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양양의 6·25 비화

명태 덕장의 덕나무

페이지 정보

조회 3,882회 작성일 2010-04-06 20:25

본문

 명태 덕장의 덕나무

최성용은 6․25가 터질 당시 남애2리에 살았다. 최성용의 아버지는 명태를 말려 북어를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6․25가 나기 전에는 명태를 말려 북어로 만들어 한 두름에 20마리씩 싸리나무로 엮어 30 두름씩 만들어 충청도로 보낼 정도로 사업수완이 좋았고, 또 명란, 창란 등을 만들어 쌓아놓은 창고도 갖고 있었다. 이 물량을 대기 위해서 근방에서 가장 큰 명태 덕장을 갖고 있었는데, 명태덕장은 황태덕장과는 달리 바닷가에 주로 만들었다.

덕장을 만드는 나무를 덕나무라 하였다. 6․25가 터질 무렵은 마침 여름이라 덕장에 매달아 놓은 명태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금전적인 손실은 크지 않았다. 큰 손실은 2차 피난 때 발생했다. 2차 피난은 동지섣달의 피난이었다. 1․4후퇴가 양력으로는 1951년 1월 4일이지만 음력으로는 1950년 동짓달(11월) 27일이었다. 이때는 아직 덕장에 명태를 걸어 말릴 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명태로 인한 손실은 없었지만 명태를 걸어 말리는 덕장 자체가 문제였다. 덕장의 덕나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덕장의 덕나무가 없어진 것은 폭격 때문은 아니었다. 이웃사람들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하여 이웃사람들에게 뭐라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1․4후퇴 때 피난을 나갈 때 모든 집들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 보니 집을 지을 재목이 필요했다. 이때 바닷가에 있는 덕장의 덕나무는 좋은 재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덕나무를 하나둘 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명태덕장의 덕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최성용의 아버지는 이로 인하여 화병(禍病)이 나 몇 년후 사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