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행정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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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951회 작성일 2010-04-0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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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수복(주78)

1950년 10월 2일을 기하여 양양군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각면에는 면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행정을 실시하였고 치안확보를 위하여 군치안대와 각면치안대를 두었다. 당시 자치대장으로는 김영제 씨를 추대하고 특공대장인 김민하는 동년 11월 22일에 치안대장으로 취임하였고, 치안대원은 국군과 함께 속초 논산리 앞 들판에서 패잔병 소탕작전에 참가하였다.

교육기관은 그 해 10월 10일을 기하여 군내 일제히 개교하였다. 당시 민정관으로는 김진호 씨가 들어왔다. 1950년 11월 5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작전상 후퇴로 인하여 자치행정 불과 3개월 만인 1950년 12월말에 모두 피난하였으나 재북진으로 수복되어 1951년 4월부터 군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정관에 박종승, 치안대장에 김민하로 자치행정을 실시하여 오다가 동년 7월 4일 군정행정법령에 의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됨에 따라 7월 5일 재차 군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군내전반에 행정을 실시하였다.

1952년 8월 10일에 군관하 행정잠정규정을 공포하고 군정 불과 1년여에 민주정치의 기반이 되는 지방자치법에 의하여 각 리․구장 및 각읍․면장 선거를 실시한 연후 군(郡)민정관(군수)으로 박종승 씨를 추천하였고 동년 9월 19일에는 각 읍면에 협의회를 구성하여 협의원을 선출하였다. 동년 8월 13일 군정 하 치안대 잠정규정에 의하여 치안대를 설치하였고, 초대 대장에 김민하 씨가 임명되었으며 치안유지 및 대공사찰활동에 공적이 컸다.

이리하여 군관민은 일치단결하여 철의 장막에서 온갖 고생하던 과거를 상기하며 戰災복구에 일로매진하여 민주정치의 기초를 수립하였으며 군정4년 간에 정치․경제․사회문화 면에서 일진일보의 발전을 가져왔다. 산업시설은 물론 명승고적의 재건(낙산사, 향교, 청간정, 하조대)과 6․25동란 이후의 군민에 대한 구호대책 그리고 9․13수해복구 사업에 실로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그 중에서도 수복지구교육을 위하여 군단에서는 미8군의 지원을 얻어 OACK 및 AFAK원조로 전군에 학교를 신축하고 또 빈 탄약 상자를 각 학교에 배당하여 책걸상을 만들어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 교원단기양성소를 설치하여 수복지구 교육을 양성하였다. 역대 군단장 이형근, 김백일, 백선엽, 김종오 장군의 이러한 선정과 군관민이 일치 단결하여 복구재건에 노력한 그 결정으로 우리 양양군은 모든 면에서 다른 시군에 못지 않은 발전을 가져왔다.

군정 4년 2개월, 그야말로 눈부신 발전 중에 역사적인 1954년 11월 17일(주79) 드디어 행정권이 이양되어 대한민국의 따뜻한 정부의 품에 들었다. 초대군수로 김주혁, 경찰서장에 이현규 경장이 임명되었다. 당시 강원도지사는 최헌길, 초대군수 김주혁은 제3군단장 송효찬 장군으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았다. 이어 제4대 민의원 총선거가 1958년 5월 2일에 실시되어 양양군으로서는 처음으로 이동근을 헌정 단상에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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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8)『양주지』, 양주지 편찬위원회, 1990, 148쪽.

(주79)『한국전쟁(하)』에는 15일로 되어있다. 본고 앞의 〈간략한 연표〉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