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시행(李時行)(1919∼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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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708회 작성일 11-02-1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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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행(李時行)(1919∼2004년)

관향은 함평이며 호는 화정(花庭)이고 속초시 도문동에서 출생이다. 대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만주(滿洲)로 이주 만주소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교편을 잡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20세 청년 공은 일본군의 한중일 3개 국어 통역관으로 북경(北京)에 파견하여 2년간 전쟁을 체험했다. 다시 상해(上海)에 있는 일본 재벌회사 삼정계열사(三井系列社)인 중흥공사(中興公司)에 일등통역관으로 취직했다. 8·15광복 후 귀향하여 영랑학교 교감, 대포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6·25한국전쟁 중 경북 영일군 송라국민학교 촉탁교사로 근무하다 휴전 후 다시 귀향하여 양양경찰서의 전신인 양양치안대 사찰주임으로 활약하였다. 1954년 민정이양으로 공직을 정리하고 손양면 송현리에 주거지를 옮기고 농사를 하면서 가평수리조합 대표 손양면 수여리 이준재(李俊在), 위원 송현리 이광재(李光在), 가평리 함해조(咸海祚) 신재필(辛在弼)과 같이 수리사업에 총무로 활약하여 손양면 동면평과 동면후평[밭밤들, 가평들]의 수리안전화에 일역했다. 이어 손양면 도화리로 주거지를 정착한 도원장(桃源莊)에서 한문서당을 개설하고 함평이씨(咸平李氏), 강릉김씨(江陵金氏), 강릉최씨(江陵崔氏) 족보와 양양향교지(襄陽鄕校誌) 편집에 일역했으며, 양양문화원 개설 한시교실에서 양양음사(襄陽吟社) 초대회장으로서 한시를 교수함으로써 우리민족 고유전통문화인 한시의 맥을 잇고 부흥시키는 데 심혈을 기우렸으며, 2004년 양양군민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750년 7월(조선조 영조 26년 경오)에 양양 강릉 양향의 문인의 조직으로 오늘까지 이어지는 경낙회(鏡洛會)의 기념비 수립을 위한 추진위원장을 담당〔추진위원 : 이종우(李鍾㝢), 최익규(崔翼圭), 이종욱(李鍾旭), 고석우(高錫佑)〕2003년 3월에 낙산도립공원내에 수립하여 영원히 양강의 문물과 유풍을 유전하는데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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