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준재(李俊在)(1893∼1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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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397회 작성일 11-02-1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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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재(李俊在)(1893∼1976년)

관향은 전주이며 자는 석영․사덕(錫英․士德)이고 호는 동농(東農)이다. 손양면 수여리 태생으로 1919년 4월 4일 양양장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양양경찰서에서 열사 함홍기와 권병연이 희생되는 것을 목격하고 왜경에 쫓겨 혼자 도망쳐 월리 앞길 뚝 밑에 엎드려 숨어 있다 고개를 드는 순간 뒤쫓아 온 왜경의 군홧발에 채이어 앞니가 모두 불어졌으나 두려워 소문도 못 내고 치료도 못한 바 서서히 10년 내에 나머지 이가 모두 빠졌으니 평생 한대의 치아도 없이 사시다 운명이 다가와서야 자식에게 사실을 알렸다.

서면 용천리 앞 남대천에 설치한 용천보[일명 가평보 : 손양면 동면평 일부, 동면후평 : 밭밤들, 가평들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수리시설] 관리요원으로 봉사하다 해마다 홍수와 노후로 사용불능하게 되자 가평수리조합 대표로서 동 조합위원 송현리 이광재(李光在), 가평리 함해조(咸海祚), 신재필(辛在弼), 도화리 이시행(李時行)과 협동하여 손양면 송현리 고월산 밑에 디젤엔진을 동력으로 한 양수시설 설치를 추진하니 당시 이건웅(李建雄) 양양군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공하게 되었다. 이로써 양수장 부지 내에 군수이건웅송덕비(郡守李建雄頌德碑)를 1967년 4월 수립(竪立)하여 기념하게 하였다.

만년에는 250년 전통의 경낙회(鏡洛會), 기구회(耆舊會) 회원으로 양강(襄江)의 문화교류에도 힘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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