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풍리․적은리의 인민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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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풍리는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에도 한 집밖에 불타지 않을 정도로 피난처로 유명했는데, 그런데 1․4후퇴 당시에는 피해갈 수 없어서 거의 모든 집들이 불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인공 때의 적은초교
곧이어 이북으로 들어갔던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와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마을에는 국군이 진격하였을 때 잠시 마을의 이장을 맡아보고 마을의 치안을 유지하였던 한청단원들이 몇몇 남아 있었다. 이들은 설마 무슨 일이 있으랴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무서원들은 이들을 불러내 마을의 인민재판에 회부하였다. 인민재판에 회부된 이들은 당시 마을의 이장을 잠시 했던 김○렬(당시 55세), 한청단장을 맡아보았던 김○옥(당시 60여 세), 자식들이 전부 월남했던 이의○(당시 60여 세), 그리고 피난 갔다가 돌아온 김□렬(당시 55세) 등이었다. 이들은 물푸레나무로 만든 몽둥이찜질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1951년 1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금풍리의 방공굴
김씨 부자가 잠시동안이었지만 모두 리장을 했다. 또 반장을 한 또 다른 김씨가 있었다. 내무서원들은 이들 3인을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역시 물푸레나무로 만든 몽둥이찜질이 이어졌고 리장을 했던 두 부자는 며칠 내에 사망(주110)하였고, 반장을 했던 이는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종무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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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0) 이 두 사람에 관한 것은 본고 〈김남형․김학래의 죽음〉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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