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鑛夫들의 이야기-갈천 구룡광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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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371회 작성일 2013-04-2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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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갈천 엄익환77세)

사례 1
해방 전까지 인발구로 철을 끌어냈다
1940년대 초에 갈천 구룡광업소가 있다는 내용이 양주지에 실려 있다.
그 당시 일본사람들이 들어와서 광산을 시작을 할 때 사람들이 보 급대로 일본 갈 사람은 일본으로 갔지만 여기에서 대장제(일본말 가 제아)를 구룡령 입구에다가 차려놓고 인부를 데려다가 굴을 노미(쇠 꼬쟁이)로100m정도를 뚫었고 노꼬가(일본말)로 나무를 잘라 동발 을 해 들어갔다.
캐낸 철을 인발구로 끌어[나무로다가 소달구지처럼 만들어가지고 소 멍에 지듯이,사람이 지고 썰매처럼 끌고 나감]낸 후 산 중턱으 로 쏟아 부은 다음에 케이블카로 아래 선광장으로 옮긴 후 선광을 해서 목탄차가 싣고 나갔는데 40년대 이전부터 해방 전까지 철을 캐 냈다고 한다.
본인이4살이 되던 이전부터 시작했고8살 때 해방이 되었는데 구 룡령 도로를 확장하는데 양양에서 보급대가 와서 일을 했다고 한다.
승량간(대장간)에 고성청 이라는 할아버지가 기구를 만들었음.
일제 강점기에는 노미로 뚫고 철을 캤지만 6.25이후에는 착암기 로 했음.
일제강점기에 구룡광산에서 철을 캐낸 일은 그 당시 일을 했던 저 의 부친이나 동내 어른들에게 들이 이야기 해 주었다.

사례 2
함태 광업소에서 타산이 안 맞아 중단
해방 이후, 광산이 비어 있다가 6.25이후60년대 초 양양 광산 함 태 광업소에서 인수 김세영 씨라는 분(광주 출신)이 운영을 하면서 속초 항구에다가 실어 내다가 수송 문제에 운반비가 비싸다 보니 중 간에 중단하였다.
현재에도 철을 캐서 당시 선광을 해서 야적을 해 놓은 것이 있다.
지역 주민 뿐 아니라 외지인도 많았고 당시 노동자는 7~80명 정 도 되었다.조구통을 놓고 내려가지고 중간에서1차 구르마로 옮기 고 케이블카를 이용해서 구룡령 입구로 옮기면 인부들이 와서 선광 을 해서 차로 실어 운반을 했으며 아직도 케이블카 와이어 줄이 그 대로 남아있다.
철의 질은 양양광업소도 보다 좋으나, 운반비용이 과다 소요 되 어.수지가 맞지 않아 문을 닫았음.

사례 3
그 당시 사용한 화약 저장고가 아직도 남아있다
구룡령이 명산이기 때문에 굴속에서 발파하는 경우 함몰로 인한 사망사고가 많았는데.일본사람들은 그것을(산) 믿지 않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음.
원형이 보존된 굴 이외에 갱도입구가 함몰된 굴 2곳이 더 있으며, 예전에 사용했던 화약고 건물 2동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