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창익 처 전주이씨(崔昌翼 妻 全州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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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341회 작성일 11-02-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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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익 처 전주이씨(崔昌翼 妻 全州李氏)

효부(孝婦)인 전주이씨는 반가(班家)의 가문에서 아버지인 통덕랑(通德郞) 제항(齊恒)과 어머니 파평윤씨 사이에서 1751년에 출생한 바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강릉 향호리 외가[초계정씨]에서 성장하였다. 22세 때에 18세 연상인 최창익(1733∼1789년)의 계실(繼室)로 혼인하였다. 계실이 된지 12년 만에 아들 용필[龍弼(1784∼1853년)]을 낳았다. 결혼 초기부터 남편이 언서(諺書)로 필사한 소학(小學) 내측(內則)등을 잠교(箴敎)함으로써 부학(婦學)과 부덕(婦德)을 쌓았다. 위천 상하방(渭川 上下坊)[양양읍 사천리 조산리]에 일정한 전답과 노비를 소유하였으며 노비의 자녀를 친자식처럼 젖을 먹여 키우는 은혜와 성숙된 위엄의 자세를 보였고, 결혼 초부터 길쌈하여 옷감 짜는 일을 하면서 식구들을 먹이는데도 부족한 살림이었지만 매년 곡식을 판매하여 가용(家用)을 취했으며, 비록 궁색한 살림이었으나 가난으로 인해 남을 원망하거나 어렵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이 의연한 생활 자세를 보였다. 시부모도 돌아가신 후에 정혼한 처지었으므로 양가 부모를 모셔보지 못한 것을 불효라 한탄하며 절일(節日)과 기일(忌日)에는 정성을 다해 치제(致祭)하니 동리에서 모두 감탄하는 모범을 보였다. 결혼 17년 만에 미망인이 된 이씨의 생활은 불안정한 소농경영(小農經營)이었으며, 1783∼1784년의 풍수충(風水虫)의 재해로 혹심한 가난에 이어, 전처의 아들 한필(漢弼)마저 잃었으니 고통이 가중되는 와중임에도 이웃이나 친척이 눈치 채지 못하게 안빈한 자세로 생활한다. “가난은 병이 아니다. 그로 인해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고 자식이 배우지 못할까 두렵다.”라고 하여 가족의 화목과 자식의 교육을 중시하면서, 호탕하게 웃고 즐기는 자리는 기피하고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집안의 일이 밖으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언서에 능통하여 인척간 편지로 문안하고 타인의 편지도 대필해주는 선의를 베풀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어미가 있으면서 교육시키지 아니함과 어미가 없음이 무엇이 다르며, 자식이 있으면서 배우지 않는 것과 자식이 없는 것이 무엇이 다르랴. 어미가 가르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배우지 아니하면 살아도 이로울 게 없으니 죽은 들 또한 무엇이 애석하랴.”는 전주이씨의 교육관은 “사랑하고도 가르치지 않으면 금수의 사랑일 뿐”이라는 임윤지당(任允摯堂)의 사고나, 성리학적 선이나 의리를 권면하였던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의 자녀교육에 대한 자세와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들 용필을 종부(從父) 창적[(昌迪)홍천현감, 동몽교관]이 개설한 학당에 입문시켜 학문을 수학하게 하여 생원(生員)이 되게 했다. 머리카락이라도 부모의 유체(遺體)인데 어찌 우의(牛衣)나 마천(馬韀)에 쓰라고 여상(女商)이 가져온 얼레빗이나 바늘쌈 등과 바꾸겠는가. 라며 명분을 지켰다. 1822년 72세로 생을 마감 할 때까지 특히 33년간의 미망인으로서의 정렬(貞烈)의 행장은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하였으며 조선시대 여성 지식인들의 보편적 사고의 표상으로 조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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