치(高積峙)가 남과 북으로 서로 마주하니 실로 어성(漁城) 서남쪽의 여러 산이다. 화등산의 위는 두견화(杜鵑花)와 철쭉꽃이 많이 핀다. 항상 봄이 되면 온화한 경치에 밝은 꽃이 화려하여 비단을 수놓은 것이 서로 섞인 것 같다.  서쪽 역참에 저녁 빛이 반사될 때에 광선이 담담한 구름과 가벼운 안개를 직접 비추는 것이 영롱하여 기쁘게 볼 만하다.

  화등산(花嶝山)의 동쪽은 구서봉(龜瑞峰)이다. 이 봉우리 뒷 비탈이 북쪽으로부터 점차 동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높이 솟아 물가에 있어 풍경이 빼어나다. 구전(舊傳)에 명주사(明珠寺)의 서쪽에 청심대(淸心臺)가 있었으나 그 장소는 상세하지 않다고 한다. 내가 그 지세를 살펴보고 이름을 청심대(淸心臺)라 하였다. 화등산 봉우리의 북쪽은 황장치(黃場峙)인데, 여러 봉우리와 가파른 바위가 도운평(道雲坪)과 함께 물을 건너 서로 마주하고 빗장을 걸어 문을 잠금이 긴밀하여, 한 골짜기의 수구(水口)가 된다.

  은담(銀潭)은 화등산의 남쪽에 있으니, 근원은 면옥치(綿玉峙)의 도명촌(道明村)에서 나와 양촌(陽村)의 상류에 이르면 넓고 평평한 바위[磐石]가 있다. 물이 흐르는 곳에 평평하게 퍼져 있고, 아래에는 한 못[潭]을 이루었다. 높이는 몇 길쯤 되는데, 장맛비가 내려 더욱 불어나면 은빛 파도와 눈 같은 물결은 폭포수 쏟아지듯 미친 듯이 달리고, 소리는 만 가지 우레와 같아, 바라보면 여산(廬山)의 폭포(瀑布)와 같다. 상류에는 마고(麻姑)13)가 돌을 모아 둔 것이 있고, 하류는 동쪽으로 한수(漢水)로 흘러 들어간다.

  한수(漢水)의 근원은 오대산(五臺山)의 북쪽 신선령(神仙嶺) 아래로, 만 번 굽이쳐 북쪽으로 흘러 부연(釜淵)과 법수치(法水峙)의 골짜기를 경유하니, 모두 60~70리이다. 향로암(香爐庵)에 이르면 운문(雲門)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모두 향로와 운문 두 암자는 폐하여 진지 이미 오래이다. 운문의 골짜기는 남쪽과 북쪽 양쪽 기슭이 석벽으로 바위가 험하여 곧게 선 것이 천 길이다.상하로 수십 리가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펼쳐지고 솟아 물가에 있어, 어떤 것은 용이 몸을 감고 있고 범이 엎드려 있는 듯하며, 어떤 것은 코끼리가 춤을 추고 봉황이 날갯짓하는 듯하여 타고난 모양이 각각 다르고 시냇물을 따라 흐르는 맑은 샘물이 빠르게 솟아난다. 하류의 북쪽은 너럭바위가 높이 솟아 백여 사람이 앉을 수 있다. 바위 표면에 운문암(雲門庵)이라는 큰 세글자가 있으니, 곧 녹은(鹿隱) 이형익(李衡翼)의 필적으로, 운문 풍경의 빼어남을 생각할 수 있다.

  조금 북쪽 바위 위에 나막신 자국이 있어 노인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장사(壯士)가 올랐던 곳이라 한다. 허망한 소리로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운문함(雲門巖)의 북쪽에 큰 바위가 서로 마주하고 있는데, 가지런히 솟아 높이가 8~9길이며, 가운데에 한 소(沼)가 있으나 깊이를 알 수가 없으니, 곧 용소(龍沼)이다. 만약 해가 큰 가뭄을 만나면, 거주하는 백성들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면 문득 영험함이 있다.

  용소 아래는 곧 여울을 이루는데, 흰 돌들이 삐죽삐죽하고 초록 물결이 잔잔하다. 바람이 맑고 달이 밝은 밤과 흐린 날 비 내리는 저녁에 산속 창가에 한가로이 누워 마음을 씻고 귀를 맑게 하면 잔잔히 흐르는 물결과 부딪히는 거친 물소리가 간혹 옥(玉)을 부수거나 옥돌을 울리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간혹 징을 치거나 북을 울리는 세가 정회(情懷)를 감동하게 해 사람들이 갑옷을 입고 동쪽으로 정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용소 아래 1리쯤에 바위가 흐르는 물결 속에 있는데, 상류 쪽은 뾰족하고 하류 쪽은 둥굴어 모양이 관모(冠帽)와 같다. 사는 사람들이 부르기를 관모암(冠帽巖)이라 하니, 곧 모암(帽巖)이다. 층암(層巖)과 완석(頑石)이 남쪽 기슭에 섞여 있어 맑은 물이 여울지며 좌우를 비추니, 때로 물고기 잡는 늙은이와 낚시하는 나그네가 무지개 같은 장대와 달 같은 낚시바늘로 유연히 자득한다. 해가 정오를 지나면 피리를 희롱하며 서로 화답하여, 절유(折柳)와 낙매(落梅)의 곡조가 있어 구름을 뚫고 바위를 찢는 울림이 매우 맑아서 풍물의 아름다움이 완연히 서호(西湖)와 같다.

  모암의 아래에 물결 흐름이 조금 급해지다가 점차 고인 물을 이룬다. 물은 깊고 물고기는 살쪄 동쪽 기슭의 옆은 능금나무[柰木]가 숲을 이루어 내천(柰川)이라는 이름은 오로지 이 때문이다. 팔뚝만 한 물고기가 나타나 헤엄치니, 가만히 사물의 이치를 보면 참으로 활기 생동한 곳이다. 내천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 오현촌(烏峴村)에 이르러 도운평(道雲坪)을 지나 골짜기 입구를 나간다. 고적치(高積峙) 남쪽의 물은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팔미동(八美洞)에서 나오고, 하나는 명주사(明珠寺)에서 나온다. 골짜기가 합류하여 오현(烏峴)에 이르면 한천(漢川)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어성 산수의 대략이다.

  아! 관동(關東)이 비록 치우쳐 안쪽 모퉁이에 있으며,산에 의지하고 바다에 막혀 있으나, 풍토(風土)의 아름다움은 교남(嶠南,영남)과 호서(湖西,충청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어성(漁城)의 한 산수(山水)와 목석(木石)에 이르러서는, 흔쾌히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으나 고요히 천 년 동안 묻혀있어 알려지지 않았다. 대체로 우리 동방의 풍속은 산수(山水) 유람하기를 즐기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세상의 전함에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나이가 젊었을 때에 운문암(雲門庵)의 절집에서 책을 읽었다고 하나, 그 진위는 자세하지 않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일찍이 향로암(香爐庵)에서 잠시 거처하며, 달동(達洞)에서 지초(芝草)를 캤다고 하고, 또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이 이 땅에 왔을 때, 일찍이 운문(雲門)과 내천(柰川) 사이에서 동료와 사냥을 하며 잡영(雜詠) 몇 편이 있어서, 공의 문집에 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같이 보지 못했으니, 고루하고 듣지 못한 것이 한스럽도다.

  해는 을미년 겨울로, 내가 어성(漁城)의 마을에 잠시 거처하다가 해를 넘겨 이듬해 봄에, 어른과 아이들 2~3명으로 산수(山水) 사이에 이르러 둘러보고 우러러보며 노닐다가 십경(十景)을 얻어 돌아가려는 때에 그것을 읊었다. 나의 거칠고 졸렬한 학문으로 산수의 경중을 따지기에 부족하지만, 다행히 한 군(郡) 내에 많은 선비가 시(詩)에 뛰어남에 힘입었다. 전하고 서로 화답함이 수십여 사람에 이르니, 어성(漁城) 산수의 드러남과 감추어짐을 점칠 수 있었다. 곧 꽃나무와 단풍나무 숲의 빼어난 풍경과 구름안개와 서리와 눈의 경치와 같은 것은 네 계절 모양을 바꾸어 오고가는 사람의 달관 된 경지를 충족할 수 있으니, 앞으로 현산(峴山)의 이름은 함께 해좌14)(海左 丁範祖)의 기록에 드러날 뿐이다.

  1917년 4월에 용주산인(龍洲散人) 이용선(李容璇)15)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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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허훈(許薰, 1836-1907): 자는 순가(舜歌),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林隱洞)에서 태어났다. 허조(許祚, 1817 -?)의 아들이고,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방산집(舫山集)』이 있다.


12) 우산(牛山)의 도끼와 자귀: 맹자(孟子)가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무성하여 아름다웠으나 큰 나라의 교외에 있는 탓에 도끼와 자귀로 베어내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자라는 바와 우로(雨露)가 적셔 주는 바에 싹과 움이 나오는 것이 없지 않건만 소와 양이 또 따라서 뜯어 먹으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하여, 사람의 성품이 본래 선(善)하지만 물욕(物慾)에 침해당하는 것을 비유하였다.


13) 마고(麻姑): 한나라 환제(桓帝) 때의 선녀 이름인데, 손톱이 새 발톱처럼 생겼으며, 삼천 년마다 한번 변하는 동해(東海)가 세 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변하도록 아주 오래 살았다고 한다. 『神仙傳 麻姑』


14) 양양부사 역임, 문집으로 『海左集』 있다.


15) 이용선(李容璇): 이용선의 생몰 연대 등 신상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 『어성십경창화시(漁城十景唱和詩)』 시집(詩集)의 발간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에 관한 기록은 1928년 제작되어 양양 김해김씨 가에 보관된 「융사계(隆師契)」라는 문서에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