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2009 양양의 6·25 비화 목록
    졸업생 없는 고급중학교 1946년 9월에 양양중학교(주108)가 개교되었다. 당시 1학년과 2학년을동시에 모집하였다. 왜냐하면 학제 개편이 있었기 때문인데, 인민학교(국민학교에 해당)를 6년제에서 5년제로 개편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졸업반이 5학년과 6학년 …
    강현중 스트라이크 사건 인공 때 강현인민학교와 강현중학교가 건물을 반씩 나누어 사용했다. 건물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강현중이 처음 생길 때였다. 1946년 학제 개편 때 1학년과 2학년을 동시에 모집을 했다. 당시 2학년은 40여 명이었고 1학년은 그보다는 상당히 …
    양양의 학도호국단 국군이 양양을 수복하고 난 다음 1951년 양양의 학생들 중에서 뜻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학도호국단을 창설했다. 당시 단장은 단국대 의대를 다녔던 이창우(당시 20대 후반)였다. 감찰부장 이상훈(강선리출신), 총무부장 조상학(이북 출신), 선전부장 …
    양양보통학교 데모 사건 1940년대 초 아직 해방이 되기 전 일제강점기 때였다. 양양보통학교 건물을 짓느라 학생들도 근로동원을 시켰다. 학생 들 중에 한두 번 아니한 학생이 없었는데, 2층 건물을 완공하고 난 다음 문제가 벌어졌다. 교실을 배당하는데 아래층을 남자에게…
    삼촌과 조카 간곡리는 최씨 집성촌이다. 그렇다 보니 인공 때 인민위원장 등 마을의 여러 자리를 최씨들이 많이 차지하였다.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최 인민위원장의 큰집 조카가 월남하고자 하였다. 조카는 자기가 키우던 소를 삼촌에게 팔았다. 조카가 월남하려는 것을 눈치챈…
    쿠폰 뺏기 일제강점기 때 보통학교에서는 ‘쿠폰 뺏기’라는 것이 있었다. 반마다 일정수량(보통 10개)의 쿠폰을 나누어준다. 그리고는 같이 다니다가 무심코 한국말을 하면 옆에 있던 친구가 이를 지적한다. 그러면 자기가 갖고 있던 쿠폰을 지적한 친구에게 하나를 주어야했다…
    원수가 된 사돈 복골에 살던 K는 대지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땅은 많이 있었다. 해방이 되고 돌아가는 눈치가 영 마땅하지 않아 K는 월남을 결심했다. 당시 K의 사돈이 물치에서 사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K는 사돈에게 월남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사…
    배로 월남을 하는 방법 전진2리와 용호리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분되어 있다. 인공 때 전진2리에는 몇 집 살고 있지도 않았다. 전진2리에 배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살기는 용호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C의 아버지 역시 용호리에 살면서 전진2리에 배를 한…
    소련군과 명태 막 해방이 되었을 때였다. 당시 청곡리에는 소련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나 말을 타고 순찰을 돌았다. 전진리는 포구마을이었다. 마을마다 겨울이면 명태잡이를 하여 집집마다 덕을 만들어 명태를 말리곤 하였다. 밤이 되면 어디선가 말[馬] 소리…
    소련군과 여학생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양양에 소련군이 진주해 왔다. 이들은 민가에 큰 피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불어 여자들에게 장난을 치는 경우도 곧잘 있었다. 양양의 초급여중, 고급여중 학생들이 등교를 할 적…
    밥에 취하다니 1950년 8-9월 용호리의 K는 17살에 인민군을 갔다. 처음에 평안도 양덕으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안변을 지나갔다. 그때 비행기 폭격이 심하여 비행기가 폭격을 할 때마다 인근 과수원으로 숨어들었다. 숨어든 와중에 사과를 못 본 채 할 수 없어 한두…
    함포 사격을 하니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정암1리의 K는 정말로 개죽음을 당하였다. 정암1리는 낙산역이 있었던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전쟁하기 전부터 이북의 군수물자가 수북히 쌓여 있던 곳이어서 국군이 진격을 할 적에도 정암1리의 낙산역 근처는 폭격의 주요 대상이었던…
    금풍리․적은리의 인민재판 금풍리는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에도 한 집밖에 불타지 않을 정도로 피난처로 유명했는데, 그런데 1․4후퇴 당시에는 피해갈 수 없어서 거의 모든 집들이 불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인공 때의 적은초교 곧이어 이북으로 들어갔던 인민군이 마을로 들…
    강선리 건국미 사건 인공 때 건국미라 하여 마을마다 창고에 쌓아놓았다. 강선리의 동사 옆 창고에도 건국미가 가득 저장되어 있었다. 건국미라 하여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마을에서 생산된 쌀인 것이다. 국군이 38선을 넘었단 소식에 강선리의 우익청년들은 우리 마을의…
    낙산사의 종소리 낙산사는 일제강점기 때도 학생들이 즐겨 찾는 소풍 코스였지만, 인공 때는 그 발자취가 뜸하였다. 그러나 낙산사의 범종을 치는 소리는 인공 때도 울려 퍼졌다. L의 아버지는 낙산사의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L은 아버지를 따라 낙산사의 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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