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북침설의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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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8,524회 작성일 2010-04-0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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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침설의 내막(주10)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북진 주장은 일부 군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1여단장 김석원은 이승만에게 소총 2만 정만 준다면 북한을 처치하겠다 장담하였으며, 전 참모장 채병덕도 1948년 말 실질적인 행동으로 未회복지를 회복하여 조국강토를 통일하여야 할 것이라 하여 무력통일 의지를 시사하였다. 이것은 군부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표명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북진발언은 소련군 철수 보도 직후인 1949년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승만 정부는 1월부터 미군철수설이 보도된 4월까지 확실한 자신감 속에서 북진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소련군 철수가 곧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라는 인식과 어느정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1949년 3월 이승만은 조병옥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국무장관 에치슨에 군원요청서를 제출하였다. 이승만은 조병옥에게 보낸 편지에 무기를 얻으려는 목적이 제한된 자체방위에 있는 것만은 아니고, 그 무기로 전 한국의 열망을 쫓아 남북통일을 달성하는데 있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었다.

같은 해 9월말 외국기자와의 회견에서 이승만은 남한은 북한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동포들이 남한이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해 줄 것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이 같은 조치는 늦으면 늦을수록 곤란하다고 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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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양영조,『남북한 군사정책과 한국전쟁 1945-1950』, 한국학술정보, 2007, 62-67쪽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