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鑛夫들의 이야기-궤도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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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508회 작성일 2013-04-2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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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논화리 황종근74세)
사례 1
철길을 놓는 궤도부(레일의 종류와 공구)
궤도(철로)를 놓는 레일는 24파운드,18파운드,12파운드짜리가 있는데 철을 캐먹는 통로가 생길 때 마다 놓는데, 레일을 놓는 일은 레일를 휘(굴곡)는 작업이 제일 어렵(주기술)다. 괘도를 설치하는 자재는 레일,침목,징구루,스파킹,벤시,볼트가 있고 공구는 빠 루,홉빠(괭이),게이지,망치 등이 있다.
24파운드는 삭꼬 경사용 광차 선로이므로 견고하여야하기 때문에 무거운 것을 쓰는데 2인 3개조 6명과 운반 부 인원이 모두 모여서 1구미(조)를 놓는데 하루 종일 걸린다.

사례 2
막장의 레일운반 너무 힘들어
18파운드는 막장으로 들어가는 수평용으로 1개조 2명이 레일를 까는 시간이 약 2시간 반정 걸리고 12파운드는 만천판2중단에서 사다리를 이용해서 45도 경사로 레일를 올려가지고 놓는데 일의 단 도리(준비)가 다 됐으면1시간이면 놓고 네루를 휘어서 일할 때에는 약 2시간 걸리는데 오전1구미를 놓고 오후에1구미를 더해서 2번 놓는데 굴속의 레일(철로)길이는 철을 캐먹는 막장 굴속까지는 약 100m에서 150m 이다.
그리고 레일를 중단 막장으로 올리데 천판이 낮은 데는 고개를 옆 으로 찌구레야되고 또 깐드레 까지 들고 들어가야 되는데 거기다가 굴 안이 꾸불꾸불하니 레일 이 이쪽으로 부치고 저 쪽으로 부치고 머리다가 쓴 화이봐가 벽에 막 부딧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사례 3
깡 심지지 너무 짧아 입사 한지 열흘도 안됐는데 운반부 때 나보다 한 30살이 더 먹은 분이 나보고 따라오라구 그리는데 가서 굴천장 꼭대기 위를 치다보 니 어르신이 대구리를 가지고 망치로 뚫어서 깡 심지를 다 쑤세 박 았는데 구멍에 열 다섯개 박아 놓았더라고 그리구 사다리로 올라가 서 내려다보고는 내가 불을 다 붙이거든 나하고 사다리를 치우고 나 가자고 그러는데 심지에 불을 붙여 놘 것을 보니 너무 짧게 해가지 구 불을 붙여서 가슴이 두근두근 그리는데 그때 어린 맘에 근방 터 질 것 같아 눈 깜짝 할 사이에 사다리고 뭐이고 심지를 확 잡아 댕 기고 어른이야 죽건 말건 고구찌(坑口)쪽으로 쫓겨 갔다.예전에 황어를 깡으로 잡을 때 심지를 짧게 붙이는걸 봐왔는지라 저기 터지 면 돌이 무너져 내려 내가 죽을 것 같더라고 고구찌에서 한참 있어 도 안 터졌는데 얼마 있다가 몇 방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양반 이 깡이 터져 죽은 게 아니라 사다리가 치워져서 떨어져 죽은 것만 같더라구. 나중에 죽기 살기로 들어가니 그 어른이 호인인데 에이 이 사람아 하고 말아요.그 어른도 미쓰를 했지.심지는 1m 50m 이 고 구멍 속으로 거의 다 들어가기 때문에 피할 시간도 충분하다고 설명을 했어야지.
운반부 때 2중단에서 굴이 싹 우루루 무너져서 내렸는데 이슬이 내리는 것을 사전에 발견해서 빨리 피해라 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 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치 않으면 사람이 싹 죽을 뻔 했지,그때표창 도 받았었지.
그리고 처음 들어가서 운반부 때 어레이를 가지고 오라고 그리는 데 어레이를 오리로 들었으니 생전에 오리가 어디 있어야 말이지 그 런 일이 다 있었지.

사례 4
일제 때 굴속 괴인 물에 오리를 키웠다
일제 때 광업소 댕기던 분들이 우리사랑방에서 하는 소리를 들었 는데 굴속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니 굴속에 물이 괴 어 있는 데가 많았는데 거기다가 오리를 키웠다는 예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례 5
굴속으로 퇴근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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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19> 광산 논화갱과 연결되어 있는 논화리 가재골갱
출퇴근은 대부분 걸어서 했는데 간혹 퇴근 시에는 논화항 에서부 터 논화리 가제 골까지 관통(1965년경에 약 600~700여m)을 시킨 맞창이 난 굴이 있는데 추운 겨울에는 굴속이 뜨뜻하고 더운 여름 에는 시원하여 퇴근할 때에는 간드레를 들고 퇴근을 했는데 약 30여 분 정도 걸렸다.

사례 6
한국전쟁 시 가재골의 실화
논화리 입구에서부터 마을을 지나 약 3km지점의 가재골에는 일 제 때 개발을 하려고 뚫은 굴이 3군데나 있는데 그중에 가운데에 굴 은 쌍 굴이고 길이는 대부분 10여m 미만의 굴들이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논화리 마을에 저의 가족을 포함한3~5가구의15여 명이 이 굴들 중에서 제일 아래에 있는 굴에 피난을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국군들이 와서 총으로 공포를 쏘는지라 사람들이 굴 밖으 로 나오 자국군들이 몸수색을 하는데 저의 부친(황봉염)이 공민증 (북한에서 만17세 이상의 성인에게 주어지는 신분증명서)을 미처 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공민증이 나오 게 되자 국군에게 총의 개머리 판으로 맞았지만 다행스럽게 위험한 고비를 넘긴 후 오래동안 몸이 아파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