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2009 양양의 6·25 비화 목록
    재산이 될 소와 재산이 되지 못할 소 권오탁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에 6․25가 터져 경황이 없었다. 그래도 소를 끌고 강릉 자루매[병산]란 곳으로 피난을 갔다. 그 곳에 큰 누나가 시집을 가 있었다. 그래서 사돈집에서 같이 한동안 살았었는데, 당시 자루매란 곳이 …
    의용군에서 도망치는 방법 고제설은 6․25 당시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주문진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있었다. 수술을 받고 집에 돌아오니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피난을 가라고 난리였다. 그러나 수술을 받고 막 퇴원한 허약한 상태라 어디로든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겨…
    이북으로 가는 피난 패잔병은 현남면 사람들이 9․28수복 이후의 뒤에 처져 있던 인민군을 부르는 명칭이다. 그런데 이 패잔병으로 말미암아 주민들은 이상하게도 이북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아군이 38선을 넘어 진격을 하면서 뒤에 남겨진 패잔병들이 모…
    가재선 북한의 배를 가재선이라 불렀다. 정식명칭은 모르지만 워낙에 빨리지나가면서 하얀 포말을 만들기에 마치 가재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크기는 일반 보트보다는 조금 컸는데 이 배로 북한의 실탄과 식량 등 군수물자를 보급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6․25가 터지고 얼…
    자기 집을 태우다 장현수는 6․25가 날 당시 남애1리에 살았다. 장현수의 집은 농사도 하고 어업도 하였는데, 당시 모심기를 한창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작은 오징어가 한창이어서 오징어를 잡아 50꼭지를 말려놓고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포탄이 남애 지…
    피난은 바다로 수복이 되어 고향집으로 돌아 온 것은 좋았지만 군인들이 북진을하고 난 다음, 인민군 패잔병들이 그 뒤에서 북진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북진하는 과정에 인민군 패잔병들을 모두 소탕하지 않은 채 북진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그런데 인민군 패잔병들이 북…
    술쌀과 밥쌀 동짓달 겨울에, 이른바 1․4후퇴 때 아군을 따라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니 어디로 갈 데가 없었다. 왜냐하면 피난을 가는 와중에 모든 집들이 불에 탔기 때문이었다. 당시 장현수의 집은 200여 평의 널찍한 집이었는데, 집은 불탔어도 주위에 둘러놓은 울타리는…
    명태 덕장의 덕나무 최성용은 6․25가 터질 당시 남애2리에 살았다. 최성용의 아버지는 명태를 말려 북어를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6․25가 나기 전에는 명태를 말려 북어로 만들어 한 두름에 20마리씩 싸리나무로 엮어 30 두름씩 만들어 충청도로 보낼 정도로 사…
    피난할 겸 모를 심자 박창호는 6․25가 터질 무렵에 14살이었고 인구1리에 살고 있었다. 6․25가 터지기 전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비가 오지 않아 모를 심지 못해 걱정이었던 부모님은 늦게나마 오는 비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새벽녘…
    5중대 털보 중대장 6․25가 터지기 전에 동해안을 사수하고 있던 군대는 8사단 10연대였다. 연대 사무실은 강릉 화부산에 있었는데, 현남면, 현북면에서 주로 활동하던 부대는 10연대 소속으로 흔히 5중대, 6중대로 알려진 두 개 중대였다. 그 중 5중대 중대장 털보…
    안질 때문에 홍현국은 인구2리 토박이로 지금까지 이 마을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6․25 때는 할 수 없이 이 마을을 벗어날 뻔한 적이 있었다. 의용군 때문이었다. 6․25가 터지고 인민군이 내려와 처음 인민군의 전황이 좋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
    칼에 31곳 찔린 사나이 6․25가 터진 다음 9․28 수복을 하고 양력으로 11월-12월쯤 되었을 때였다. 아군이 북진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 후방에 인민군 패잔병들이 많았고 더불어 미처 떠나지 못한 지방빨갱이들도 많았다. 연곡면 부연동에 지방빨갱이들이 굴을 파놓고 …
    우익이 여덟 집 반 현남면에서 좌우익의 갈등이 심한 곳을 꼽는다면 입암리 일대가 손꼽힌다. 그런데 좌익이 많은 곳으로는 포매리, 견불리, 상월천리, 하월천리 등이 손꼽히는데, 실제 필자가 답사하기로는 어느 마을이나 좌익이 몇 명은 있었을지라도 많다라는 말은 사용하기는…
    의용군 탈출기 6․25 때 20-30대였던 사람들은 누구나 의용군으로 붙잡혀 가지는 않나 걱정을 하였고 또 실제로도 의용군으로 붙잡혀 갔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견불리의 조철행도 이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조철행이 처음 의용군으로 붙잡혀 갔던 곳은 원산 아래에 있는…
    인민위원회 대회 6․25가 터지고 난 뒤 인민군이 남침하면서 각 읍면마다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최현규는 1950년경 8월에 인구리에서 열렸던 현남면 인민위원회를 구경 간 적이 있었다. 최현규의 삼촌이었던 최용철은 호국군 중대장으로 근무했기에 6․25가 터지자 남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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