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기종(韓基鍾)(1926∼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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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5,921회 작성일 11-02-1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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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종(韓基鍾)(1926∼1951년)

관향은 청주이며 이명(異名)은 서원수무(西原秀武)로서 현북면 중광정리 태생이다. 현북보통학교를 거쳐 1939년 인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성 광신중학교에 진학 1942년 3학년에 재학 중 학생의 몸으로 ‘일제에 반대하고 조선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소위 일제의 ‘보안법 위반’의 명목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4년간의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8·15 광복을 맞아 출소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인 1946년 10월에 급히 월남하여 ‘조선민주청년통일전선준비위원회’를 결성[1947. 3.30.오후 1시 종로통 영보빌딩 3층)하고 부위원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자유신문 1947년 4월 10일자 신문 참조]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의 보좌관이 되어 김구 선생을 수행하여 평양까지 다녀오면서 조국통일성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950년 10월 1일 국군 선발대와 함께 38°선을 넘어 기사문리로 들어와 현북면 치안유지를 위하여 중광정리에서 치안대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1951년 1․4 후퇴 당시는 현남면, 현북면, 손양면에 이르기까지의 북한군 병력사항을 파악하여 아군 작전참모에 알리는 첩보활동을 전개하여 작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의 고문후유증으로 아깝게 1951년 3월 생을 마쳤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혼란스러운 전란 기었으므로 정부에서는 한기종이 사망사실을 모르고 1952년 3월 요직에 기용코자 이승만 대통령의 명으로 군장교 2명이 의복까지 마련하여 데리러 왔었으나 안타깝게도 현북면 하광정리 38°선상에 위치한 서향판에 모셔진 그의 묘소만을 참배하고 돌아간 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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