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농촌과 어촌은 1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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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849회 작성일 2010-04-0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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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과 어촌은 1촌

6․25가 터지고 북한에서 내려와 소위 백일정치란 것을 할 적에 의용군을 차출했었다.

의용군을 차출하기 위한 회의가 인구리 학교에서 열렸는데 당시 의용군에 해당될 만한 나이의 장정들은 모두 소집을 당하였다. 입암리의 최현규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오라는 데 안 갈 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가서 보니 최현규네 집에서 일하던 머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가면 집의 농사가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연로하셔서 일을 할 형편이 못 되고 집안사람들은 우익이 많아 밤낮으로 도망쳐 다니고 있던 형편이라 이 두 사람만큼은 의용군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최현규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몰라도 “이 두 사람은 의용군으로 갈 수 없다. 대신 내가 가겠다”고 하였그래서 최현규는 의용군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 모인 곳은 주문진 교항리의 솔밭이었다. 이 곳은 비행기도 보이지 않아 아군의 폭격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기에서 인민군의 일장연설을 듣고는 강릉에 있는 경포초등학교로 이동했다. 이곳이 영동지역 의용군 차출된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집결지였다. 여기에서 군가 등 몇 가지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저녁 때 출발해 이북으로 들어가는데 처음 숙박을 한 곳이 댓골[죽리]이었고, 이튿날은 양양의 상촌초교였다.

밤 12시가 넘었는데, 갑자기 본부에서 최현규를 호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몇 가지 물어 보는데, “사회에서 무얼 했나?” 하고 묻기에, 무얼 한 게 있어야지. 하여튼 적당히 대답했더니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저녁에 정치보위부 사람이 와서 어떤 개인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임시로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인 것으로 보였다. 거기에서 또 다시 몇 가지 묻더니, 재우고는 다음날 보위부 직원이 자전거를 갖고 와 그 뒤에 태우더니 양양으로 이동을 했다. 뒤에 타고 보니 보위부 직원의 권총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보위부 직원의 덩치를 보니 만만하게 보였다. ‘이걸 그냥 콱 해치우고 달아나 버려’ 등등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하여튼 끝까지 가보자고 참아내었다.

그 사람은 최현규를 양양 정치보위부 지하실로 데려갔었다. 임시유치소로 보였는데, 거기에서 사흘을 지냈는데 도통 심문도 없으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사이에 월리 사는 사람이 하나 들어와 말동무가 되었다.

밥시간이 되자 어떤 아주머니가 밥을 가져왔는데 밥이 검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아주머니 이게 무슨 밥이오?”

“피밥이요.”

까칠까칠한 게 먹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었다. 최현규는 여기에서 생전 처음으로 피밥을 먹어보았다.

3일 만에 보위부 직원은 현북면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북면 분주소에 들러보라고 했다. 저녁에 내달아 현북면 분주소에 도착해 사정을 말하고 통행증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니, 통행증은 없고 그냥 가라는 것이었다. 어물거리다가는 또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최현규는 부리나케 나와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하여 현남면 인구에 오니 한밤중이었다. 거기에서 ○진태를 만났다. 또 사정을 말하니, 인민위원회 본부에 가자고 하였다.

본부에 갔더니 아는 사람이 있었다. 최현규가 이만저만한 사연을이야기하자 다 듣고는

“그럼 바로 가시지 여기 왜 들어왔냐. 이 양반 빨리 내보내라.”

그러면서 인구의 분주소에 또 들렸다가 가라고 하였다. 들렸더니 부엌에 가서 자라는 것이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거기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마을 입암리 인민위원장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저 놈이 어떻게 나왔지’ 하면서 이상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최현규는 자세한 사정을 말해줄 수 없었다. 자신도 그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농촌과 어촌간에 주객간에 형제와 같은 관계가 형성되어있었다. 어촌에서 고기를 잡으면 농촌으로 찾아와 고기를 건네주면, 농촌에서는 곡식으로 대신 가격을 치러주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농촌과 어촌의 자매결연과 비슷한 것으로 마치 형제처럼 지내는 관계였다. 최현규의 집으로 자주 고기를 갖다주고 곡식을 받아 가는 사람들중에 이태억과 장○○가 있었다. 이 사람들이 현남면 인민위원회 책임자가 되었다. 최현규는 아마도 이들이 자기를 빼내준 것은 아닌가 짐작을 하였지만,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수복이된 후 이들은 월북을 했다.

최현규는 의용군에서 무사히 탈출하였지만 집에 있는 내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밤이 되면은 인근 산 속으로 들어가고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수복이 될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