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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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629회 작성일 2010-04-0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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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주35)

1948년 5․10선거의 실시로 정부가 수립되고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가 당선됐다. 그가 귀국하여 조직한 독립촉성국민회가 그의 유일한 세력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한국민주당 당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터라 이승만이 믿을 수 있는 조직세력이란 순수하고 직선적인 청년들 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승만은 전국에 산재한 청년단체들을 한 데로 통합하게 되는데 이것이 대한청년단이다.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결성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수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된다. 총재로 추대를 받은 이승만은 국가의 수호를 위해 청년들은 자기의 직분을 다할 것이며, 국가가 위급할 경우에는 최후까지 몸을 바칠 줄 아는 장부가 되라는 요지의 취임사를 했다. 이 날 채택된 선언 및 강령은 다음과 같다.

〈선언문〉
―. 우리는 총재 이승만 박사의 명령을 절대복종한다.
―. 우리는 피와 열과 힘을 뭉쳐 남북통일을 시급히 완수하여 대한민국의 국위를 천하에 선양하기를 맹세한다.
―. 민족과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도배를 남김없이 말살할 것을 맹세한다.
―. 우호적인 세계청년들과 제휴하여 세계평화 수립에 공헌할 것을 맹세한다.

〈강령〉
―. 우리는 청년이다. 심신을 연마하여 국가의 간성이 되자.
―. 우리는 청년이다. 이북동포와 합심하여 통일을 완성하자.
―. 우리는 청년이다. 파괴분자를 숙청하고 세계평화를 보장하자.

〈대한청년단가〉강필주 작사 / 김성태 작곡
1. 백두산 정기 받은 배달민족의 / 정예를 다시 뽑아 한데 뭉치니 /
   대해와 태산인들 두려울소냐 / 나라의 부름 받은 보람 있는 몸 /
   새벽은 밝아온다 어서야 가자
   (후렴) 찬란하다 조국의 반만년 전통 / 억만년 더욱 빛낼 대한청년단

2. 지축을 뒤흔드는 발굽소리도 / 우렁차다 붉은 피 뛰는 팔다리 /
   세계에 선양하자 정의와 용기 / 3천만 꽃으로 이 한 몸 바쳐 /
   이 땅에 평화의 종을 울리자
   (후렴) 찬란하다 조국의 반만년 전통 / 억만년 더욱 빛낼 대한청년단

3. 동지여 기계 도는 일터로 가세 / 흙내 나는 농촌은 내가 맡음세 /
   앞치마 늠름하게 누이도 가자 / 기름진 넓은 이 땅 푸른 3천리 /
   우리 힘닿는 곳에 건설이 있네
   (후렴) 찬란하다 조국의 반만년 전통 / 억만년 더욱 빛낼 대한청년단

그 후 이범석이 이끌던 민족청년단도 이승만의 강압에 못 이겨 대한청년단에 합류함으로써 대한청년단은 명실공이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청년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단체에는 역전의 노장들이 다수 결집되어 있었고, 반공정신에 불타는 300만 단원을 과시하며 그 위세를 더해갔다. 그러나 대한청년단은 결성된 동기나 초창기의 운항에 있어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대한청년단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조직된 것이면서 영도자인 이승만 자신이 당시의 청년운동이나 간부들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고, 그가 임명한 단장 신성모도 청년운동과는 무관한 해외에서 갓 귀국한 사람으로 이승만이 다만 자신이 믿을 만하다는 이유 하나로 중책을 떠맡게되어 대한청년단은 출발부터 관제단체라는 허울을 쓰고 만다.

그 결과 갖가지 병폐가 드러나는데, 이대통령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리 풍부한 경험과 능력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단체의 요직에 앉을수 없었고 반면 백해무익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권력의 줄만 잘 타면 된다는 말이 공공연할 정도였다.

주지하다시피 대한청년단은 이청천의 대동청년단 세력을 주축으로 구성돼 있었고 주동인물은 이성주, 김윤근, 윤익헌 등인데, 이성주가 치안국 사찰과장으로 옮겨 앉은 뒤 김윤근이 그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터라 민족청년단 계열이 제2대 단장(안호상)으로 들어앉았다는 사실은 기존 주도세력에 크나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안호상이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6․25가 터졌고 김윤근은 대한청년단 단장 겸 청년방위대 사령관직을 맡았다. 청년방위대는 법적 근거도 없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이승만은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청년의 조직체인 대한청년단을 군대화하려는 구상 하에 그 명칭을 청년방위대로 하고 한청 간부들을 보병학교에 넣어 단기훈련을 시킨 후에 향토방위와 아울러 접적전에서의 활용을 도모한 것이다. 그리하여 청년방위대는 형식상 군대식 편성과 직명을 부여받아 반군대식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결국 대한청년단의 별칭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청년방위대의 간부는 대한청년단의 간부가 그대로 맡아보게 되었다.

그 후 이들은 북진 시 서북청년회의 재건문제로 적지 않은 진통을 겪기도 했으나 결국 남과 북의 지역적 대립으로써 민족분열의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에서 대한청년단 북한총단부라는 명칭으로 대공투쟁에 헌신,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정부는 부산으로 이전하기전에 국민들의 피난과 물자이송 등 긴급한 제반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의 일환으로 사전대책을 취하게 된다. 그 가운데 1․4후퇴 15일 전에 국민방위군 설치령을 공포하는데, 이것은 당시 제2국민병 해당자인 만17세에서 40세까지의 장정 약50만 명을 집단적으로 남하시켜 방위군에 편입 훈련하여 적과 맞서 싸울 수 있게끔 하자는 것이었다.

이렇듯 막중한 임무가 대통령의 지시로 대한청년단에 부여되었는데, 안호상의 후임으로 단장이 된 김윤근이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겸하는 한편 윤익헌이 부사령관이 되고, 박경구가 참모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대한청년단은 부사령관인 윤익헌에 의해 이끌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김윤근의 성격이 큰일을 도모하거나 운영하기에는 부족했다는 상황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국민방위군은 수십만의 제2국민병을 인솔․후퇴시키는 한편 온양에 방위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교육하고 각처에 교육대를 설치하여 제2국민병의 훈련에 착수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이들에게 있어 과중한 짐이었다. 교육대에 수용된 수많은 청년들이 헐벗고 굶주려 죽어가는 마당에 사령부의 몇몇 간부들은 나태한 생황에 빠져 있었다. 결국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고 단체가 해산되는데 이어 김윤근, 윤익환 등 간부 5명이 처형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한편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대한청년단을 재수습하기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4월에 들어 안호상을 다시 대한청년단장으로 임명했다. 안호상은 무너진 대한청년단 조직을 재건하고 전투조직을 편성하여 지리산 토벌작전에 협력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즈음하여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이 견제를 받자 민족청년단 계열이었던 안호상도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유지원이 5대 단장으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이미 대한청년단은 4분5열 되고 간부들은 자유당으로 몰려가 정치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53년초 이승만 대통령은 민병대를 창설, 이들을 향토방위에 임하게 했다. 민병대 사령관에 신태영이 임명되어 전국 청년들을 여기에 규합시켰다. 이승만은 드디어 9월 10일 대한청년단의 해산을 선포하고 청년단원들은 민병대에 편입하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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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5) 심재기,『6․25와 민간항쟁』,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기념사업회, 1993 166-171쪽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