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사법국장 최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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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2,412회 작성일 2010-04-0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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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국장 최용달

인공시절 양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천리 최용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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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좌)와 최용달(우)

최용달은 인공시절 사법국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필자가 38선 양양지역을 답사하면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주민들이 최용달을 적시하였다. 어떤 이는 유진오와 최용달을 비교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유진오는 남한에서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대표적인 법학자였다. 이와 비견될 만한 인물이 최용달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허풍처럼 여겨졌지만, 문헌자료를 조사하는 중에 정말로 대단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진오가 남한 헌법의 기초를 만들었다면, 최용달은 북한 헌법의 기초를 만든 이였다. 이 둘을 비교하여 잘 정리한 자료가 있었다. 이수일이 쓴「유진오와 최용달」(주5)이란 글이었다.(상기 사진은 이 책 118쪽(주6)에서 따왔다.)

다음은 이 글 중에서 최용달과 관련 있는 부분들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유진오(1906-198(주7)를 남한 헌법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법국장으로 초기북한의 법제를 체계화하고 북한 인민헌법 작성에 깊이 관여했던 최용달(1904-1953?)은 북한 헌법의 아버지라 할 것이다.

유진오와 최용달은 1920년대 중반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 식민지조선의 현실을 함께 고민하면서 민족적 자의식을 키워갔고, 졸업 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교수로 같이 근무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유진오는 김성수 그룹의 인맥으로 우익을 대표하는 헌법학자로서, 성대그룹(주7)의 중심인물인 최용달은 박헌영 그룹의 이론진으로 좌익을 대표하는 법학자로서 이후 완전히 엇갈린 정치적 삶을 살았다.

유진오는 1924년 봄 경성제대 제1회 예과생으로 수석 입학하였고, 마르크스주의 연구서클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했다. 미야케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경제연구회는 경성제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양성소 역할을 했으며, 특히 제2회 입학생인 최용달을 위시해 이강국, 박문규는 성대그룹의 중심인물이었다.

본격적인 학술과학운동의 모습은 경제연구회 출신을 주축으로 1931년 9월 조직된 조선사회사정연구소에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는 1933년 무렵 이렇다 할 성과 없이 공산당 재건운동혐의를 받고 일제 관헌에 의해 사무실이 습격당한 후 문을 닫고 말았다. 유진오의 사회운동은 거기까지였다.

법문학부 졸업 후 경성제대 내 연구소 조수로 근무하면서 교수직을 마음에 두었지만, 조선인을 교수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교당국과 일본인 교수들의 처사로 기껏해야 예과 강사 아니면 만년조수가 현실이었다. 이후 유진오는 갈 곳 없는 식민지 지식인의 내적 고뇌를 문학으로 담아내었다. 후일 유진오는 앙드레 지드의 소련비판을 읽으면서 사상에 있어 전향을 하게 된다.

1925년 함흥고보를 졸업한 최용달은 가족과 고향사람들의 기대 속에 경성제대 제2회생으로 입학했다. 1927년 법문학부에 진학한 최용달은 삶의 근본적인 전환기를 맞이한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미야케 교수의 사회주의 강론과 경제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도덕적 계몽주의는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경성의 도시정서에 익숙해져 있던 유진오와는 달리, 최용달은 고향의 안온함과 인간적 정리를 바탕으로 하는 농촌공동체의 회복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했다.

삶과 역사의 옳은 방향을 제시해주는 실천적 세계관으로 최용달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1930년 법문학부 졸업과 동시에 최용달은 경성제대사법연구실 조수로 근무했다. 유진오의 알선으로 보성전문대학 강사가 되었다.

1932년 김성수는 재정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를 천도교로부터 인수하면서 인적, 물적 쇄신을 꾀하게 된다. 이때 경성제대의 강좌연구실 조교로 근무하던 유진오, 최용달, 김광진을 교수로 임명한다.

최용달이 쓴 글 몇 편이 일본법학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사법협회잡지와 법률학연구에 실릴 정도로 최용달의 학문의 깊이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후 일제파시즘이 극으로 치달을 때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의 사상전향 정책에 걸려들어 실천운동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친일로 돌아서던 무렵, 최용달은 이강국, 이주하와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나섰다. 1938년 10월 적색노동조합 원산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큰 고초를 당했다. 1944년 8월에는 이강국, 박문규와 함께 여운형이 비밀리에 조직한 건국동맹과 연계를 맺었다.

8․15 해방을 맞이하면서 유진오와 최용달의 인생행로는 급격히 바뀌기 시작한다. 평양은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이런사정은 서울에서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측에게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쨌든 1945년 10월 9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문제로 박헌영과 김일성이 회동한 후 최용달, 이순근 등 박헌영의 측근인물들이 월북해 북조선분국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북조선분국 5도행정국 사법부 차장,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북한의 법적 기초와 법질서 확립에 이바지했다.

1946년 3월에는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토지개혁법을 작성하고 집행한 최용달은 봉건적 자본주의 수탈체제를 일소하고 인민민주주의 근대화의 기반을 창출한다는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사법국은 법제와 감찰, 사법행정의 세 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당시 김일성 그룹엔 최용달 만한 사회주의 법학자를 찾기가 어려웠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전국적인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그 해 11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제3차 인민회의에서 북조선 임시헌법의 제정을 결정했고, 최용달은 조선법전초안제정위원회 위원으로 참가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법국장 최용달은 북조선 임시헌법이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북조선을 통일의 민주기지로 강화해야 한다는 그의 ‘민주기지론’의 내용은 이렇다.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를 통해 식민지적 착취수단과 독점자본의 착취관계를 근절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으니 이러한 인민의 승리를 헌법적으로 공고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개혁은 고사하고 미군정의 방조 아래 친일파, 민족반역자, 지주, 자본가들이 설치고 다니는 남한의 실태에 비추어 볼때 북조선만이 통일 민주조선의 기지가 된다는 것이다.

한편 최용달은 인민민주주의 개혁의 성공은 두 가지 역사적 조건이 결합되어서 가능했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소련군의 점령이며, 또 하나는 인민위원회의 존재였다. 그에게 있어 소련군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연대의 정의로운 중심이었다.

최용달은 사법기관의 책임자로서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계급투쟁을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였고 동시에 박헌영-남로당 계열의 핵심인물이기도 하였다. 인민정권의 기초가 거의 확립되어 가는 시점에 최용달, 이순근 등 박헌영 계열의 국내파 간부들은 김일성 그룹으로부터 종파분자로 몰려 자아비판을 당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원산지역을 종파분자의 온상으로 지목했는데, 이곳은 이주하가 최용달, 이강국과 연계하여 1930년대 후반 적색노동조합 운동,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했던 지역이었다. 최용달은 박헌영 계열의 핵심인물이었기에 한국전쟁 후 숙청 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최용달의 약력〉(주8)

1904         양양군 양양읍 사천리 출생

1925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1925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학

1926         경제연구회 조직 및 활동

1927         경성제대 법문학부 진학

1930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사법연구실 조수로 일함

1931         조선사회사정연구소 설립

1932         보성전문학교 강사

1933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

1934 1월  미야케 사건으로 기소유예 처분

1936 7월  원산공산주의 그룹의 지도자 이주하를 만남

1937          보성전문학교 교수. 서울에서 이강국, 이주하와 함께 공산주의운동 협의

1938 10월 적색노동조합 원산좌익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

1942           집행유예로 석방됨

1944 8월    이강국, 박문규와 함께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가

1945 8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11인 준비모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정강과 사정방침 작성

       10월    북행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참가, 5도행정국 사법부 차관

1946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장, 북조선로동당 당중앙지도기관 검열위원

1947          북조선중앙선거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인민위원회 사법국장,
                    북조선법전초안작성위원회 위원

1948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임시헌법 초안 제정

1948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1953 3월    종파사건(=박헌영사건)으로 숙청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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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이수일,「유진오와 최용달」,『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역사비평 편집위 편, 역사비 평사, 2008, 111-155쪽 요약.

(주6)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이 붙어 있는데, 1933년 보성전문학교 졸업앨범에 실린 사진이 라고 한다.

(주7) 성대그룹은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에 활동한 경성제대 출신 사회주의 지식인을 가리킨다.
        해방 이후 성대그룹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최용달, 이상국, 박문규, 김태준 등을 들 수 있다.

(주8) 이수일,「유진오와 최용달」,『남과 북을 만든 라이벌』, 역사비평 편집위 편, 역사비평사, 2008,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