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鑛夫들의 이야기-선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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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2,874회 작성일 13-04-25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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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구교리 김준기76세)
사례 1
객관성이 요구되는 선광 감독의 임무
대한철광 울산광업소에 61년 입사하여 일하다 양양 광업소에 왔 다.(석봉섭) 그 당시 양양광업소에 입사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울 산에 지인을 통해 입사하게 되었다. (안병덕 과장. 평안도 출신. 서울대 졸업)
울산광업소는 노천에서 캤으며,단가가 저렴하지만,질이 좋지 않 았다.울산광업소에서는 사문암[蛇紋岩:포항제철소 용광로에 들어가 는]이라는 희귀광석도 캤다.
현재도 울산에 철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내와 근접하여 공해문 제와 진동문제 등의 제약사항이 많다.당시울산에서는 한국 비료와 현대 중공업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제일제당,알미늄,정유공장 등을 만들고 공단이 개발 중 이었다.
60년대 후반에 양양광업소 선광과로 이직을 하였는데 당시 간부 급은 이북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상동 광업소 출신인 남한 출신과 갈등이 있었다. 갈등이 표면화 될 때는 이북 사람들 중 사표를 내거 나,경영진의 권고 퇴직한 사람도 있었다.
안병덕 과장으로 인해 조금 줄어들기는 했다. 그 당시 광업소의 광맥은 거의 고갈사태라고 말했으며,그로인해 경영권한으로50% 정도 감원하였다.하지만,고갈된 광맥의 아래에 광맥이 하나 더 있 었으며, 광맥시추를 하기 위해 수항을 400레벨로 내렸다.


사례 2
수선부의 여자 광부
광업소의 수선부여직원은 초반에는 수선을 했고 (손으로 선별작 업)다음단계에서 그물 같은 그리 지주에 떨어지면,벨트를 타고 나 가는 도중에 수선을 하였다.
컨베이어 벨트는 폭이 좁은60cm와폭이 넓은1m 20cm가있었 는데 폭이 좁은 60cm 벨트로 지나가는 철은 여직원들이 수선을 하 지 않고 그냥 통과를 시키지만 폭이 넓은 1m 20cm 벨트에서 철이 지나가면 여직원들이 마주보고 서서 수선을 했으며, 사람 과 사람과 의 간격은 약 70cm에서 90cm정도가 이었다.
수선 당시 여직원은 약 3~400명 정도 되었고, 감독은 근로자 3~40명에 1명 정도 배치되었으며, 점차 기계화가 되면서 여직원의 수도 감소되었다.탑동에도 여자가 많이 있었다. 광업소에서 여직원과 남자직원이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결혼 후에는 여자가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고,남편이 사고로 사망한 경우에는 늦게 까지 하는 여직원이 더러 있었다.


사례 3
1일 선광량이900~1000톤
70년대에 1일 체굴량은 1500~1700톤 이었고 선광은 900~1000톤 이였고,초창기에는 일본과의 계약하면서1인치 이하 정광에 대해서 만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선광장에도 분야가 따로 있었는데, 여자가 수선하는 작업을 감독 하는 사람이 있었고, 맨 위에 한매에서 가지고 오는 광석을 쏟아 부 으면서8인치로 파쇄 하는 작업의 감독이 있었으며,제일 밑에 기계 선광하는 작업에 감독이 있었는데, 볼밀 기계에 광석을 집어넣어 마 광 작업을 하는 곳도 감독이 있었다.
볼밀 기계의 무게는약16톤(Ton)정도 되었는데,레미콘 운반차 량처럼 생긴 통에 물과 함께 볼을 넣어, 광석을 가루로 분쇄시키는 기계이다.
항내에서 철을 광차로 실어온 후 오야삥에 도착한 후에 사람이 8 인치 정도로 깨고, 작은것은그냥 흘러 벨트를 타고 내려 간 후 여 직원이 수선을 한다.
폐석과 광석은 나누어져 나가고, 광석은 밑에 6인치 빙(저장고)이 하나 더 있다.
작은 것은 스크린으로 치면,가루와 분광 상태로 떨어지고,이를 밑에서 자선이라고 물과 스크린을 흔들면서 자력선광기가 돌아가면 광석이 붙음.폐석은 폐기 또는 미나미골에 넘겨서 폐기하였고,처 리하기 힘들어 이곳저곳에 갖다가 버렸는데, 그 후 폐석은 일양에 팔았는데,그 값이1년 동안의 광구 가치와 비슷했다.


사례 4
감독의 작업 배치
감독은 회사 규율에 따라 사적인 행동 금지하였고 일하는 종업원 과의 갈등은 없었다.종업원은 대략3~40명 정도 되는데, 같은 일을 해도 힘이 덜 드는 분야가 있어서 업무 분할은 노동자의 능력에 따 라 분배되어야 하나 친분에 의한 업무 배치가 간혹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친분 있는 노동자를 쉬운 분야로 배치하기 위해,능력이 부 족한 노동자를 가르치는 등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당시 광업소에서 일하는 사람은 배경도 없고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온순한 사람들은 밤낮 힘든 업무에만 배치 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노동자의 업무 간에도 순환 업무가 시행되 어야 하지만,그러한 경우가 정해지지는 않았다.
감독도 순환 업무가 있었으며, 어렵게 일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 서 일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A라는 사람의 능력이 3~4가지라고 하면,1가지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일을 시킬 수 가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감독자 의 권한이기도 했고,기능이 부족한 사람은 관심과 가르침을 감독이 가짐으로써,능력의 향상을 이끌어 내 주었다.사고가 발생하는 것 은 운이고,관심이 부족하다면,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선광장에서 도 사망 사고가 많이 발생하였으며,사망자는 대략5~6명 정도, 상 해사고는 노동자의 대략 6~7% 정도 발생하였다. 선광장뿐만 아니라 타 부서에도 국영 기업의 실업자 구제 차원 에서 타 지역 출신의 건달,해병대 등 많은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구술자 덕대감독 이낙준 부인 김기전69세)
사례 1
선광장의 아가씨들
선광장 선별작업은 고조(폐석을 고르는 작업)와, 중광조(쪼그리고 앉아서 컨베이어벨트에서 떨어진 광석을 엎드려서 쌓는 작업)가 있 었는데, 중광조는 많이 힘든 작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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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6> 선광장 학생견학 1962년경
폐석을 미처 고르지 못하는 경우 샘플실에서 정광이 많이 나오 면,혼나는 경우가 있었고,샘플실 샘플시료공의 성격에 따라 미처 골라내지 못하는 폐석을 골라낼 수도 있었는데 그때에 샘플실 시료 체취공은 손홍재였다.
간혹 선광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선별 수선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 려고 견학을 오 는학생들이 있었는데 우리 뒤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 면서 지나가면 폐석을 버리는 과정에서 그 학생들에게 슬쩍 던지기 도 하였던 일이 생각납니다.
자선단[磁選段]벨트가 움직이지 않는데,한 사람이 위에 매달려 발로 벨트를 밀었는데,매달린 것이 전선이었기 때문에,감전 된 적이 있었으나 근무 당시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례 2
목재소에서 땔감을 훔쳐오다 선광장의 겨울은 매우 추웠기 때문에 난로를 피웠지만, 나무가 없 어서 오야삥 광석저장고에서 동바리를 했던 나무를 갖다가 떼는 경 우가 많았다.
하루는 주임이 난로를 피우기 위해 나무를 내려 보내라고 했지만, 본인이 중간에서 나무를 떨궈서 선광장에서 떼기도 하였다.
선광장에서 발이 시렵기 때문에 돌을달궈서 발밑에 두고 일하기 도 하였다.
도시락을 먹는 휴게실 난로에 뗄 나무가 많이 부족하다 보니, 목 재소에서 나무를 훔쳐 와서 땔감으로 쓰기도 했다.
나무를 훔치는 과정에서 목재소 차가 올 때는 나무를 내려 놨다 가,차가 지나가면 가져 오기도 했다.
회사 차원에서 난방에 신경을 써주지 못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구술자 북평 이운자71세)
사례 1
장마철에도 깊은 물을 건너서 출근 장마철에 북평 다리가 없을 시절에 강물이 많아서 친척 오빠가 나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출근을 해야 한다고 해서 지금의 임천보 댐 밑에서 부터 건너기 시작하면 저 멀리 아래쪽에 있는 서 문리 제방 둑 근처까지 물살에 밀려 출근하기도 했는데, 발이 강물 바닥에 잘 닿지 않는 곳도 많이 있어서 거의 둥둥 떠내려가다시피 건너편에 도착했다. 북평에 사는 사람은 거의 그렇게 건너서 출근하 였다.
여자는 거의 대부분 선광장에서 일을 하였는데 2열로 서 있기 때 문에,앞에서 고르고 뒤에서 나머지를 고르는 방식이었다. 선광장에서 일하는 여자 노동자는 100여명 정도 됐으며, 3교대로 30여명 정도씩 일했다. 선광장에서는 한자리에서 7~80명에서 100명 정도 자리에 서서 일을 했고 사람사이의 간격은 양팔을 벌린 정도였 다.
선광장에서 일하는 동안 얘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소음이 매 우 심해서 바깥으로 새는 경우는 드물었다.
신입을 골탕 먹이려고,신입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했더니,당 시 신입은 진짜인 줄 알고,노래를 불렀다.
선광장에서는 선후배 차이는 없었지만 임시와 고입의 차이가 있 었고. 대부분의 선광장 여자 노무자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할 때 선 광장을 그만 둔다.


사례 2
호랑이 불과 도깨비에 홀리다
60년 전에는 용천(현재 북평) 딴봉 부근에 호랑이가 잘 나타났잖 아요. 임천 그 석성당에 해만 지면 퍼렇게 불을 켜고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구경 갔다가 오다보면 제방 둑에 서서 파란불이 보이면 못 가고 오빠들이 좀 늦게 올 때에는 임천서 버스 올 때 까지 기다렸다 가 오빠들이랑 같이 건너왔다.
그것이 뭐 해코지 할라믄 그 마을까지 쫓아왔겠지만, 그래도 안 따라 오더라고
둑에 올라서다가 해당화 나무가 많았는데, 불만 보면 무서워서 뛰 어 내려오고.
북평 다리가 가을에 물에 떠내려가면 새로 놓는다. 그러면 그 전 에 도깨비가 그렇게 많다고 전해져 왔다.
도깨비가 많아서 이웃 아줌마들도 밤에 불러서 가시 덩굴에 막 나 가고 그랬잖아. 그래서 가다보면 막 다리 위에서 다리 놓는 소리를 하고 그러면 다리를 못 건너고 이쪽 아래 서문리 거기서 돌아서 저 아래 궁 밑으로 해서 물을 건너간다고. 그리고 집에 가서 아버지를 깨워서‘아버지 저 다리를 임천 아덜이 나와서,다리를 지금 끊고 있 다고’ ‘아 무슨 다리를’ ‘아 지금 다리를 끊거라 소리를 지르고 난리 라고’아버지가 나오니까 겁이 나서 따라 나오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다리 놓던 소리가 나는데,그게 도깨비거든요.
누가 자꾸 불러서 따라 나가니까 안 들어와서 가보면 도깨비에 홀 려서 그 앞에 가시나무 많은데 가시나무 덩굴에 가서 찾아오고 그랬 어요.
저 수리 사람들이 소 장사 왔다가 늦게 가면은 저기 북평 거기서부 터 아이들이 아버지 오 시냐고 그러면 술이 취해도 정신은 멀쩡해서 덜렁 소위에다가 올려놓고 꽁꽁 묶어서 마구(외양간)에 들여 놓으면 아침에 요 싸래 빗자루 하나를 놓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례 3
소복을 입은 여자 귀신
그 전에 굴로 차 다니다가 차사고 나가지고 북평 그‘옥순이’도 죽고 그랬을 때 그때도 그 굴에서 귀신이 얼마나 잘 나타났어요. 차 가 갔는데 그 굴 밖에서 차끼리 부딪혔는데, 차가 가면 굴 입구에서 소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고,굴 안에서 차를 세우고 그래 다잖아. 그럼 귀신인지 뭔지 그래서 우리는 굴에서 잘 안다녔어요. 그래서 우리는 사고가나고 그래서 안다녔어요.
남편이 오야삥에서 일하다가 노조 위원장으로 오래 지냈다.



(초창기 여성 근로자 군행리 김길미72세)
사례 1
중학교에 다닐 나이인 열다섯 살부터 광산 일을 했다.
광산에는 1956년경인 열다섯 살부터 다녔고 중학교에 들어갈 무 렵인 열네 살 때 폭우가 쏟아져 지금 거마리 마을회관 앞 뚝이 무너 지는 수해가 나 논이 믿기는 바람에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나이에 믿긴 논에서 산태미로 돌을 담아내는 일을 하였고 그때 소(牛)도 함 석판을 끈에 매달고 돌을 싣고 끌어서 저 내기도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논에 가서 일을 하다 보니 중학교를 다니지 못해 억울하니 입이 이만큼 나왔다. 우리 집이 그때는 거마리에서 몇째 안가는 부자인데 마을 전체가 수해가 나다보니 우리 또래 애들은 전 부 중학교를 못 갔는데 그때만 해도 촌에서는 여자 아이들은 어지간 해서 중 고등학교를 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그 때 탑동 광산 에서 사람을 받는다고 해서 동갑내기인 우리 동네 아랫말 김금옥이 하고 여섯 명이서 갔는데 다 붙어 열다섯 나이에 광산에 다니기 시 작했다.
일하는 작업장은 탑동 광산으로 굴속에서 광부들이 쇳돌을 구루 마로 실어다 선광장에 쏟아놓으면 버럭(폐석)은 버리고 꺼먼 쐬꼽 돌은 산태미에 담아서 따로 모아놓았다. 일 하는 여자들은 한조가 일곱 명씩 한 20 여명이 쇳돌을 깨서 골 랐는데 선광부 남자 2~3 명이서 오함마로 큰 돌을 대충 깨 놓으면 우리가 다시 망치로 쪼개서 버럭은 버리고 쇳돌만 놓았는데 그때 들 떡골에 사는 나이가 두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쌍둥이 총각 형제들 이 잘 깨주었다.
광차 운반부가 쇳돌이 많이 섞인 돌을 실은 구루마들이 들어오면 한 30분이면 한 광차씩 했고 쇳돌을 적게 실은 구루마가 오면 한 1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그리고 가끔 감독들이 와서 왜서 폐석에 돌이 많이 나오느냐고 말 하는 경우도 있었고 웬만큼 일을 오래 하다보면 돌의 결을 보고 깨 면 잘 깨진다. 그러다가도 망치로 돌을 깨다보면 돌 조각이 얼굴에 자꾸 튀어 곰보가 될 뻔도 했다.
탑동 사무실에는 직원이 3~4명 정도 있었던 것 같았으며,선광장 에는 광차가5~6대정도다닌 것으로 기억되며 그때만 해도 어린 나 이라 굴 안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몇 명인지 잘 몰랐으며 우리는 그 저 죽어라하고 일만 했다.
도목항 쪽은 무슨 행사 때 가 보았는데 본 광산에는 여자 선광부 도 많았으며 엄청 높은 뚝방 위의 난장에서 일을 하는데 거기서는 장난을 잘 못하다가 보면 벼랑으로 떨어질 것 같이 큰 일이 날 것 같았으며 탑동은 버럭(폐석)이 하얗고 도목항 쪽은 버럭이 씨꺼매서 쇳돌하고 구분이 잘 안될 것 같았다.


사례 2
단오 때 몸살이 나 그네를 못 뛰어 금반지를 놓쳤다
한 삼 년 다니다보니 광산이 커지기 시작하니까 광산에서 단오 행 사 때 여자 종업원들이 그네를 뛰는 경기 행사가 있었는데 탑동에서 처녀들이 그네를 뛰고 새 각시들은 못 갔는데 내가 그네를 제일 잘 뛰었다. 그 때 본 광산으로 그네를 뛰러 가서 일등을 하면 금 세 돈 반지를 타게 된다. 그래서 다음날 본선에 나가야 하는데 그 날 밤 제가 몸살이 나서 본선에 못 가고 반지3돈을 못 탔다.그때금 삼 돈이면 컸지요.


사례 3
할머니들은 차를 안 태워줘도 처녀들은 태웠지요
출근은 거마리 단지골로 해서 산등을 넘으면 서선리가 나오는데 가면서 장난도 하고 들고 뛰기도 하면서 가면 탑동까지 한 시간이면 갔다.
거마리 굴로는 잘 안다니고 일을 하고 퇴근하는 남자들이랑 여러 명이서 굴로 빠질 때에는 신문지에 양초를 말아가지고 준비해가지 고 다녔다. 출근할 때 재수가 좋으면 철 싣는 차를 만나서 손을 들 고 오라이 오라이 하믄 차가 서서 태워주었는데 그때는 오라이가 무 슨 소리인지 모르고 무조건 오라이라고 했으며 운전수들이 할머니 들은 잘 안 태워주고 우리 처녀들은 운전수 옆 조수석에 태웠다.
도시락은 보자기에 싸가지고 갔으며 겨울에는 젊은 광부 오빠들 이 도시락을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가 먹었으며 사무실에서 들어와 서 점심을 먹으라고 했지만 할머니들이 사무실에 잘 안 들어갔고 산 밑이나 난로도 없는 선광장 안에서 둘러앉아서 먹기도 하였으며, 일 을 하다가 감독이 없으면 굴속에서 숨바꼭질도 하고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을 굴속으로 들고 가서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쉬는 시간에는 새마을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언제인지 굴 입구에서 조금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굴이 여러 갈래 여서 들어갔다가 못 찾아 나올까봐 굴 아구에서 쪼금만 디다 보고 쫓겨나왔다.


사례 4
월급을 더 달라고 따졌더니 더 주더라.
가끔 감독들이 와서 왜 폐석으로 쇳돌이 많이 나간다고 잔소리를 했고 감독들이 오면 떴다 떴다 하고 소리를 치기도 했으나 작업현장 에서 우리 젊은 처자들이 일을 잘하니 할머니들도 꾀를 못 쓰고 일 을 잘 했으며 내가 원래 덩치가 커서 억세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젊은 애들 역시 꾀를 안 쓰고 잘 한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내가 할머니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 월급은 다 똑같다고 막 따졌더니 몇 개월 동안은200원인지2,000천 원인지 더 받기도 했다.
그리고 명절 때는 떡값으로 하루 일당을 주었다.


사례 5
양양장에 귀한 사지바지를 꼭 사 입어야 속이 시원했다
월급은 그 때 삼만 오천인지 받았고 당시에 쌀 한말이 이천 원이 니 한 달에 쌀 한가마니 반을 받았다고 치면 촌에서는 괜찮다고 했 다. 월급을 타면 돈을 다 맡기지 않고 아버지한테 드리고 얼마쯤씩 타서 썼으며 아버지가 비료를 산다고 내 돈을 꾸어가지고 가서 갚지 도 않는다고 그런 얘기를 했으며 그 때 양양 시장에 사지바지 같은 귀한 옷이 지금처럼 많이 나오 지않았고 두 세 개 정도 나오 면제일 먼저 사 입어야 속이 시원했으며, 며칠만 다니면 월급이 또 나온다 고 하니 재미있었고 기분도 좋았지요.


사례 6
처녀 총각이 광산 가설극장 구경하러 굴을 빠져 다녔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 면 일을 하러 못 갔으며 철모르는 열다섯 살 부터 스물 살까지 우리 동네 금옥이와 월녀하고 다녔으며 아버지가 처녀가 다 되었으니 머리가 찼다고 더 이상 안 보냈다. 그 맘 때는 17살에 시집을 가기도 했는데 우리가 그만두고 탑동에서 철이 잘 안 나오고 중단을 하여 1960년경에 탑동이 끝난 것 같고 얼마 후 광산 에 선광장이 크게 생기면서 선광일은 기계화가 되었다.
그 시절에는 광산에 극장 건물이 없을 때 가설극장으로 구경을 갔는데 동네 사람들과 처녀 총각들하고 밤중에 거마리 큰 굴을 빠져 나갈 때는 양초에 신문지를 말아서 불을 붙이고 들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