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권(金鍾權)(1917∼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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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13,114회 작성일 11-02-1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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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권(金鍾權)(1917∼1987년)

관향은 김해이며 호는 설악산인(雪嶽山人)으로 강현면 중복리(복골)에서 태어났다. 배움 없음이 한이 된 부모의 자식에 대한 향학열에 힘입어 6세 때 2년간 인제의 한학자 정기빈 선생의 서당 훈도아래 복골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2세 때 가세가 빈곤하여 대포공립보통학교 5학년을 중퇴하였고 1931년 15세 때 부친의 급서로 모친이 짠 삼베와 누에비단 옷감을 등짐지고 모친 따라 양양 인제 고성 등지로 옷감 장사 일을 도왔다. 1933년 생업이 어려워 17세 가을에 용단을 내려 모친을 모시고 원산으로 이사하여 양조장에 취직, 낮에는 양조장 직공, 밤에는 독학, 이렇게 6년간의 주경야독으로 당시 일제강점 치하의 제도 하에서 법학, 행정학을 공부, 1942년 보통문관(판인관)시험에 합격되어 면소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44년 봄에 웅기면 부면장으로 발령받아 근무하였다. 1945년 8․15광복을 만나 귀향하여 신흥사에 들어가 사학을 연구하여 중등교원시험에 합격되어 1946년 죽왕면 오호중학교에 배속되었으나 공산치하에서 보통문관(판인관)시험 합격과 부면장 근무 사실이 원인이 되어 공산치하의 공직에서 축출되었다. 공산치하의 학정에 견디지 못하고 1950년 음력으로 1월 복골에 모친과 외아들을 남겨두고 부인과 두 딸만 데리고 원산으로 다시 이사하였다. 1951년 1․4후퇴 때 원산에서 거제도로 피난, 1951년 3월 35세 나이로 중부전선 지역 고향의 모친과 아들을 구하고자 장승포에서 제2국민병에 자진 입대하여 군사훈련을 받던 도중 득병하여 6․25한국전쟁에 참전하지 못하고 입원 후 병가 제대하였다. 1951년 가을 초등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여 거제군 연초면 오비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1952년 9월부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소속 정훈관이 되어 인민군 포로들에게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시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에 일조하였다. 함경남북도 등 각처에서 모인 피난민과 함께 건립한 경남 거제군 하청중학교 연초분교장에 추대되고, 1954년부터 부산 청구중고등학교 교사, 혜화여자 중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1961년부터 1984년까지 서울 보성고등학교 교사, 문교부 한문교과서 편찬위원, 43년간 교직에 봉직하면서 특히 국학 한학 사학분야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57년 국난사개관(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대한민국 국난극복사의 효시), 1960년 우리나라 최초로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의 완역본, 1963년 정인지 김종서의 고려사 완역본,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 : 조선 정조 때에 정약용이 지은 어원 연구서)를 번역, 명가의 가훈 편저, 고등학교 검인정 한문교과서 저서, 한문해석 입문 등 38책(권수로 64권)의 많은 저서와 역서를 편찬하여 열악한 우리나라 고전번역계에 일조를 하고 후학의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민속학 분야에도 우리 뿌리의 풍속도 다수의 편저를 남겼다. 특히 1995년부터 1980년까지 경향각지의 유력 일간지에 34편의 향토사학 연구논문을 게재하여 설악산 일대의 문화유적 등을 전국에 알리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삼육대학, 육군사관학교에 초청 국사 강의를 하였다. 교육부장관의 교육공로상, 경향사도상, 상록수상을 수상하였고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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