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문화19호

기행문 - 형제의 나라 터키 문화탐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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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39회 작성일 2008-04-0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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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문화원장 양동창

한국문화원연합회 강원도지회가 주관한 문화원장 해외탐방에 참여하여 터키를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터키하면 귀에 익숙한 나라이지만 깊이 아는 것은 없고 6.25전쟁당시 유엔군으로 우리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행정국가로 연을 맺고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된 사실과 이스탄불, 앙카라의 도시 이름이 떠오를 뿐이다.
그러나 막상 터키를 방문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큰 나라이고 자연환경도 잘 보존된 나라이며 역사적으로 찬란한 문화를 간직한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춘 나라였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으며 지역문화 창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이번 해외탐방 기간 동안 보고 느낀점을 정리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2007년 5월 6일 토요일 춘천의 조우 모텔에서 숙박하고 5월 7일 일요일 아침 07:10에 관광버스로 출발하여 10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강릉, 동해문화원장과 조우하여 14개시도 문화원장과 화천부원장, 홍천 권영택 이사 가족 6명 등 총 22명이 탑승 수속을 밟고 이스탄불행 터키항공으로 13:30. 터키로 출발하였다. 15:40 기내식을 먹고 어디쯤인지 살펴보니 만년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우즈베키스탄 상공이 아닌가했다. 18:45. 카자흐스탄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터키 항공기는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중국의 베이징, 몽고리아-카자흐스탄,  흑해를 거쳐 0시 50분 여객기는 착륙을 위하여 선회하고 있었는데 흑해와 이스탄불 상공은 구름 낀 흐린 날씨이고 둥글둥글한 항구의 백사장이 보이고, 산림은 울창한 것 같지 않고 비포장 임도가 눈에 띈다.
비닐하우스가 보이고, 시가지, 아파트, 취락지가 드문드문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개발도상국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다. 6.25당시 우리나라보다 소득이 높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우리나라보다 소득이 낮다. 우리는 6.25후 크게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이스탄불의 아라트리스공항에 도착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현지 소형 버스편으로 첫 유적지 탐방에 나섰다. 처음으로 들른 곳은 히포드럼이다.
히포드럼은 술탄 아르메르 사원 바로 앞에 있는 광장으로 로마시대 대 경기장유적이다. 이곳에서 마차경주가 열리기 시작한 때는 서기 203년 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는 세계의 각 지역에서 가져온 기둥, 조각상, 오벨리스크(기념비)등이 이곳에서 전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에서 만들었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높이가 26.5m), 479년 델포이의 그리스 아폴론 신전에서 들여온 뱀머리의 오벨리스크(3마리의 청동 뱀기둥 - 뱀머리가 없어짐), 940년 콘스탄티누스 7세가 복원한 콘스탄티누플 오벨리스크이다. 히포드럼은 U자형의 전차경기장으로 트랙이 500m이다. 1616년에 관중석을 없앴다고 한다. 이곳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반란군중집회, 반역자 학살이 자행되었던 곳이기도 하고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고도 한다.
2007년 5월 8일 화요일 오늘은 우리나라의 어버이날이다. 터키최대의 도시 이스탄불의 옛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이고 그리스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하는데 이스탄불에서 유명한 술탄 아흐메트 사원은 술탄(왕) 아르메르 궁전이고, 블루모스크 사원이라고 하는데 신발을 벗어 들고 들어갔다.
술탄아흐메트 광장은 굉장히 넓고 잘 조성된 평온한 광장으로 여행객과 시민들의 휴식지로 사랑받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이스탄불관광의 중심지이며 여행객들이 수 미터를 줄을 서서 입장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으며 술탄아흐메트 1세가 1616년 세웠던 이슬람교 사원이다. 푸른빛이 든다고 하여 푸른 사원이라고도 하며 알라신(하나님)에게 기도하던 곳이고 터키의 문화유산이며 메카의 방향(사우디아라비아)으로 지었으며 오스만공법이라고 하지만 큰 돔, 작은 돔, 큰 기둥 4개가 있다.
내부의 벽과 기둥이 푸른색 바탕의 타일로 장식되었고 독특한 느낌을 주는 문양으로 건물 전체가 연속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터키의 모든 사원은 저마다 색다른 타일 장식으로 꾸며져 있지만 이곳은 특히 유명해서 ‘블루모스크(Blue Mosque)’라는 애칭으로 더욱 친숙하다.
터키의 사원은 둥근 천장의 돔(Dome)과 첨탑(Minaret)이 특징이다. 돔의 200개를 넘는 조그마한 창에는 스탠드글래스가 장식되어 있으며, 스탠드그래스의 아름다운 햇살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돔의 직경은 27.5m이고 높이는 43m나 된다. 바닥에 깔려있는 양탄자도 볼거리다. 가지각색의 빛깔과 무늬가 정성스럽게 짜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블루모스크의 성스러운 초록양타자는 에디오피아의 진상품이라고 한다.
17세기 천하의 강대한 힘을 과시하던 오스만제국의 왕들이 세계 곳곳에서 거둬들인 진기한 보물과 눈부시게 아름다움 헌상품이 있는 톰캄포 궁전을 보고 다음으로 찾은 곳이 그 유명한 성소피아사원이다. 성소피아 사원은 성스러운 지혜(HAGIASOPHIA)라는 뜻이라고 하며 아야소피아(AYASOFYA)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소피아 사원은 톰카프궁전 앞에 있는 적갈색의 건물로 동로마제국시대 그리스 정교의 본산지인 성당이 있다.
그 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점령하여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 이들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정원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그리스 양식의 둥근 기둥은 유스티아누스 1세가 아테네와 에페소스에서 운반해온 것이고 직경 31m의 거대한 돔은 로도스섬에서 만든 것이며 빈 가벼운 벽돌로 만들어 졌다. 황제는 자신의 모든 권위와 신망을 걸고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서 당시로서는 최대급의 건물을 서기 537년에 완공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여 사원 안으로 들어가니 내광에서 본당의 돔을 비롯한 내부수리 공사 중이여서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사원의 내부에는 비잔틴문화를 상징하는 다수의 모자이크 벽화가 남아있는데 대리석판에 문양은 대칭형으로 되어있고 천장의 모자이크벽화는 미스테리로서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 벽화가 휴스티아누스 대제가 화려하게 묘사된 그리스도좌상은 특히 유명하다고 한다. 비잔틴시대의 모자이크 벽화는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터키에 의해 함락되면서 모두 옻칠로 가려지게 되었다. 그리스종교(기독교적인 면)에 첨탑과 미흐라브(Mihrab: 메카의 방향으로 움푹 파인 곳)가 더해져 이슬람교사원으로 변모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의 돔 높이는 56m이고 지름이 36m로서 14층의 규모이고 농부가 대리석 항아리에 금을 가득 담아 왕에게 바치여 땅을 얻었다는 전설에 따라 엄지손가락을 넣으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모두 손을 넣어 보며 소원을 비는 모습이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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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은 여성들의 기도장소로 왕비가 마차를 타고 기도장소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이층은 계단이 없고 마찻길로서 지금의 장애자편의 시설 같았다.
데시스(Deesis)벽화는 성모마리아와 요셉이 예수에게 요구하는 장면과 헨리쿠스단도로(Henricus Dandolo) 무덤이 있었다.
1931년 미국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숨겨진 벽안의 모자이크 벽화가 발견된 후 성소피아사원은 비잔틴 시대의 최대유적으로 또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성소피아 사원을 나와 쇼핑을 위해 인근시내에 있는 재래시장으로 안내되었다. Kapalicarsi(1421) Grand Bajaar 라는 재래시장인데 점원이 모두 남자이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으며 이슬람의 교리에 따라 여성이 통제되고 있어 여성이 사회에 나오지 못하여 점원은 전부 남자가 한다고 한다.
여러 가지 진열된 물건들은 이스탄블시의 특산물이라고 하는데 특색이 뚜렷하지는 않고 선물용으로 사과차 분말을 다섯 통을 샀는데 1통에 25불이고 굉장히 무게가 나갔다. 분위기도 그렇고 돈도 아까워 더 이상 쇼핑을 하지 않았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섯 시간 반에 걸쳐 앙카라로 이동하였다. 앙카라로 가는 도중의 농촌풍경은 아름답고 한가로운 전원풍경이 참으로 이색적이었다. 젖소와 양 때가 한가롭게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었으며 나무와 밭의 색깔로 보아 땅은 아주 메마른 것으로 느껴졌다. 마을의 풍경은 거의 붉은 지붕이 특색이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정겨웠으며 대개가 초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산지는 해발 7~800m라고 한다.
보스보프로스 해협의 칼라티어대교를 건너면 신시가지가 펼쳐지는데 아시아 땅이라고 한다. 보스보프로스 해협의 다리는 현수교로서 1대교 2대교가 있는데 길이는 1,650m나 된다고 한다. 아흐메트에 현대차 조립공장이 보였는데 굉장히 반가웠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해협의 양쪽에는 붉은 지붕의 별장이 많이 있는데 별장의 가격은 약 6억 정도라고 한다.
터키의 현재 GNP는 약 7,000불이라고 하는데 물가는 매우 비싸다고 하며 EU에 가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하는데 주변국들의 이해관계로 찬성 반대가 엇갈려 어려움을 격고 있으나 EU에 가입을 전제로 자동차 번호판도 빈 공간을 두고 있다고 한다. 터키에 거주하는 한인회원 1,400명 정도이고 이스탄불에 약 1,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터키의 사회보장제도 의료혜택, 풍속에 대하여 가이드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교육제도는 초등 5년·중등 3년 초중 8년간 의무교육이고 고등교육은 3년 대학은 2년, 4년, 5년제가 있다고 한다.
옛날 문명의 발상지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에 티그리스, 유프라데스 두강이 흐르고 있다. 오늘하루 일정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Buyuk Anapolu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에서 다시 가이드의 터키에 대한 소개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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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는 한국(남한)의 7.5배로서 약 78만㎢이고, 전체면적의 97%가 아시아이고 3%가 유럽에 속해있다고 한다. 수도는 이스탄불이 아니고 앙카라이고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Repubrec of Turkey)선포 시 수도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인구는 약 7,200만명이며 수도 앙카라에 약 400만명, 이스탄불에 약 2,200만이 살고 있으며 평균 수명은 약 71세로 남자가 69세, 여자가 74세라고 한다.  종교는 99%가 이슬람교이고 1%가 기타종교라고 한다.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한 지중해성 기후로서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지진 외에 자연재해가 없단다. 정치는 의원내각제로서 대통령과 수상이 있으며 위원수는 550명으로 보통선거로 선출된다고 한다. 산업은 주로 농업이 주이고 양목축업이 대부분이고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특산품으로 헤레켓, 카펫, 터키석, 양가죽 등이 있다. 1957년 우리나라와 정식 수교를 하였으며 2007년이 우리와 수교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터키에서는 전통 민속춤인 벨리댄스가 유명하며 고대문명에 근원을 둔 가장 역사가 깊은 춤이며 오스만 터키시대에 술탄(왕) 앞에서 아리따운 여자들이 추던 춤으로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보여지지 않은 왕실만의 춤으로“신비”그 자체의 댄스라 말할 수 있다. 터키에서 밤문화로 정착된 화려한 벨리댄스를 관광 상품화하여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2007년 5월 9일 수요일. 오늘도 아침 일찍 앙카라의 유적탐방에 나섰다. 한국공원으로 가는 도중 곳곳에 주택을 철거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케제콘도(무허가주택)을 철거하여 재정비하려는 국가의 시책이라고 한다. 한국공원에 도착하여 한국참전토이기기념탑에 참배하였다. 한국공원은 1973년 10월 29일 조성되었으며“토이기 공화국 건립제 5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한국정부가 토이기 국민에게 헌납하다.”는 비문과“여기에 한국에서 헌신한 토이기 용사 묘로부터 옮겨온 흙이 담겨있노라.” 하는 문구가 우리를 슬프게 하였으며 한국인이라면 앙카라에 와서 한국공원에 참배하지 않으면 안될줄안다. 우리가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곳에 오면 더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한국전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그것도 지원병으로 파병한 터키 군인들에게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이 생기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앙카라와 서울이 자매결연을 맺게 되었으며 서울엔 앙카라 공원이 앙카라엔 한국공원이 조성되어있다. 한국 땅에서 전사한 721명의 군인들의 이름이 탑주위를 빙둘러 써져있고 군인의 이름, 성, 고향 그리고 생년월일과 사망한 날짜가 적혀져 있는데 대부분 20~22살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음을 알 수 있다. 방명록에 서명하고 다시 한 번 이들의 영령의 명복을 빌었다.
소금호수에 도착하여 잠깐 휴식을 취하였으며 화장실 갈 때는 3명에 1불을 지불하여야 한다고 한다. 어디서나 화장실에 갈 때는 돈을 내야한다.
멀리 해발 3,000m의 핫산 마운틴의 만년설이 보여 이색적이었다. 카파도키아에 도착 동굴식당에서 중식을 하고 우차사르(동굴집), 비둘기집(사암층)등 터키의 그랜드캐년이라고하고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카파토키아를 관광하였다.
카파토키아는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갖가지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드넓은 계곡지대에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이곳에서는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양파모양의 사원들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원뿔을 엎어 놓은 듯한 용암층 바위 속에 이곳 사람들의 오랜 삶의 터전을 볼 수가 있다.
수백만 년 전 활화산이었던 예르지예스산(해발 3,917m)등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인해 형성된 이곳의 지형은 오랜 세월을 거쳐 풍화, 침식작용을 일으켜 부드럽고 쉽게 깎이는 습성을 지닌 용암지대로서 바위를 깎아 만든 이들의 거주 공간은 덥고 건조한 기후를 피할 수 있음과 동시에 데린구유라고 불리는 지하도시와 마찬가지로 쉽게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종교 탄압시기에 기독교인들의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응희암 집의 입구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옮길 수 있는 사다리나 밧줄을 통해 올라갈 수 있게끔 되어있었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형은 이 지역 주민에게 더 없는 편의를 제공하고 좁으면 주변의 돌을 더 파내기만 하면 될 정도이다. 돌로 만든 집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한파로부터 보존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하기 때문이다.
지하도시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버섯집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거주지 외에는 교회와 지성소, 사원들을 만들었다. 오늘까지도 카파도키아에는 600개가 넘는 교회들이 보존되어 있고 이중 최고 오래된 것은 7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이들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회화(벽화)들은 비잔틴예술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유산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
다음은 괴레메(Goreme)야외박물관을 보기 위하여 괴레메 계곡에 도착하여 살펴보니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버섯모양의 집들과 이를 이용한 교회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으로 원래는 수도(修道)생활을 할 목적으로 동굴을 파고 들어가 기도와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으나 점점 규모가 커졌으며 벽화나 여러 가지 상징적인 그림과 무늬가 화려하였다.
암굴 교회라 불리는 이곳의 교회들은 애초의 목적인 수도 외 기도를 위해 출입구와 통풍, 햇볕을 받기위한 작은 창문 정도를 제외하고는 외부에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맨 처음에는 1년 365일을 뜻하는 365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보다 줄어들었고 관광객에게는 약 36개만 개방되고 있다. 이중에 가장 유명한 교회는 괴레메에서 가장 크고 벽에 프레스코 벽화가 가장 잘 보존된“토칼르교회”와 수도원 시설을 비교적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카란륵교회”등 이라고 하며 그 외에도 성 바르바라 교회, 뱀이 있는 교회, 차르클루 교회 등을 둘러보았다.
다음에 찾아간 곳은 파샤바계곡이다. 파샤바계곡의 풍경은 매우 아름답고 기이하였다. 일행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을 찍는 등 기이한 풍경을 하나라도 더 기억하고 간직하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아름답다. 버섯 모양의 바위가 무수히 많은 파샤바계곡의 버섯모양의 바위는 3천만 년 전 에르치예스 및 하싼 화산의 폭발로 용암과 화산재로 덮여 오랜 풍화작용과 침식으로 단단한 부분만 남아 만들어진 기암괴석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괴레메 골짜기 가까이 있는 곳으로 특히 버섯 모양의 거대한 기암괴석은 자연이 만들어 낸 최고의 작품으로 만화영화 주인공 스머프들의 집처럼 생긴 환상에 가까운 모습들이었다.
파샤바 계곡을 뒤로하고 세라믹 체험 장으로 이동하였다. 터키의 특산물인 세라믹의 제작과정과 상품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참으로 찬란한 무늬의 수많고 다양한 도자기는 붉은 흙과 흰 흙으로 빚은 걸작품이었다. 역시 작품의 우수성에 매료되었으나 값이 상당해서 눈이 호사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터키 중부 해발 1,000m 고원지대인 카파도키아(Cappadocia) 지방에 있는 요새도시 우차사르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비둘기 배설물을 모아 연료나 포도나무 밭의 거름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우차사르 바위산에는 많은 비둘기 집이 있어 비둘기 골짜기라고도 하며, 바위산 정상에 거대한 바위를 자연그대로 깎고 잘라 만든 성터가 있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서 실제 동굴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태국에서 유명한 지하도시에 도착했다. 지하도시 데린큐유는 기원전 200년경에도 이 지하도시의 이야기가 거론 될 정도로 역사가 깊은 카파도키아에는 여러 개의 지하도시가 있다고 한다. 마치 개미집을 연상할 수 있는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지하로 들어가면 여러 개의 방과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길을 잃을 수도 있는 미로와 같았다. 네브쉐히르에서 남쪽으로 20km 거리에 있는 가이마크로 지하도시는 지하 8층 깊이까지 굴이 파져있다고 하는데 시간관계상 가보지는 못했지만 지하도시에는 침실과 거실, 부엌, 창고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가축을 기르는 공간까지 마련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가축도 길렀다고 가이드는 설명하였다. 좁고 긴 통로의 한 쪽에는 외부로부터 침입자가 들어왔을 때 공간을 폐쇄할 수 있도록 둥근 원형의 돌 칸막이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 지하도시에서 250년간 2만 여명이 숨어 살았다고 하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암굴이며 식수를 이용할 수 있는 우물이 있고 우물을 통해 육지와 내통하여 기독교인들이 음식물을 공급하고 지하의 오물, 배설물, 사망자시체를 우물을 통해 위로 올려 처리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감쪽같이 처리하여 수백년동안 숨어 살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2007년 5월 10일 날씨는 흐린 것 같았고 아침 6시에 식사를 하고 7시에 가파도키아를 떠나 콘야로 출발하였다. 사방이 지평선인 들판을 달리고 있었으며 앙카라로 올 때도 그랬지만 땅은 매우 척박하게 보였으며 2시간동안 달리는 동안 유목민들이 천막생활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도 옛날 유목생활과 같이 생활하는 유목민이 많다고 한다.
실크로드에 캐라반(KERAVAN) 사라(숙소)가 20~30km 간격으로 대상이 쉴 수 있는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고 한다. 가는 도중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가이드가 터키의 역사는 물론 노아의 방주를 비롯하여 기독교의 창세기 역사와 터키의 종교에 대하여 긴 설명이 있었다.
콘야는 옛날에 이고니온이라 불리었으며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였으며 현재 52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터키의 중요도시 중 하나이다. 지중해로부터 250km 흑해로부터 500km이고 앙카라에서는 남쪽으로 250km가 떨어진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로 해발 1,000m에 달하여 고원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산물은 카펫과 가죽제품 생산이 주이고 광물도 많이 생산하고 있으며 과거 수도로 지정 될 시기에 크게 번성하였으며,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많았는데 지금 남아있는 역사적인 유물들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메볼라나 박물관과 마나레 신학교는 그 중 가장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콘야는 몇 년 전만해도 보수적인 메블라나교의 영향으로 여자들은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스카프를 써야 했는데 현재는 스카프를 쓰지 않은 관광객이 거리를 활보할 정도로 개방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노천 온천으로 유명한 파묵깔레의 희에라 폴리스 유적을 탐방하였다. 파묵깔레는 석회층으로 형성된 환상적인 경관이 아름답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진 석회층은 그 광활함에서 놀라고 크림색의 종유석과 같은 신기한 모습도 볼만하다. 멀리서 석회층을 바라보면 솜을 뭉쳐놓은 듯 보인다. 그래서 “파묵깔레”라는 지명이 터키어로“목면의 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노천온천은 수 천년동안 깊은 지하수에서 미네랄 위터를 쏟아내고 있다. 이 지하 온천수들이 쏟아져 나와 거대한 원형의 욕탕을 형성하였고 희고 풍부한 미네랄 내용물들이 석회질 바위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예로부터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졌으며 근처에 순례 객들을 위한 극장, 수로, 원형극장, 목욕탕, 시장 등의 히에라 폴리스(도시)가 세워졌다고 하는데 그 유적이 훼손된 채 보존되고 있었는데 잡초가 우거진 사이에 화초 양귀비꽃이 붉게 피어있었다.
이곳 온천수의 온도는 42~56℃정도이며 알카리성이고 철분성분이 많다고 한다. 심장질환이나 소화기장애, 신경통 등에 효능이 좋다고 하여 로마시대 황제들까지 요양을 왔을 정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노천온천이 금지되고 족욕만이 가능하여 우리일행은 신발을 벗고 맑고 깨끗한 온천수에서 피로를 풀었다.
2007년 5월 11일 금요일
전날 히에라(HIERAPLIS)폴리스 온천장에서 숙박을 하였다. 아침06:00 기상하여  07:00부터 식사를 하고 08:00시에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는 것이 터키 탐방기간 동안 이동거리가 멀기 때문에 생활화된 일정이었다. 오늘도 08:00 파묵깔레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 병마을을 지났는데 가이드의 병마을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딸이 있는 집에서 딸이 혼기가 되면 굴뚝에 병을 올려놓는다고 한다. 총각이 굴뚝에 올려놓은 병을 깨면 혼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결혼식 풍속도 우리와 달리 낮에는 마을에서 저녁에는 호텔에서 주로 결혼식을 하는데 축의금을 따로 받는 것이 아니라 피로연장에서 하객들이 신랑이나 신부의 가슴에 돈을 핀으로 달아 주거나 반지, 팔지나 목걸이 또는 시계를 채워주거나 돈 봉투를 신랑의 안주머니에 넣어준다고 한다. 이렇게 돈이나 귀금속을 선물하는 풍습은 터키에서나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전통결혼식이 아닐 수 없다.
터키는 올리브나무를 많이 재배하고 있어 산야 곳곳이 올리브 농장이었다. 올리브에서 생산되는 올리브유, 화장품, 비누가 유명하다. 선물용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구입하는 품목의 하나이다. 특히 올리브, 오텐지 나무의 가로수가 특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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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면적도 넓고 산도 유순하여 골프장이 많이 있을 줄 알았는데 왜 골프장이 없느냐고 물으니 터키사람들은 축구를 매우 좋아하고 국기로 삼고 있기 때문에 축구 외 다른 운동경기는 별로 흥미가 없다고 한다. 이을용 선수가 트라브존스에 소속되어 있어 우리나라와 친근감이 각별하다고 한다.
터키에서 유명하다는 가죽제품 쇼핑장을 둘러보고 중식을 마치고 에페스로 출발하였다. 에페스는 BC 7세기~BC 6세기가 최전성기로서 BC 6세기후반부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페르시아 전쟁으로 해방이 된 뒤에는 그 세력을 떨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알랙산르로스 대왕 원정 뒤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경이롭게 부흥하여 수많은 고대 유적이 폐허 속에서 발굴되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셀수수도서관, 목욕탕, 소규모 지붕이 있는 오대온(극장), 2세기 화장실, 시장거리 석조유물들, 원형야외극장, 에페스 교회, 헤라클래스 문(門) 그 중에서 원형극장이 유명하다.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원형으로 되어 있어 어디서나 음향이 고루 들린다고 하여 극장 가운데서서 사진 찍고 박수 치고 소리쳐보기도 했으나 기원전에 축조된 석조 건축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과학적이었다.
2007년 5월 12일 토요일 날씨는 매우 맑았다.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목마를 보기 위해 아이발릭으로 출발하였다.
트로이는 에게해에서 6km정도 떨어져 있으며 강과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위치하여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고 교역도 원활하여 문명이 발달하기 좋은 지역으로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도시는 독일의 백만장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슐리만에 의해 1870년에 발굴을 시작하여 1871년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3년에 걸친 발굴로 엄청난 양의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에 보물상자에는 16,000개의 금붙이로 만든 왕관도 있었는데 이 유물들을 슐리만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일로 가져가 사후에 박물관에 기증하였으나 1945년 독일에 진주한 소련군이 탈취하여 가져가 지금은 러시아에 있다고 한다.
트로이 유적은 트로이 10년 전쟁과 대지진으로 붕괴되고 매몰되었으나 다시 발굴되어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트로이 목마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성에 들어가기 위해 나무로 만든 거대한 속이 빈 말 모양으로 그리스인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철수하는 척하고 근처의 테네도스 섬에 정착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만든 이 말을 트로이를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든 아테네 여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속여 말을 성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러나 그 말 안에 숨어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그날 밤 성문을 열어 그리스군을 들어오게 하여 성을 함락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여온 침입자(요인)에 의해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트로이 목마를 뒤로하고 다시 이스탄불로 가기위하여 다르다넬스해협으로 가는 도중 승용차로 뒤에 쟁기를 달아 밭갈이하는 장면이 보여 매우 신기하였다. 배에 버스도 실고 다르라넬스해협을 건너 갤리볼로라는 어촌도 보고 한국도로로 명명된 도로를 지나 이스탄불에 도착하였다. 저녁식사는 오랜만에 한국관에서 육개장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터키에서의 마지막 밤을 Grand Cevahir 호텔에서 보냈다.
2007년 5월 13일 일요일 아침
터키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위해 지하궁전으로 향하였다. 지하궁전은 왕이 집무하는 궁전이 아니고 물을 저장하여 공급하던 수원지로서 물고기가 자생하며 기둥이 336개나 된다고 한다. 이 기둥들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신전들의 기둥을 주로 모아온 것이라 한다. 이 수원지(저수로)는 532년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로가 140m, 세로가 70m로 8만㎡(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저장소다. 저수지이기보다는 거대한 기둥이 궁전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지하궁전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다음은 전세 유람선(BABA REGIK)으로 포스포러스해협을 유람하였다. 포스포러스해협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해협이며 터키의 최대도시 이스탄블을 두 대륙으로 나누어 놓은 해협이기도 하다. 매우 아름다운 해협이며 양쪽의 건물들이 서로 다른 특성을 보여주고 있어 감명 깊었다. 그리고 거대한 두 대륙을 잇는 큰 다리가 신기하게 느껴지며 다리 위와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낚시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마지막으로 돌마바체궁전을 관람하였다. 돌마바체 궁전은 오스만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궁전으로 해변을 흙으로 메워서 건립한 것으로 “가득한 정원”이란 뜻이라고 한다. 오스만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서구화를 추구하고 국력쇄신을 도모하던 압두메짓 1세가 프랑스의 베르샤이유궁전을 모방하여 초호와판으로 당시의 50만 금화를 쏟아 부어 1856년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대한 건축비지출로 인해 어려웠던 왕실재정을 더욱 악화시켜서 오스만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이 궁전은 술탄(왕)의 성지 순례지이고 빅토리아여왕이 선물한 샹드리에는 무게가 4.5톤에 달하는 호화의 극치이고 750개의 촛대가 장관이며 돔 천장의 입체그림은 프랑스 화가 3명이 그렸다고 한다.
2007년 5월 13일 일요일 터키관광을 마치고 미련과 아쉬움 속에서 우리 일행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오후 3시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아라트리스공항으로 출발하였다.
형제의 나라 터키의 아라트리스공항이 기내에서 내려다보니 아주 작게 보였지만 내 마음속에는 왠지 정겨운 풍경으로 남게 되었고, 추억의 여행 속에 친근한 감정으로 다가오는 우방의 모습으로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