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왜 살려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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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54회 작성일 2010-04-0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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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살려주었을까

사천리의 K는 17살이 되자 인민군에 갈 나이가 되었지만, 키가 작아 인민군에도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양양군이 국군에 수복이 되었고, 또 인민군 패잔병이 올라온다고 할 어수선할 때였다. 하루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서 내려오는데 국군이 부르는 것이었다. 바라보니 눈만 제외하고 온 얼굴에 검뎅이칠을 하고 있었다. 군인은 말 했다.

“너희 집이 어디냐? 쌀이 있느냐?”

아마도 묻는 폼이 보급이 달려 보급을 구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수색하더니 쌀 서너 말을 구하더니,

“이 쌀 좀 져다오.”

“어디로 말입니까?”

“우리만 따라오면 돼.”

그렇게 하여 쌀 서너 말을 지고 따라갔더니 기정리였다. 거기에서 군복과 군화를 주더니 갈아입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K는 짐꾼으로 근무를 했다.

K가 소속된 부대는 7사단(?)(주 107) 박격포부대였다. 부대가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 원산까지 따라갔는데, 박격포 부대가 있는 능선까지 포탄통 2개(포탄통 1개에 포탄2개가 들어있다)를 운반하는 것이 K의 할일이었다. 포탄통의 무게는 40kg정도는 넘는 것 같았다. 아침에 포탄통을 짊어지고 산으로 올라갈 때 점심은 어디에서 먹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점심은 포탄을 가져다주고 거기에서 먹으라고 한다. 그러나 포탄통을 짊어지고 올라가 보면 이미 점심시간이 지났거나 설령 식사시간이라 할지라도 짐꾼에게 줄 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점심은 거의굶다시피 했다.

한 달이 지났다. 어느 날, 군인이 짐꾼들을 모아 놓더니 하는 말이

“우리를 따라 갈 사람은 따라가고, 따라가기 싫은 사람은 돌아가도 좋다.“

집 떠난 지 오래된 K는 집에 어린 동생들과 같이 있는 어머니가 걱정스러웠다.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더니 부대장이 사인한 증명서를 만들어 주었다.

“너희들이 돌아가다 보면은 또 다른 국군들이 짐을 지고 가자고 할지 모른다. 그러면 이 증명서를 내보여라. 이만큼 봉사하고 돌아가는 것이니 더는 붙잡지 않을 것이다.”

K는 그 서류를 꼬깃꼬깃해서 허리춤에 감추고 묵호 사람 두 명과 같이 남쪽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패잔병들이 올라올 때였다. 건봉산을 막 지날 때였다. 거기서 인민군 패잔병들을 만났다. 인민군 패잔병들은 주머니 조사를 했다. 주머니에서는 그 서류가 나왔다. 인민군 패잔병들은 이게 뭐냐고 물었다. K와 동료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인민군 패잔병들은 K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른 두 사람과 말씨가 달랐던 모양이었다. K는 양양이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인민군패잔병들이 갑자기 묵호 사람 두 명을 죽이더니 K는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옆에서 죽는 것을 보니 K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어떻게 내려온 지도 모르지만, K는 한걸음에 줄달음쳤고,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K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먼저 흘러내리지만, 가슴 한 켠에 자리잡은 의문을 감출 수 없었다. ‘왜 나만 살려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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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7) 제보자는 7시단이라 하였지만, 당시 7사단은 이 지역에 없었다. 수도사단과 3사단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