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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지방 역사와 문화유적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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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98회 작성일 2013-04-0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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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지방 역사와 문화유적 탐방 

강릉원주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이규대 교수 

나는 영동지방 역사문화유적 답사를 계획할 때 세 개의 문화권으로 구분하 곤 한다. 중부문화권, 남부문화권, 북부문화권으로 구분한다. 중부문화권은 강릉지방을 중심으로 오대산을 포함하는 권역으로 보고, 남부문화권은 동 해·삼척지방을 중심으로 권역을 설정하고, 북부문화권은 양양·속초·고성 지방을 중심으로 설정하는 권역이다. 
세 개의 문화권으로 구분하지만, 이것은 답사일정상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영동지역은 동해 바다와 맞닿은 해안과 평야지대에 촌락이 형성되면서 이곳 주민들의 생활문화가 서쪽의 태백준령으로 이어지는 형상의 문화적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권역으로 묶어 보는 것이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 권역으로 구분지어 보면 미세하지만 나름대로의 특성을 짚어볼 수도 있다. 
지방마다 그 도시를 관향으로 삼는 성씨가 있고, 지방마다 읍성과 관청· 향교와 서원 등과 같이 지방마다 갖추면서 개별적인 운영질서를 확립하면서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개성을 구축해 왔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언어 생활, 신앙생활, 가옥구조 등 가장 기초적인 생활 일상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듯하다. 
이렇듯 세 개의 권역은 나름 독특한 개성을 가지면서 또한 영동지역의 보 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은 각기 자신들의 삶의 역 정에서 구축되는 것으로 보면, 생활의 궤적은 그 자체로 지방사적 의미를 갖 는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사의 연구는 여전히 과제로 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편찬된 군사·시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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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봄에도 영동지역 북부문화권을 답사하였다. 학생들과 함께한 이번 답 사는 춘추로 이루어지는 정기 답사에서 번번이 누락되는 영동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답사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른 아침 버스 편으로 강릉을 출발하여 북으로 들어가면서 오산리선사유적지, 동해신묘, 낙산사, 진전사지, 선림원지, 그리고 속초의 아바이 마을을 돌아서 오 는 코스로 운영되었다. 물론 양양지방의 항·포구를 비롯하여 향교, 서원, 읍성, 독립운동유적지, 현산 공원 등을 염두에 두었지만 일정상 또 다시 아쉬움을 남겨 야만 했다. 
이번 답사 코스 중 오산리 선사유적지 와 박물관에서는 전문학예사와 큐레이터 이 시기 불교계의 혁신을 위해 선종을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종 수용의 이 제사는 천년의 역사를 가지며, 국가 지도이념이 바뀔 때마다 그것을 구현 (Curator)의 역할에 비중을 두었다. 박물관에 들어 온 유물들을 용이하면서 규모있게 전시하기 위한 능력이라는데 포인트를 맞추어 현장을 경험하는 것 에 역점을 두었다. 다음으로 속초 아바이 마을에서는 세칭 아바이 순대로 점 식을 하였다. 음식문화에 서린 현대사회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 가는 생활을 들추어 보는데 역점을 두었다. 글로벌화와 전문화를 지향하는 시대추세에서 지방사회의 역사와 문화가 생활현장에서 새로운 콘텐츠로 개발 되어가는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하겠다. 
양양의 동해신묘, 동해의 신을 모시고 국가 조정이 주체가 되어 제사를 지 내는 공간이다. 이 제사는 동해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 들의 생업과 안위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아울러 국가 조정의 통치 권이 동해 바다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구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려시대 에서 시작되어 조선조로 이어지는 긴 역사를 갖는 문화유적지이다. 
동해신묘의 제사운영을 두고 보면, 고려와 조선시대의 영상은 서로 다른 양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가 유교를 지도이념으로 삼았으니 국가 의례로서 동해신묘의 제사영상도 응당 유교적 의례절차의 구현이었을 것이 다. 동일한 시각에서 고려시대 영상을 생각하면 그것 또한 당대의 국가 지도 이념이었던 불교에 적합한 의례절차를 지향하였을 것임은 자명하다. 이렇듯 동해신묘의 제례는 국가 지도이념의 구현이라는 사회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여말선초에 이 동해신묘 제사를 둘러싸고 중앙에서 온 사신과 이 고을의 관원들 간에 야기된 갈등, 그 갈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 고을 관원이 사직한 사태가 야기된 것으로 적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아마도 그동안 고려시대의 의례절차가 관행화 되어 온 상황에서 이것을 부정하고 신왕조의 유교적 의례를 이입하려는 조선 조정의 입지가 관철되면서 야기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해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동해신묘는 시대적 이념과 가치를 구현하는 제사 공간이다하는 구심체로서 기능해 왔다. 그러기에 우리시대의 이념과 가치를 구현하는 공간으로서 기능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다고 본다. 지방축제와 문화콘텐츠 어느 경우라고 하더라도 우리 시대의 문화자산으로 활용가치는 주목받아 마 땅하다고 할 것이다. 
동해신묘의 제사는 국가에서 지정한 등위로 중사에 해당한다. 물론 서해신 묘와 남해신묘가 모두 이 등위에 해당하며, 동해신묘는 동해 전역을 포괄하 는 제사 처로서 양양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모습은 조금 초라 한 행색으로 비춰지는 실정으로 단정하게 갖추어진 모습이 절실하게 요구된 다. 이러한 요구는 전근대사회에서 이 제사가 갖는 광역성과 등위에 비추어 서도 절실하거니와 오늘날 디지털 문화의 시대에서 동해신묘는 새로운 문화 콘텐츠의 개발을 위한 아직은 주목받지 못하였지만 곧 주목받게 될 아이콘이 기에 절실한 것이다. 이 아이콘이 양양지방 역사와 문화의 중심에 설 수 있 음을 인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낙산사와 진전사지, 그리고 선림원지에서는 사회변혁 의식에 중점을 두었 다. 창건시기와 연기 설화는 서로 다르지만 의상대사와 도의선사의 행적에 담겨진 사회변혁의 구현이라는 사회사적 의미이다. 의상 스님은 신라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살다 가셨다. 이 시기 의상 스님에 의한 관음도량으로서 낙산 사의 개창은 그 자체로 지방사회와 지방민들을 의식한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동안의 불교를 중앙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의상 스님의 낙 산사 창건은 불교문화의 지방화이요 대중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 이야말로 의상 스님이 당대 불교문화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변혁의 의 식이라고 할 것이다. 

1.jpg 진전사지와 선림원지에서도 사회변혁 의식은 감지된다. 도의선사의 진전사 개창은 경주에서의 전도활동을 포기한 채 은둔하면서 비롯된다. 도의선사의 활동 시기는 통일신라가 말엽으로 접어드는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고, 그는 초기 단계에서 그의 전법활동은 수도인 경주에서 시작하였으나 그다지 성공적이 지 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그는 양양으로 은둔하여 진전사를 개창하고 제자 스님들을 육성하여 법맥을 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른바 그의 사회변혁 의 의지가 이곳 양양에서 꽃피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양양지방의 낙산사와 진전사, 이곳에 깃든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법맥은 지금 도 면면히 계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관음도량으로서 낙산사는 천년을 상회하는 세월동안 사부대중을 제도하는 웅장한 범종소리가 이어진다. 진전 사의 문도들은 양양을 떠났다. 도의, 염거, 체징으로 이어지던 진전사의 문도 들은 전남 장흥 가지산으로 이전하여 보림사를 열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가 지산문이 형성되면서 전법활동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양양지방에 깃든 사회변혁 의식, 이로서 낙산사·진전사지·선림원지는 이 지방을 대표하는 유적일 수 있으며,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을 고양할 토대로 서 사회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낙산사의 관음보살과 진전 사지 삼층석탑과 부도탑, 선립원지의 홍각선사비와 부도탑은 그 조각사적 의 미도 주목되려니와 그 사회사적 의미로 하여 더욱 빛이 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동해 바다를 포괄하는 동해신묘의 제사의례에 담긴 애민정신은 또한 저들의 사회변혁 의미와 별개가 아닐 것이다. 이제 이 변혁 의식을 양양지방 의 생활문화 속에 담아서 시대정신으로 구현해 가려는 노력은 우리 시대의 과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