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태백산지구 남침공비소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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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44회 작성일 2010-04-0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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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지구 남침공비소탕(주77)

경북 보현산지구에서 우리 국군과 경찰의 포위망에 발이 묶여 섬멸직전에 놓인 김달삼부대를 구출하고자 북괴는 전에 없던 강력한 정예부대 700명을 월남 침투시켰다. 김상호 및 김무현이 각각 반을 맡아 인솔한 이들 극렬분자로만 편성된 소위 인민유격대는 선발대로 김상호가 약 300명을 이끌고 1950년 3월 24일 새벽5시를 기하여 주문진경찰서 관내인 잔교, 대치, 명지, 장리, 서림리 등 38선 경비대가 주축인 우리측 전초진지에 일제히 공격의 포문을 열고 38선 이남 각 고지로 불법 남침하므로 우리측 국군병력이 각 고지에 집결한 틈을 이용하여 정족산, 벽실령을 넘어 오대산맥의 산줄기를 타고 남하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상세하게 분석․검토한 제8사단은 주문진 주둔 1개 대대의 병력을 출동시켜 경찰의 협조 하에 군경합동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아군은 공비들을 노인봉으로부터 청계동 계곡으로 유인하여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공비침투 23일 만인 1950년 4월 17일, 두목 김상호 이하 176명을 사살하고 36명을 생포, 12명의 귀순포로를 잡은 외에 박격포5문, 중기관총3정, 경기관총9정, 기관단총17정, 권총7정, 각종소화기96정, 실탄23000여 발, 수류탄116발, 기타 장비 다수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둠으로써 공비의 만행을 재빨리 봉쇄하였다. 그런데 또 한 명의 공비두목 김무현은 나머지 350명의 무장공비를 이끌고 인제로부터 홍천군 치전동으로 월경하여 방대산을 거쳐 남하하였다.(대공안보지침자료 대공안보총서 426쪽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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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7)『양주지』, 양주지 편찬위원회, 1990, 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