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鑛夫들의 이야기-토건실 중장비 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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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959회 작성일 2013-04-2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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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장승리 최덕실67세)
사례 1
전국구 주먹들의 일자리와 주먹들의 의리
내가 65년도5월10일에 들어갔는데 그때 종업원이 2,000명 이상 이 됐었다.
그런데 회사에 깡패들이 우글우글 한 거야. 그 깡패들이 내가 담 당하는 토건실에 있었는데. 그 깡패들은 서울사람들과 전국구에서 사고 낸 사람들을 여기다가 내려 보낸 거야. 어지간한 사람은 한5개월에서1년 이렇게 있다가 갔지. 근데 나 하고 토건실에 근무한 깡패 출신이 하나 왔다가 설악산 절에 총무로 가기도 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제주도서부터 빽 있는 사람,주먹질 하던 사람들도 다 온 거야.그때 대한철광이라면 직장 이 공무원보다 훨씬 좋다 그랬잖아. 그래가지고 근무하다가 내가 한 7~8명 정도 데리고서 일시키고 했는데,근데 일은 잘하더라. 주먹질 하는 사람들이 의리는 있어요. 1년이 지나면 갑니다. 그러고 소주한 잔하고 가고 그랬지.
깡패들이 오면 총무과에서 대부분 경비로 많이 시켰다.

사례 2
광산 사택과 장승리의 생활상
붕화료(노무자),설악료(사원)라는 사택이 있었는데 독신자(홀애 비)들이 사는 기숙사도 있었다.임시부 부부는 사택 들어올 때 진짜 힘들다.상시부(고입)만 여기에 얻을 수 있어. 사택 한 칸 다락방에 서 자고 애 둘 셋 있는 사람들은 진짜 고생 많았어요.

매달 15일 봉급이잖아 그때 당시 돈으로 양양에 약3억이 풀린 거 야.(현 30억 정도)
여기 장승리에 색시집이 5집이나 있었고 색시들은 7~8명씩 데려 다 놓고 그랬지.
상평도 붕지/상내지 등 한 서넛 군데 색시집이 있었다.
광업소가 잘 될 때에는 양양에 술집으로 성이 안차서 속초 나가서 도 먹고 들어왔다.갑을병3교대 할 적에 갑이 아침에 출근해서 오 후5시에 퇴근하면.집으로 안 들어가고 술 마시다가 자고 아침에 출 근하는 경우도 많다.
바로 위에 육고점 밑에 막걸리 집 있었고. 육고점에서 회사에서 두 번, 한 달에 돼지고기 두 근씩 끊어 주는데 목구멍에 먼지하고 때를 베껴내라고 주는 그걸 술 좋아하는 사람은 돼지고기 바꿔주고 돈 받아서 그걸로 술을 먹는 거야. 이 상평 초등학교 앞에 슬레이트 뚝뚝 짤 라 불판을 만들어서 가지고 고기를 구어 먹으면 진짜 기가 막히지 지금은 플라스틱 댓 병 이지만 그때는 유리로 만든 댓 병을 갖다놓고 먹고 그랬지.그 돼지고기 표(한 달에2개)는임시직이고 고입이고 다 줬지.
광산에 극장이 있으니까 젊은 남자 여자 많이 모이고. 그 당시에 양양에 목욕탕이 없었잖아.근데 광업소에는 있었잖아.그래서 종업 원들한테 한 달에 몇 장씩 목욕표를 끊어 주는거야 그러면 양양에 사는 종업원들 가족들이 목욕을 하러 많이 오 고 그랬지, 종업원 아 니더라도 표만 주면 넣어주니까.

사례 3
광부의 해고
80년대 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부터 종업원들을 한 번에 한 200명 잘랐잖아. 포항에서 광석이 비싸고 하니까 그것이 빌미가 되었다고 는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이 해고 조건이 안 되었다고. 그리고 당시에 는 투전질을 많이 하게 되면 결근하잖아.그럼 그런 사람도200명이 안되잖아. 그래서 쉽게 말하면 감독이나 주임들한테 밉게 보인자를 살짝살짝 얘기해 주는 거야. 그때 200명 추렸을 적에 한 일주일 동 안에 데모하고 살인사건 날까봐 사복 경찰들이 들어오고 그랬다.근 데 그 후부터는 차츰 차츰 줄어드니까‘다음에 내 차례구나’하고 자 발적으로 나가는 사람들하고, 과장한테 잘 보여서 더 있고 그런 사 람도 다 있었다.

사례 4
광업소의 재개발 히토류가?
그때 당시 광업소(대한철광)땅이19만평이야. 그 도면을 내가 토 건실에서 측량이랑 설계한 도면이 다 있었잖아. 폐광되고도 내가 좀 갖고 있었는데 근데 내가 요새 좀 아쉬운 것이 여기를 새로 개발하 잖아. 그게 있으면 좀 유용하게 써 먹을 텐데 다버려서 없어지고 말았지 하긴 폐광이 된 마당에 그걸 놔두면 뭐하나.
기념으로 전화기하고 깐드레 하고 노미하고 갖다놨지. 기념으로 갖다놓고 MBC 방송국에서 나와서 촬영해가고 돌도 한 4~500m 지 하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돌을 수십 개를 구해 놨는데, 지금 보면 새 롭지 뭐.
그때 광업소에서 히토류가 나왔는데 발견을 못 한 거지. 근데지 금 광업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정부에 지원을 받아 히토류와 철광석 을 슬슬 개발을 하긴 하고 있는데
그나마 그 광산이 잘 되어서 이 지역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 요.

사례 5
논화항에서 불을 때면탑 동에서 연기가 난다...
논화항은 덕대가 하다가 폐광을 했고, 탑동은 도목항 쪽에서 들어 가서 캐냈지.거기에는 압기실이 있어서 작업을 했는데,실제로 명 칭은 없고 탑동이라고 했다.
지금도 보면 도목항에서 거기에 맞춰 놔가지고 쉽게 말해서 여기 서 불을 떼면 연기가 그쪽 항의 구멍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논화항과 탑동하고는 갱도가 연결은 안 되었지만 서로 구멍이 나 있어 논화항에서 뭘 하면 탑동에서 공기나 연기 같은 것 이 풀풀 난다는 것이다.

사례 6
불도저,글이더,페이로다, 포크레인, 지계차 면허취득
65년도에 들어와서 아직까지 사는데,이게 박정희 대통령 때 시멘 트 통 벽돌로 지어준 집이잖아. 광업소 초창기 새 농촌 건설사업 할 때 면에서 부락 동네에 마을 회관을 지은거지. 솔직히 군청에서 지 어준거나 다름없지.
토건실은 장비 운전을 해야 되니 춘천 소양강 다리에 가서 불도저 면허를 땄어.그런데 선광에 있는 도저하고 똑같더라고 근데 거기는 50m를 왕복해야 합격인데,시험관이 도청에서 하나,인천군부대서 장교 하나,원주 국토 관리청에서 하나 해서3명이 나왔는데 시험이 라는 것이 도저를 몰고 가다가 내려오라고 하면 끝이거든.
기사가 옆에 타.나라샤 하면서50m 돌아서 올 때 파도청을 하라 고 그러더라고,
처음에 타면 질문을 해. ‘당신 어디서 좀 하다가 왔냐 ?’ ‘광업소에 서 한1년 하다가 왔습니다.’했어. 1년뿐이 안한 사람이 뭐 이렇게 잘하냐고 그러더라고.
합격한건 맞는 것 같은데 시험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한명 뿐이니 까 하루정도 여기서 조교로 더 일 해줄 수 있냐고 그러더라고. 그때 는 시험을3일동안 보는데 회사에 시험을 본다고 하루밖에 못한다 고 그러니까 어디에 얘기해야 하냐고 그래서 총무과에 얘기해야 한 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그러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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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18> 대한광물 중장비를 운전중인 최덕칠씨 2012. 9
그래서 총무과에 얘기해주고,다음날 한나절 하고 나니까3,000원 주더라고.가다가 차비하고 무엇을 사 먹으라고.그 때 당시에 면허 증을 찾으러 와야 하는데,당신은 찾으러 오지 말고,보내 줄 테니까 하더니 20일 정도 있다가 붙여 왔다.
면허 시험을 보고 왔지만 난 조수니까 봉급이 얼마 안 되잖아 그 런데 70년도에 그 기사가 다른 데로 가면서 윗사람에게 내가 일 잘 하고 그러니까. 내 봉급을 주듯이 얘에게 주라고 해서 말만 들어도 고마웠지.
그 후 원주로 가서 페이로다도 많이 배우고 면허도 또 금방 따게 되었고. 76년도에 는 포 크레인,지게차 그 면허증도 다 따 버렸다.
광업소는 도저,페이로다,그레이다 세 개만 써 먹었지. 그때 당시 는 그레이다와 도저 면허를 내면 같이 통합이 되다가 얼마 안 있다 가 분리가 되었다.
근로자들은 휴일이(공휴)한 달에 두 번,교대 자체로 쉬었다고 보고,일반 사원들은 일요일과 공휴일에 쉬고 그랬다.
광업소에서 그때는 체육대회를 많이 했지.축구,배구는 도 대회 가서도 우승 많이 했고.삼미광업소 때에는 야구 도 했다.

사례 7
광업소의 대민지원 사업
광업소에서 불도저 할 때 그때는 포크레인도 없었다. 그래서 기름 값이랑 잘 챙겨주면 가서 일을 해 주었는데 거의 무상으로 해 주었 다.
한번은 현북면을 나갔는데 그때 비가 많이 와서 나무다리가 없어 졌거든.그때 가서 작업을 해주는데12ton차에 메리를 통째로 싣고 올라가는 길에 천천히 와서 하는데, 처음서부터 기어를 2단1단으로 가서 하는데, 건너 가다가 기어 변속을 한다는 것이 차가 울컥 하면 서 그 문짝이 헐레레 하고 열어지는 바람에 옝미리가 한 반 이상 흘 려 내렸다.
그때사람들이 개울을 보더니 개울이 하얗타 반 이서 그 때 현북 사람들이 메리를 잘 주워 먹었고.나도 좀 갖고 오긴 했지. 그때는 그레이다가 가지고 많이 지원 나가면 대부분 비포장이어 서 수산 가는데서 일을 했는데, 서문리 김창호씨가 군청 지역계획계 장 할 때 그 분이 술을 진짜 좋아 했지요. 그리고 손양면 동호리와 상운버덩에서 새마을사업 일을 제일 많이 했는데 일이 끝나면 닭 잡 아 주고 촌에서 누룩으로 만들 막걸리 대접도 잘 받아먹었으며, 6개 면에서 광업소 도움을 안 받은 곳이 없었고. 동우대학교 운동장 거 기도 내가 그레이다로 닦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