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의인물 목록
    ○ 노경복(盧景福) 관향은 광주이며 양양읍 태생이다. 서흥(瑞興)부사로 유년시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본래 가난한 가정이므로 잘 먹지 못했으나 대과관주서(大科官注書)를 지냈다. 기한(飢寒)의 고통을 나타내지 않았고 그 동리에서 효성이 지극하여 음식물을 주어도 좋은 …
    ○ 노기경(盧起慶)(1755∼1805년) 관향은 광주이며 호는 무제(茂齊)이다. 안정(安鼎)의 후손으로 천문지리에 밝고 경학에 박섭(博涉)하여 이학에 정통하고 문집이 많이 남아있다.
    ○ 노병렬(盧炳烈)(1889∼1978년) 관향은 광주이며 한학에 열중하여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고, 풍채는 두목지(杜牧之)와 같으며 선풍도골(仙風道骨)다웠다. 음풍영시(吟風詠詩)하면서 무산십이봉하도원(巫山十二峰下桃源)에 사는 듯했다.
    ○ 노병목(盧炳穆)(1879∼1962년) 관향은 광주이며 호는 석천(石泉)으로 별명은 땡삐이다. 유시부터 한학을 닦아 조예가 깊었으며 보천교에 입도강산(入道江山)을 누볐고 일제 때에도 단발하지 않고 강인하게 반일했으며, 인공 때는 반동분자로서 공민증과 선거권도 박탈당…
    ○ 노병원(盧炳源) 관향은 광주이며 서면 용천리 거주하였다. 한학과 시문에 이름을 날렸으며 신망이 높아 서면장을 10년간 역임했다.
    ○ 노병종(盧炳宗) 관향은 광주이며 한문과 시문에 능하고 서면장을 지냈다.
    ○ 노병태(盧炳泰)(1862∼1933년) 관향은 광주이며 서면 북평리 태생으로 한학과 시문에 이름이 높았고 일제강점 후 10년간 서면장을 지냈다.
    ○ 노서린(魯瑞麟) 노(魯)효자는 군리(軍吏)로서 숭덕(崇德) 3년 무인(戊寅)에 부친이 중병 때 백약이 무효하여 운명직전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니 아버지가 회생하였다. 효성이 지극함에 감사의 주청으로 숙종조(肅宗朝)에 정각(旌閣)을 내려 표창하였다.
    ○ 노 완, 효(盧 玩, 涍)(1795∼1865년), 임수(恁秀)(1841∼1920년) 관향은 광주이며 완(玩)의 자는 사연(士淵)이고 호는 운곡(雲谷)이다. 효(涍)의 자는 명거(溟擧)이고 호는 석암(石庵)이다. 임수(恁秀)의 자는 성신(聖信)이고 호는 석초(石樵)…
    ○ 노용수(盧龍秀)(1802∼1852년) 관향은 광이며 3·1운동 때에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극심한 옥형으로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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