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 없는 고급중학교
1946년 9월에 양양중학교(주108)가 개교되었다. 당시 1학년과 2학년을동시에 모집하였다. 왜냐하면 학제 개편이 있었기 때문인데, 인민학교(국민학교에 해당)를 6년제에서 5년제로 개편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졸업반이 5학년과 6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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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중 스트라이크 사건
인공 때 강현인민학교와 강현중학교가 건물을 반씩 나누어 사용했다. 건물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강현중이 처음 생길 때였다. 1946년 학제 개편 때 1학년과 2학년을 동시에 모집을 했다. 당시 2학년은 40여 명이었고 1학년은 그보다는 상당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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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의 학도호국단
국군이 양양을 수복하고 난 다음 1951년 양양의 학생들 중에서 뜻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당시 단장은 단국대 의대를 다녔던 이창우(당시 20대 후반)였다. 감찰부장 이상훈(강선리출신), 총무부장 조상학(이북 출신), 선전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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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보통학교 데모 사건
1940년대 초 아직 해방이 되기 전 일제강점기 때였다. 양양보통학교 건물을 짓느라 학생들도 근로동원을 시켰다. 학생 들 중에 한두 번 아니한 학생이 없었는데, 2층 건물을 완공하고 난 다음 문제가 벌어졌다. 교실을 배당하는데 아래층을 남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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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과 조카
간곡리는 최씨 집성촌이다. 그렇다 보니 인공 때 인민위원장 등 마을의 여러 자리를 최씨들이 많이 차지하였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최 인민위원장의 큰집 조카가 월남하고자 하였다. 조카는 자기가 키우던 소를 삼촌에게 팔았다. 조카가 월남하려는 것을 눈치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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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 뺏기
일제강점기 때 보통학교에서는 ‘쿠폰 뺏기’라는 것이 있었다. 반마다 일정수량(보통 10개)의 쿠폰을 나누어준다. 그리고는 같이 다니다가 무심코 한국말을 하면 옆에 있던 친구가 이를 지적한다. 그러면 자기가 갖고 있던 쿠폰을 지적한 친구에게 하나를 주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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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가 된 사돈
복골에 살던 K는 대지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땅은 많이 있었다. 해방이 되고 돌아가는 눈치가 영 마땅하지 않아 K는 월남을 결심했다. 당시 K의 사돈이 물치에서 사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K는 사돈에게 월남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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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로 월남을 하는 방법
전진2리와 용호리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분되어 있다. 인공 때 전진2리에는 몇 집 살고 있지도 않았다. 전진2리에 배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살기는 용호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C의 아버지 역시 용호리에 살면서 전진2리에 배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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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과 명태
막 해방이 되었을 때였다. 당시 청곡리에는 소련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나 말을 타고 순찰을 돌았다.
전진리는 포구마을이었다. 마을마다 겨울이면 명태잡이를 하여 집집마다 덕을 만들어 명태를 말리곤 하였다. 밤이 되면 어디선가 말[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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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과 여학생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양양에 소련군이 진주해 왔다. 이들은 민가에 큰 피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불어 여자들에게 장난을 치는 경우도 곧잘 있었다.
양양의 초급여중, 고급여중 학생들이 등교를 할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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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취하다니
1950년 8-9월 용호리의 K는 17살에 인민군을 갔다. 처음에 평안도 양덕으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안변을 지나갔다. 그때 비행기 폭격이 심하여 비행기가 폭격을 할 때마다 인근 과수원으로 숨어들었다. 숨어든 와중에 사과를 못 본 채 할 수 없어 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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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포 사격을 하니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정암1리의 K는 정말로 개죽음을 당하였다. 정암1리는 낙산역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전쟁하기 전부터 이북의 군수물자가 수북히 쌓여 있던 곳이어서 국군이 진격을 할 적에도 정암1리의 낙산역 근처는 폭격의 주요 대상이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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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풍리․적은리의 인민재판
금풍리는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에도 한 집밖에 불타지 않을 정도로 피난처로 유명했는데, 그런데 1․4후퇴 당시에는 피해갈 수 없어서 거의 모든 집들이 불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인공 때의 적은초교
곧이어 이북으로 들어갔던 인민군이 마을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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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리 건국미 사건
인공 때 건국미라 하여 마을마다 창고에 쌓아놓았다. 강선리의 동사 옆 창고에도 건국미가 가득 저장되어 있었다. 건국미라 하여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마을에서 생산된 쌀인 것이다. 국군이 38선을 넘었단 소식에 강선리의 우익청년들은 우리 마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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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의 종소리
낙산사는 일제강점기 때도 학생들이 즐겨 찾는 소풍 코스였지만, 인공 때는 그 발자취가 뜸하였다. 그러나 낙산사의 범종을 치는 소리는 인공 때도 울려 퍼졌다.
L의 아버지는 낙산사의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L은 아버지를 따라 낙산사의 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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