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북부선 종착지 양양역

1) 양양역의 개통

페이지 정보

조회 1,065회 작성일 2021-03-03 13:32

본문

1) 양양역의 개통


  양양역이 개업되자 양양역를 중심으로 단층 건물로 지어진 역사에는 역장과 역무원및 선로반, 기관부 직원 등 100여명의 인원이 종사했고, 이들이 기거하는 관사는 청곡리에 10동이 있었다, 역 주변에는 양양광업소에서 솔개미차(삭도)로 반출한 철광석을 보관하는 조구통과, 산지에서 운반되어온 통나무를 보관하는 야적장과 쌀을 비롯한 곡물과 일반화물 창고가 역 주변에 여러 동 있었고, 증기기관차에 쓸 석탄의 야적장과 사용한 석탄재를 버리는 하치장도 있었다.

  기차를 이용하려는 유동 인구가 날이 갈수록 늘어남에 따라서 역 광장 주변에는 음식점, 주점, 매점 등의 상점들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역에는 기차를 이용하려는 외지승객과 현지승객들이 증가하다보니 상가가 들어서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과 짐을 옮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역 주변에는 기차를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주변 거주자가 늘어나면서 역세권(驛勢圈)이 형성되었다.


(1) 이용승객 급증


  동해안의 영동지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육상 교통수단인 목탄차보다 동해북부선의 기차를 더 많이 이용하였다.

  양양역은 양양에서 원산 가는 상행선 출발역이고, 원산에서 양양으로 가는 하행선의 종착역이었다.

  이 당시에는 양양 이남 강릉, 삼척, 울진 등지의 주민이 가장 빨리 서울로 가려면 양양역에서 기차를 타고 원산에서 환승하여 경성(서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양양역이 개업하자 이 역을 이용하는 여객은 서울로 가고 오는 사람, 특히 금강산수학여행 학생들과 관광객이 많았다. 유학생과 통학생들, 원산의 큰 병원에 가는 환자와 가족 보따리 장사를 하러 다니는 등 많은 사람들이 양양역을 이용하였고, 간혹 일자리를 찾아 중국 간도나 만주지방으로 가는 이주민들도 있었다.

  1940년과 1944년인 당시 기준으로 새벽에 양양역을 출발하는 첫 차를 시작으로 오전, 오후, 저녁 등 하루 4차례 운행했던 열차는 원산으로 유학하거나 통학 거리에 있는 학생들은 통학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1938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에 “襄陽驛에 旅客洪水”라는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동해북부선 간성 – 양양간 연장 개통 이래 양양역에서 타고 내리는 여객이 매일 평균 500명 이상으로 신설되고 초 기록을 세우고 있다는데 대합실이 협착(狹窄)하여 기차 발착 시간에는 실내외에 여객의 홍수를 이루고 있다며 …… 대총(大摠) 양양역장은 신설된 역으로서 여객이 많은데 나도 놀랐습니다.”

 

<그림 3> 1938년 1월 22일자 동아일보 【襄陽驛에 旅客洪水】 기사

 

train_페이지_036_이미지_0001.jpg


  이와 같이 몰려드는 유동인구의 증가로 역사 일대 주변에는 많은 여관과 식당들이 즐비하여 역 광장과 주변에는 항상 활기가 넘치는 거리가 조성 되었다.

  특히 타지방에서 온 외지 여객들은 역세권 주변의 숙박시설이 모자라 양양읍내 여관에서 숙박했는데, 양양역에서 읍내 여관까지는 2km 정도 거리에 있었다.


(2) 화물량 증가


  양양역에는 양양광산에서 채굴되는 철광석 집하장인 조구통이 있었다. 1938년 개발된 광산에서 1941년경부터 속칭 솔개미차(삭도)를 이용하여 양양역의 조구통까지 철광석을 운반한 다음 양양역에서 출발하는 화물칸에는 양양광산에서 채굴한 자철광이 가득 실려서 흥남 제철소로 갔다.

  한반도의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종단철도 동해북부선은 양양역에서 15~20량 정도의 객차와 화물칸이 함께 운행되었다고 한다.

  양양역에서 광업소까지의 기차노선은 1942년경에 개통한 후 부터는 양양광산에서 싣고 갔다고 한다. 또한 속초역에서는 기관차 화물칸 1량에 청어와 명태를 싣고 동해 북부선을 이용하여 멀리 중국까지 가서 장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 양양역에는 양양지역 산지에서 생산된 목재가 우차꾼들에 의하여 10대씩 줄지어 운반되어 오면 목도꾼들에 의하여 목재가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여 당시 양양 역에 목재사태(木材沙汰)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날 정도로 양양역 구내에는 물론 구외까지 목재가 산처럼 쌓여져 있는 것을 처음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한 일이라고 신문기사에 실렸다.

  앞서 1938년 1월 22일자 ‘襄陽驛에 旅客洪水’ 라는 제목의 동아일보 기사에도 양양 주요산물에 하나인 목재는 역 구내에는 물론 역 부근까지 산적하여 매일같이 장전(長箭), 원산(元山), 경성(京城)방면으로 운송하는 중으로 각 방면으로 불경기인 요즈음 다만 철도만이 흑자경기를 보이고 있는데 대하여 대총(大摠) 양양역장은 신설된 역으로서 여객과 화물이 이렇게 많아서 나도 놀랐다.

  그리고 대합실이 좁아서 여간 곤란하지 않은데 이것은 당초에 건설계에서 양양을 너무 조그마하게 본 관찰 부족이라 했다.

  1938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 ‘襄陽驛에 木材沙汰’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다.


<그림 4> 1938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 【襄陽驛에 木材沙汰】 기사

 

train_페이지_038_이미지_0001.jpg


  위 <그림4>의 기사내용을 살펴보면 곡산, 수산과 함께 양양 3대 산물에 하나인 임산(林産)은 1년간 반출통계가 아래와 같다는데 이것은 사유림에서 벌채되었는데 강릉 영림서(江陵營林署) 작업장 통계와 합한다면 전 조선에서 첫째를 꼽는 임산지로 현재 양양역에는 구 내외에 목재사태가 나서 누구나 처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랄 만하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목재생산에 대한 내역은 산림 벌채지시가 1,367건, 통나무 본수가 267,085본, 통나무 재속이 20,652㎥으로 집계되었다.


(3) 해방 이후의 양양역 상황


  8·15해방으로 양양이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공사가 중단, 동해북부선은 이름 그대로 동해 북부에서만 운행하는 기차가 됐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운행이 중단된 1950년까지 14년간 양양과 원산을 이어주는 역사는 기간 시설물인 탓에 한국 전쟁 당시 집중폭격을 맞고 양양 역사(驛舍)와 철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1953년 영업을 재개했으나 서류상의 부활이었고, 1967년 공식 폐역이 될 때까지 열차운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영북지역을 대표하던 양양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