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윤석진 월남사건의 진실(주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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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3,248회 작성일 10-04-0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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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진 월남사건의 진실(주94)

윤석진은 1933년 생으로 당시 말곡리 아랫말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인공 때 현북중학교를 들어갔다. 제대로 졸업을 하였다면, 인공시대 현북중학교 1기95)인데, 물론 졸업은 하지 못했다. 사건은 1949년 3월에 벌어졌다.

인공은 사상 문제를 많이 따졌다. 윤석진의 막내 삼촌이 일제강점기에 면사무소에 다녔다. 인공으로 보아서는 윤석진 집안의 성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렇게 낙인이 찍혀 있으니 생활에도 곤란을 받았고, 그것이 어린 윤석진에게도 무엇인가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당연히 인공의 체제가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3월의 어느 날이었다. 야간선전이라 하여 통학반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호를 외치곤 하였다.

그 것을 매일 하여야 하였는데 윤석진을 비롯한 또래의 친구들 몇 명이 하지 않았다. 부모님들도 “그거 거짓말인데 뭐 하러 떠들고 다니느냐?”면서 학생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게 발단이 되어 “너희는 왜 선전을 안 하느냐?” 하고 질책을 받았다. 윤석진을 비롯한 말곡리 학생들은 질책을 받자, ‘에이 모르겠다’하고 아예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갔는데, 이번엔 학교 교장이 문책을 당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니 분명 교직원에게도 책임의 소재를 묻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말곡리 학생들 6명은(당시 모두 3학년) “이북 체제에서는 못 살겠다. 우리 월남을 하자”고 모의하고는 월남을 시도하였다.

말곡리에서는 38선이 가까웠다. 그래서 장리로 월남을 했다. 장리에는 지서가 있었다. 말곡리 학생 중에 장리의 지서에 아는 사람이 있었다. 거기에서 3일-4일 묵다가 주문진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또 3일-4일을 있었는데, 최종에 하는 말이, “너희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학생들이니까 별일 없을 테니 공부열심히 하고, 대신 정부요인들 작성해서 아무 때 되면 넘어 오라.” 이러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이가 어렸으니 뭐 별 탈 있겠는가 싶어 다시 기사문리 쪽으로 해서 38선을 넘어왔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오다가 38선 경계를 서던 인민군에게 발각이 되었다. 곧바로 인민군 중 대본부로 이송되었고 거기에서 일주일을 있다가 양양지구 정치보위부로 넘어갔다. 거기서 보름을 있으면서 조서를 만들더니 끝내 원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재판을 받았는데, 죄명은 이남에서 간첩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에서 간첩죄, 사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반동죄가 적용되었지만, 학생 신분임을 참작하여 4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런데 당시 감옥에 이감된 6명이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월남했던 6명 학생들 중 2명은 성분이 좋다는 이유로 풀려나고, 엉뚱한 2명이 교사죄로 추가되어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사죄로 엉뚱하게 끌려온 2명은 8년형을 언도 받았다.

성분이 좋은 2명은 장원식(16살)과 박용호(18살)였다. 이들은 후에 인민군에 갔었는데 그 후 생사를 알 수 없다.

교사죄로 끌려온 2명은 윤석숭(25-26살)과 윤석규(25-26살)다. 어린 학생들에게 월남하라고 선동하였다 하여 억울하게 붙잡혀 간 것이다.

4년형을 언도 받은 4명은 윤석진(17살)을 비롯하여 윤석빈(17살), 윤석근(18살), 박상진(19살) 등이었다. 박상진(조카)과 박용호(삼촌)는 조카와 삼촌 사이였다. 그런데 박상진의 외삼촌이 장리의 지서에 순경으로 있었다. 그래서 박상진은 성분이 나쁜 사람이었으나, 그의 삼촌인 박용호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여 풀려났다. 당시 박상진과 박용호는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일종의 코미디였다.

원산형무소에 간 6명은 형이 확정된 다음 여기저기로 헤어졌다. 박상진은 아오지 탄광으로 갔는데, 거기서 옥사하였다고 한다. 윤석근과 윤석규는 청진감옥으로 가고, 나머지 3명은 함흥감옥으로 갔다. 함흥감옥에 간 3명은 우연인지 하여튼 같은 감방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감옥생활이란 것은 순전히 감옥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옥에 있으면서도 노역봉사를 하였는데, 윤석진 일행이 일한 곳은 피혁공장이었다.

1950년에 전쟁이 터졌다. 처음에는 알지도 못했는데, 감옥에서도 한국의 지도를 그려놓고 화살표로 오늘은 어디까지 갔다 하는 식으로 교육을 시키는 바람에 비로소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열흘쯤 지났는데, 포 소리가 나고 비행기가 폭격을 하였다. 윤석진 일행은 폭격을 해도 설마 감옥이야 폭격하겠냐고 믿고 살았다. 밤12시가 되면 간수가 죄수1명을 불러내는데, 자동차 엔진 소리가 부릉부릉 나더니 그 후로는 소식이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 불려간 사람은 20년형을 언도받은 사람이었다. 그 후로 19년형, 18년형 등으로 차츰 형량이 낮아지더니 그렇게 불려간 사람들 모두 다시는 돌아오지않았다. 아마도 어느 골짜기에 가서 사형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형무소에는 이제 반동죄목으로 들어온 4년 이하의 죄수와 잡범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잡범 중에서도 3년형 이하의 사람은 인민군대로 다시 뽑아갔다.

전쟁이 길어지자 남은 죄수들을 만주쪽으로 소개시켰다. 10월이었다. 함남과 함북의 경계에 황철령이라고 있다. 죄수들이 황철령이란 고개를 넘을 때였다. 그 고개만 올라서면 마치 대관령처럼 일망무제의 버덩이 펼쳐지는데, 유엔군의 비행기가 막 폭격을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윤석진은 탈출을 할 수 있었다. 이때 윤석진은 윤석빈과 헤어졌는데, 이후 윤석빈의 생사는 알 수가 없었다.윤석빈은 그 후 함흥에 와 있다가 화섬[화도]으로 건너가 숨어 있다가 1․4후퇴를 할 적에 돛배[풍선]을 타고 주문진으로 피난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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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본고 문헌자료 항목에서 〈반공투사 이야기〉로 간략하게 소개된 것이다. 이를 필자가 다시 채록하여 좀 더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95) 오늘날의 현북중학교 1기 졸업과는 다르다. 남한에서는 인공 때의 학력을 인정하지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