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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오(管夷吾)와 포숙아(鮑叔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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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조회 12,565회 작성일 11-02-1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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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오(管夷吾)와 포숙아(鮑叔牙)

 - 고전 속에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도를 배우며 - 구용 열국지 중에서 일부 재구성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제후국(諸候國)으로 제(齊 : B.C. 7~6 세기)라는 나라가 있었다. B.C. 1100년경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멸한 뒤 태공망(太公望 성은 姜 또는 呂 씨로 姜尙, 呂尙, 呂望 이라고도 한다.)을 영구(營邱)에 봉함으로서 시작된 나라이다.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과 하북성(河北省)에 위치했고 화북평야에 있는 많은 이민족 지역을 합병하여 개국했을 때 보다 여러 민족을 합병하여 영토를 넓혀 국토가 여섯배나 더 넓은 광활한 지역을 관장한 나라이다. 수도는 임치(臨淄)이다. 양공(襄公)때 주위를 합병하며 세를 불렸는데 뒤를 이은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주변 30여국을 합병하였다.

제나라는 전설적인 군주인 환공(桓公)과 그의 유명한 신하 관중(管仲)이 다스리는 동안 균등한 조세제도를 시행하고 군대를 창설했으며, 소금과 철을 국가가 독점 생산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세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능력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가 제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모든 제도를 완전히 확립한 것은 제가 처음이었으며, BC 651년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모아 동맹을 결성하여 북쪽의 산융(山戎)을 몰아내고 남쪽 초(楚)의 확장을 저지했다. 그결과 제는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환공이 죽은 뒤 국내에서 혼란이 일어나 새로 결성한 동맹의 주도권을 잃어버렸으며, 그동안 다른 나라들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BC 4세기에 장군 전기(田忌)의 후손이 새로운 통치자로 나타나 다시 한번 중국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세력이 되었고, BC 3세기초에는 패권을 되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때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해 BC 221년 마침내 진(秦)이 제(齊)의 나머지 영토를 흡수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하에서 중국 전역을 통일했다.

제환공 때 명재상 관중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그는 정치가이며 사상가이고 또한 전술가였다. 그에게는 포숙(鮑叔. 일명 鮑叔牙)이라는 죽마고우가 있었다. 처음에 관중은 제나라 공자 규(糾)를 섬겼고 포숙아는 규의 이복동생인 소백(小白)을 섬겼다. 관중은 화살로 소백을 죽이려 활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소백의 혁대 고리를 맞추는데 그쳤고 그의 주군 규를 왕위에 옹립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한편 포숙아의 지혜로 공자 소백은 왕위에 올라 제환공이 되었다. 이로서 관중은 제환공에게 죽임을 당 할 뻔 했으나 포숙아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제환공은 포숙아를 재상자리인 상경에 임명하지를 않고 포숙아의 말을 듣고 그가 추천한 관중을 상경벼슬에 임명하였다. 관중은 이로서 내치면에서 세금을 알맞게 거두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외치면에서 외교활동에 주력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아래 제나라 위상을 제후국의 으듬으로 끌어 올렸다. 제환공은 마침내 관중을 크게 신임하고 중부(仲父)로 받들었다.

관이오(管夷吾)과 포숙아(鮑叔牙)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인간적이며 또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관이오의 자(字)는 중(仲)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용모가 걸출하고 총명이 출중하였다. 고금서적에 통달했고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세상을 바로잡고 시대를 구제할 만한 실력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포숙아와 함께 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했다. 장사가 끝나면 관이오는 언제나 그날 수입에서 포숙아 보다 배 이상의 돈을 가지고 돌아갔다. 포숙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항상 불평했다. 그럴 때 마다 포숙아는 관중을 변명했다. “관중은 구구한 돈을 탐해서 나보다 배나 더 돈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고 식구가 많다. 내가 그에게 더 가지고 가도록 사양한 것이다. 그대들은 오해하지 마라”

그들의 우정은 이렇게 지극했다. 또 그들은 전쟁에 나간 일이 있었다. 싸움터에 서면 관중은 언제나 후대(後隊)로 숨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고 돌아갈 때엔 그는 항상 맨 앞에 서서 걸었다. 사람들은 모두 관중을 용기없고 비겁한 자라고 비웃었다. 그럴 때 마다 포숙아는 또 관중을 두둔했다. “관중은 용기가 없거나 비겁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늙은 어머니가 계신다. 자기 몸을 아껴 길이 길이 늙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려는 것이다. 어찌 관중이 싸움을 겁내리오.” 그들은 함께 일을 하자니 자연 서로 의논도 해야만 했다. 간혹 관중과 포숙은 의견이 맞지 않았다. 사람들은 관중을 심술꾸러기니 마음씨가 비둘어 졌느니 하고 비난 했다. 포숙은 언제나 관중을 변명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때를 잘 만날 수도 있고 불우할 때도 있다. 만일 관중이 때를 만나 일을 하면 백번에 한번도 실수가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함부로 관중을 비난하지 마라.” 관이오는 이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길이 차탄(嗟嘆)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포숙이다.”

이것은 유명한 관중의 말로서 후세에 까지 전해지고 있다. 마침내 그들은 생사를 함께 하자는 교우의 의(義)를 맺었다. 이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가 바로 후대에 전해지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이다.

제양공(齊襄公) 제아(諸兒)가 생존했을 때 슬하에 장자 규와 서출 소백 두 아들을 두었는데 양공은 이들이 모두 출중하여 두 아들 중 한 왕자를 후계자로 삼기위해 스승을 정하여 가르치되 왕자 규는 관이오가, 그리고 왕자 소백은 포숙아로 그들의 스승을 삼았다. 그때 관이오가 포숙아에게 말하기를 “ 주공에게 두 아들이 있소. 다음날 임금 자리에 규 아니면 소백이 오르게 될 것인데 그대와 나는 서로 그들의 스승이 되었다가 어느 왕자 한사람이 왕이 되면 그때 우리는 서로 추천하여 한 임금 아래에서 일을 합시다.” 하였다.

세월이 흘러 제양공 슬하의 두 아들은 정치적 연유로 왕자 규는 노(魯)나라에, 왕자 소백은 거(筥)나라에 망명하고 있을 때이다. 본국에서 공손무지(公孫無知)가 음탕한 제양공(齊襄 - 두 왕자의 아버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을 때인데 오히려 충신들이 공손무지의 잘못에 불만을 삼고 공손 무지를 죽이고 맏이인 왕자 규를 불러 들이기에 이르렀다. 이 눈치를 챈 왕자 소백도 포숙아의 지혜로 본국으로 오던중 먼저 입성하는 왕자 규의 군사와 격돌하였다. 이때 왕자 규를 모시던 관이오는 화살로 포숙아가 모시던 왕자 소백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소백의 혁대 고리를 맞추는데 그쳐 소백은 생명을 건지고 포숙아의 지혜로 먼저 제나라 도성에 입성하여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군위에 오른 제환공은 널리 인재를 등용하려 전국에 포고문을 발표하였는데 제환공의 스승 포숙아는 자기의 친구 관이오를 천거 하였다. 그러나 제환공의 입장에서 보면 관이오는 원수(怨讐)가 되기에 거절했지만 포숙아의 간절한 제언으로 드디어 관중은 제나라의 상경 벼슬에 해당되는 재상이 되었다. 환공의 아량으로 관중은 처벌을 면하고 오히려 제나라 환공을 보필하는 정승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관중은 중국천하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출중한 명신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제환공은 제나라 모든 백성에게 관이오(管夷吾)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존경의 뜻으로 중부(仲父)라 부르게 하였다. 드디어 관이오는 관중(管仲)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과연 관중은 명재상이었으며 뛰어난 사상가였고 걸출한 책략가이며 위대한 전술가였다. 드디어 제 환공은 관중의 보필로 중국천하 제후 춘추전국시대 제후중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으뜸의 패자(覇者)가 되었던 것이다. 관중을 추천한 포숙아나 포숙아의 충언을 받아드린 제환공이나 제환공을 주군으로 다시 모신 관이오의 나라위한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뚜렸했다.

포숙아와 관중이 제환공과의 얽힌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관이오가 포로 신분 일 때 포숙아는 그의 결박을 풀어주고 당부(堂阜)에 머무르게 한 뒤 도성 임치(臨淄)로 가서 제 환공께 아뢰었다.

“흉사를 조상하는 동시에 이번 길사를 축하합니다”

제환공이 영문을 몰라 되 묻는다.

“ 무엇을 조상한단 말이오?”

포숙아가 대답한다. “공자 규는 주공의 형님입니다. 주공께서 국가를 위하여 형님을 없앤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신하로써 어찌 조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 환공이 다시 묻는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그대는 또 어째서 과인에게 축하하오”

포숙아가 대답한다.

“관중은 천하의 기이한 인재입니다. 소홀의 유와 다릅니다. 신이 이제 그를 죽이지 않고 데려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주공은 이제야 어진 재상을 얻었으니 신이 어찌 치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 환공은 마땅찮았다.

“관이오는 과인에게 활을 쏜 자라 그 화살이 지금도 있소. 그의 살을 씹어도 오히려 쾌치 않거늘 어찌 그자를 정승으로 등용하란 말이오.”

포숙아가 대답한다.

“신하된 자로써 그 누가 자기 주공을 위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주공을 쏜 것은 공자 규만 알고 주공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공께서 그를 등용하시면 그는 마당히 주공을 위해 활로 천하를 쏠 것입니다. 주공은 그까짓 갈고리(鉤)쏜 것만을 논하려 하십니까.”

제환공이 그제야 머리를 끄덕인다.

“과인은 그대말을 잠시 듣기로 하겠소. 관중을 죽이지 말고 그냥 두어두오.”

그후 제환공은 모든 신하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서 벼슬과 토지를 제수했다. 제 환공이 분부한다.

“포숙아는 상경(上卿)이 되어 앞으로 나라정사를 도맡아 보오.”

포숙아가 사양한다.

“ 주공께서 신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실진댄 신으로 하여금 헐벗고 배고프지 않게만 해 주시면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나라정사를 다스리는 데는 신이 그 적임자가 아닙니다.”

제환공이 머리를 흔들며 분부한다.

“과인은 경을 안다. 경은 사양마오”

포숙아가 차근차근 대답한다.

“주공께서는 신을 아신다지만 신은 매사에 삼가고 조심하는 것 뿐입니다. 그저 예에 따라 법을 지키는데 불과합니다. 이는 누구나 신하된 자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일이니 어찌 국가를 다스릴만한 인재라 하겠습니까? 대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자는, 안으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밖으론 사이(四夷)를 무마하고 , 공훈을 주왕실에 세우고, 모든나라제후에게 덕을 펴고, 국가를 태산처럼 튼튼하게 하고, 주공에게 한량없는 복을 누리게 하고, 공을 금석에 드리우고 이름을 천추에 드날리는 자라야만 비로소 천자의 신하라 하겠으며, 왕을 돕는 소임자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같은 신하로서 어찌 이 대임을 감당하겠습니까?”

이말을 듣자 제 환공은 자기도 모르는 중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포숙아에게 몸을 숙이며 묻는다.

“경이 지금 말한 그런 인재가 오늘날 세상에 있소?”

포숙아가 아뢴다.

“주공께서 그런인재를 구하지 않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꼭 그런사람을 구하신다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한 인재는 딴 곳에 있지 않고 바로 관이오가 그런 인물입니다. 이 말을 믿지 않으시면 신이 일일이 그 이유를 들겠습니다. 그 하나는 너그럽고 부드러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그만 못하며, 둘째는 국가를 다스리되 그 근본을 잃지 않는 것이 그만 못하며, 셋째는 충성과 믿음으로써 백성과 단결 할 수 있는 것이 그만 못하며 넷째는 예의(禮義) 제정(制定)하여 사방에 펴는 것이 그만 못하며 다섯째는 포고(砲鼓)를 잡고 군문(軍門)에 서서 군사로 하여금 싸우게 하며 물러서지 않게 하는 것이 그만 못합니다.”

제환공이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경은 곧 그를 불러 오라. 과인이 직접 그의 식견을 시험해 보겠소.”

그러나 포숙아가 일어나지 않는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천한 몸으론 능히 귀(貴)에 나갈 수 없으며 가난한 자는 부자를 부릴 수 없으며, 소원(疎遠)하면 능히 부모도 간 할 수 없다 하더이다. 그러니 주공께서 관이오를 등용하시려면 재상의 직위를 내리시고, 그 국록을 높이시고, 부형에 대한 예로써 영접하십시오. 대저 재상이란 것은 임금의 다음가는 자리라, 이런일을 가벼히 하여 서로 가벼히 대하면 임금도 또한 가벼워 지나니, 대저 비상한 사람에RPS 반드시 비상한 예로써 대우해야 합니다. 그러니 주공은 우선 택일부터 하시고 교외까지 나가서 그를 영접하십시오. 이리하여 주공께서 비록 원수일지라도 어진사람이면 존경하고, 높은 선비면 예의로써 대한다는 소문이 사방에 널리 퍼지면, 천하에 뜻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우리제나라에 등용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마침내 제환공이 대답한다.

“ 과인은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하겠소”

 

사관(史官)이 시로써 제 환공의 이 일을 지칭하여 읊은 것이 있다.

 

爭賀君侯得相臣

誰知卽是檻車囚

只因此日損私忿

四海欣然號覇君

 

제환공이 명상을 얻었음을 하례함이요

알고보니 그가 잡혀온 죄수일 줄이야

이제 죄수에게 지난 사사로운 분노를 버렸으니

만민이 흔쾌히 천하통치자라 일컬었도다.(김찬수 의역)

 

제 환공은 길일을 택하여 관중을 맞았고 관중은 제환공에 지난 일을 사죄하였다. 군신은 나란히 수레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제환공이 묻는다.

“우리나라는 천승지국(千乘之國)이오. 지난 날 희공(俙公)께서 여러나라 제후에게 위엄을 떨쳤기에 겨우 소패(小覇)의 업적을 남기셨소. 그러나 요전 양공(襄公)때부터 정사(政事)에 질서를 잃더니 마침내 큰 변이 일어나고야 말았소. 이번에 과인이 사직을 맡았으니 인심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나라위세 또한 말이 아니오. 앞으로 나라정사를 다스리고 기강을 바로 잡으려면 장차 뭣을 먼저 해야 하겠소?”

관이오가 아뢴다.

“예(禮) 의(義) 염(廉) 치(恥)는 국가의 네가지 근본입니다. 이 네가지 근본이 뚜렷하지 못하면 나라는 망합니다. 오늘날 주공께서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자 하실진댄 반드시 이 네가지 근본부터 펴고 백성을 부리면 기강은 저절로 서고 국가위세는 저절로 떨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능히 백성을 부릴 수 있소?”

“백성을 부리고자 할진댄 반드시 백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연후에 백성의 처할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백성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국가는 공사(公事)를 위해서 힘쓰고 가장(家長)은 가족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항상 백성과 함께 서로 손을 잡고 일하며 그 이익을 나눠주면 백성과 서로 친할 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이미 지나간 죄를 용서해 주고 옛 법(宗)을 닦게 하고 자손이 없거나 혼자사는 사람에겐 적극 부부의 짝을 짓도록 주선해 주면 백성은 그 수가 늘게 되고 형벌은 줄고 세금을 감소되고 백성은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 어진 선비를 등용하여 대신을 삼고 그들로 하여금 국가의 잘못을 바로잡도록 그들에게 책임을 맏기면 자연 백성들도 예의를 배우게 됩니다. 또 일단 선포한 법령은 경솔히 고치지 않아야만 백성은 모리(謀利) 협잡질을 않고 정직한 사람이 됩니다. 이상 말한 것이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사랑할 줄 알면 백성의 처한 길을 열어 줘야 한다 하니 그것은 무슨 뜻이오?”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을 사민(四民)이라 합니다. 각기 자신들의 업에 주력하게 하고 항상 익히고 안정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재용은 충분할지라도 군사가 많지 못해서 위세를 떨칠 수 없을 땐 어찌하오?”

“원래 군사란 것은 정예(精銳)한 것을 중시할 뿐 수효많은 것을 목적하진 않습니다. 군사는 힘보다 마음이 강해야 합니다. 만일 주공께서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준비하시면 천하 모든 제후도 다 rnsa사를 기르고 무기를 준비 하리니 신이 그렇게 해서 승리하는 예를 보지 못했습니다. 주공께서 만일 군사를 강하게 하고자 하실진댄 우선 명목(名目)을 숨기고 그 실속을 튼튼히 하십시오.”

제환공이 오로지 관이오를 재상으로 삼아 전권을 주려하니 관이오가 사양하므로 그 연유를 물었다.

“ 신이 듣건대 크나큰 집을 지으려면 한나무의 재목으론 안된다고 하더이다. 그것은 마치 큰 바다도 한 줄기의 흐름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주공께서 꼭 그 뜻을 성취하고자 하실진댄 동시에 다섯 인걸을 등용하십시오.”

“다섯 인걸이라니 그 누구요?”

“모든 진퇴주선(進退周旋)하는 예의와 언변판단의 강유(剛柔)는 신이 습붕(隰朋)만 못합니다. 청컨대 습붕을 대사행(大司行)으로 삼으십시오. 또 초목을 개간하고 토지를 개척하고 많은 곡식을 거두어 땅의 이익을 완수하는 것은 신이 영월(寧越)만 못합니다. 청컨대 영월을 대사전(大司田)으로 삼으십시오. 또 넓은 평원을 나아가되 수레를 서로 빗글어 매지 않아도 군사들이 물러서지 않고, 북소리에 삼군(三軍)이 죽음을 두려워 않도록 하는 데엔 신이 왕자 성부(成父)만 못합니다. 청컨대 왕자 성부를 대사마(大司馬)로 삼으십시오. 또 옥사를 판결하되 중용을 잃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죄 없는 자를 모함하지 않는 것은 신이 빈수무(賓須無)만 못합니다. 청컨대 빈수무를 대사리(大司理)로 삼으십시오. 또 임금의 비위를 거슬리면서 까지 간하되 충성으로써 하며, 죽음을 피하지 않고 부귀로도 그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은 신이 동곽아(東廓牙)만 못합니다. 청컨대 동곽아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으십시오. 주공께서 만일 국가를 다스리고 병력을 굳게 하시려면 이 다섯사람이 잇을 뿐입니다. 그러고도 주공께서 다시 패업(覇業)을 원하신다면 신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굳이 군명(君命)에 의하여 구구한 힘을 다하겠습니다.”

제환공은 관이오를 재상에 임명하고 물었다.

“ 과인은 불행하게도 사냥과 여자를 좋아하오. 장차 패업을 성위하는데 해롭지 않겠소?”

관이오가 대답한다.

“ 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던 것이 해롭소?”

“어진 사람을 쓰지 않으면 천하를 제패하는데 해로우며, 어진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으면 천하를 제패하는데 해로우며, 어진 사람을 쓰되 신임하지 않으면 천하를 제패하는데 해로우며, 어진사람을 신임하면서도 소인을 참석시키면 천하를 제패하는데 해롭습니다.”

제 환공이 이 말을 듣고 옷깃을 여미며 감탄한다.

“좋도다 그 말씀이여!”

제환공은 관이오를 존경하는 듯에서 그를 중부(仲父)라 부르게 하여 그로부터 후세인은 관이오(管夷吾)를 관중(管仲)이라 호칭하게 되었다.

제환공은 관중의 진언을 듣고 제나라를 크게 다스리고 천하를 호령하였다. 당시 나약한 주왕실을 받들어 위상을 다시 높이고 그 명분으로 천하 제후를 굴복시키며 춘추 오패중 명실상부하는 가장 으뜸의 패자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 관중이 노쇠하여 병으로 눕게 되었다. 제환공은 직접 관중의 집을 찾아가 문병하며 물었다. “중부의 병이 이렇듯 심한 줄은 몰랐오. 중부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과인은 장차 이나라 정사를 누구에게 맏겨야 겠소?”

관중이 길이 탄식한다.

“아깝고 아까운 것은 영척입니다.”

“죽은 영척만한 인물도 지금 없단 말이오? 포숙아에게 정치를 맏기면 어덯겠소?”

“ 포숙아는 군자(君子)이기 때문에 정치를 못합니다. 그는 선악(善惡)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분명합니다. 물론 선을 좋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탈은 그가 그만큼 악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포숙아 밑에서 누가 견뎌낼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포숙아는 그사람을 평생 미워합니다. 이것이 포숙아가 정치를 할 수 없는 결점입니다.”

제환공이 초조히 묻는다.

“그럼 습붕(隰朋)은 어떻소?”

“습붕이면 무던 하리이다. 습붕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그럽게 생각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에도 공사(公事)를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늘이 습붕을 세상에 보내어 신의 혀 같은 노릇을 하게 했습니다. 이제 신이 죽으면 어찌 혀만 홀로 남아서 살 수 있겠습니까. 주공은 나라일을 습붕에게 맏길지라도 오래 부리지는 못하시리이다.”

“그럼 역아(易牙)에게 맏기면 어떻겠소?”

관중이 손을 휘저으며 대답한다.

“주공은 더 묻지 마소서 신이 다 말하겠습니다. 저 역아(易牙) 수초(竪貂) 개방(開方) 세 사람을 가까이 마소서.”

“지난 날 내가 구미를 잃었을 때 역아는 제 자식을 삶아서 나를 먹인 사람이오. 그는 자기 자식보다도 과인을 사랑한 사람인데 그래도 의심해야 겠소?”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거늘 그는 제 자식을 죽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임금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수초는 처음부터 과인을 섬긴 사람인데 나는 그가 자기 몸 보다도 과인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래도 그를 의심해야 겠소?”

“사람은 자기 몸보다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거는 그는 자기몸을 천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임금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위나라 공자(公子) 개방은 태자의 몸으로써 천승의 나라까지 버리고 과인에게 와서 신하로 있는 사람이오. 그는 과인 밑에 있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영광으로 생각하오. 그러기에 그는 부모가 죽어도 본국에 돌아가질 않았소. 그가 친 부모보다도 과인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오.”

“사람은 자기 부모보다 더 친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거는 그는 자기 부모에게 불호하엿습니다. 그런 사람이 임금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천승(千乘)의 임금이 되고 싶다는 것은 욕심중에서도 큰 욕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임금이 될 수 있는 나라를 버리고 주공 밑에 와 잇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천승보다 더 큰 것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공은 반드시 그를 멀리하고 가까이 마소서. 가까이 하면 반드시 이나라가 어지러울 것입니다.”

“이상 말한 세 사람은 과인을 섬긴지 오래 되었는데 중부는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말도 않다가 이제야 그런 말을 하오”

관중이 대답한다.

“신이 지금까지 말하지 아니한 것은 주공의 뜻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비유컨대 물과 같습니다. 신은 그 흐르는 물에 둑이 되어 넘치지 않게 한 것 뿐입니다. 이제 그 둑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장차 물이 넘치는 재앙이 없도록 주공은 그들을 멀리 하소서.”

제환공에게 관중이 한 말을 두고 간신 역아가 포숙아에게 쪼르르 가서 고자질을 하며 말했다.

“중부가 이 나라 승상이 된 것은 누구의 덕입니까? 이번에 관중이 습붕을 재상으로 추천하고 포숙아 대감을 추천하지 않았는데 이는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같은 사람도 매우 분합니다.”

포숙아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대 말과 같도다. 관중을 승상으로 추천한 것은 바로 나다. 그러나 관중은 나라에 대한 충성만 있을 뿐, 친구나 자기 개인을 위해서 나라 일을 잘못 판단 한 사람이 아니오. 만일 관중이 나에게 사구(司寇)벼슬 만 시켰더라면 내가 벌써 이나라 간신(奸臣)들을 다 내 쫓아 버렸을 것이오. 당신 뜻엔 어더 하오? 나도 이걸 생각하면 참 분하구료.”

역아는 포숙아의 말에 얼굴이 따끈했다.

하루걸러 제 환공은 관중의 집으로 갔다. 이미 병상의 관중은 말을 못하엿다. 포숙아와 습붕은 관중의 손을 잡고 눈물만 흘렸다. 이날 밤에 관중은 세상을 떠났다.

그뒤 관중의 유언대로 제환공은 습붕에게 국사를 맡겼다. 그러나 습붕은 국사를 맡은 지 한 달도 못되어 세상을 떠났다.

제 환공이 길이 탄식했다.

“중부는 성인(聖人)이었던가. 습붕이 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을 어찌 알았던고!”

제환공은 포숙아를 기용해서 다시 나라 일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포숙아는 굳이 사양을 했다. 제환공이 간곡히 부탁한다. 이제 조정에 경만한 사람이 없거는 그렇다면 경은 누구를 천거 할 생각이오?“

포숙아가 대답한다.

“신이 지나치게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 한다는 것은 주공께서도 잘 아시는 바입니다. 청컨대 주공께서 역아, 수초, 개방등을 멀리 하시겠다면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중부도 전에 그런 말을 하였소. 과인이 어찌 경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날로 제환공이 역아, 수초, 개방 세 간신을 밖으로 내 쫓고 다시 궁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포숙아에게 제나라 정사를 맡겼다.

세월이 지나면서 연로한 제 환공은 공사 분별력이 점점 없어졌고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측근에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 신하가 없으니 그는 하루 종일 한갓 등신처럼 궁궐에 머물렀으니 즐거움이 없었다. 제환공은 호랑이 같은 포숙아 몰래 역아, 수초, 개방등 세 간신을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일시적 즐거움을 누렸으나 드디어 간교한 그들의 말에 휘둘리기에 이르러 나라정사에 기강이 없게 되었다. 포숙은 제환공이 이렇게 자기를 속인 사실을 알게 된 뒤 울분을 못이기어 반년도 채 못되어 드디어 그도 득병하여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로부터 제환공은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실정등 자식들의 자리 다툼에 휘말려 점점 판단이 흐려 졌고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나라기강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간신들의 계략으로 궁궐안에 깊숙히 숨겨져서 따돌림을 받다가 영웅답게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불쌍하게 세상을 떠났다. 춘추 오패의 으뜸 제나라 환공의 현란한 위상, 통치 마지막은 관중을 잃은 뒤 통치방식의 중심을 잃고 충신들을 멀리하다가 결국 혼란스런 사회상을 유발하여 중국천하를 호령하던 제후의 패권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통치자를 둘러싼 참모들의 역할이 국가흥망에 멀마나 중요 한 위치인가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역사적 사례와 가르침이 후세인들을 준엄하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화곡 김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