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西門里광부들의 이야기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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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91회 작성일 2013-04-2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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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리: 강교연 74세,김강래78세, 오용병 85세,이용석76세, 이의삼 76세, 이정헌 75세, 정연덕 76세, 최선권 77세)
사례 1
착암공의 하는 일
56년에 도목항에 바로 들어갔는데, 임시부 없이 바로 고입으로 들 어갔다. 막장 들어가니 그맘때는 도목항이 쌍철로 되어 있고 목 구 르마로 광석을 옮겼는데,바퀴는 쇠바퀴이고,나무로 만든 목 구르 마로 운반을 했는데 갱도(坑道)가넓어 쌍철 길로 되어 있어 구르마 들이 서로 교행을 했다.
항 입구에서부터는 수평인데,고개만 넘으면 내리막 이였고,움직 이다 보면 네루가 흔들려서 어긋나면 탈선도 해서 넘어지면 구루마 를 다시 세우고 광석을 퍼 담아야 했다.
구르마 운반은 둘이서 하고 학구 뒤집어 씌워 놓고 빼 낼 때는 왜 서 빼 내냐 하면 발파하다 보면 큰 덩어리도 나오고 부스러기도 나 오잖아 그럼 학구를 엎어놓고 빼놓고 이런 나무판 대고 굴려서 목 구르마에 싣고 큰 거는 씌워놓고 댓방으로 작은거는 실어 담았다. 상황에 따라 착암공들이 발파를 해놓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에 는 광석 싣는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였다.

사례 2
TY착암기와 TA착암기
수평에 들어갔을 적에는 왜정 때,인공 때 그들이 해놓고,수복 후 양양광업소 적에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1층, 2층식이래요. 위로 구멍 을 뚫고 사다리로 올라가지고 막장을 뚫을 때는 자그마한 딸딸이 같 은 걸로 싣고 그걸 받아가지고 나오고 그랬으며, 그 맘 때는 TY하고 TA라고 하는 착암기로 굴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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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21> 당시 근로자들과 대담중인 양동창 문화원장 2011.9
동발 받치는 걸 지지부라고 하는데 그 나무를 갖다 세울 적에는 밑 둥지를 올라가게 하고 꼭대기를 밑으로 내려가게 하고 위를 넓적 하게 해가지고 받치고 들어가면서 설치했다 .
이론적으로 막장 뚫을 때는 TY가 가벼워요. 그러면 그 선배들이 할 때에는 꼭대기는 휘어서 집어넣으면 몽땅 터져서 떨어서 나가게 되거든.그런데 학술적으로는 맞는데,우리가 하다 보니, 이게 가벼 우니까 힘으로 누르자니 힘이 든다고, 그래서 힘 있게 가운데 뚫는 것 보다 막 집어넣어서 하다 보니 쉽더라고, 그래서 쉽게 하고 한 막장만 잘 뽑아내고 그랬다.
그때 착암기계 할 때 한 달에5~6만원받았고, 공무원들은 그때 2~3만 원 정도 받았으니 웬만한 공무원 옰 옰받았다.그때 집에서는 5,000원이면 한 달 생활비가 되어 살았다. 그때 돈 모았으면 지금 잘 살고 있을 거예요...

사례 3
학력은 필요 없고 구르마를 잘 밀어야 뽑는다
이하형씨가 도목항 항장 할 때는 운반하는 사람 고를 때는 경력, 학벌 이걸 안 보았다.선광과에 목구르마 앞에 쭉 세워놓고,구르마 밀어보라고 하고 그러고 사람을 뽑았어요.
굴 안에서 쓰면 안 되는 화약을 가지고 발파를 하다가 사람 2명이 죽는 사고가 일어났는데,화약을 터뜨리고 났는데,사람이 안 나와 서 우리가 뒤따라서 올라가다보니 올라가던 사람이 휙 쓰러지고 정 감독도 휙 쓰러져있다, 그래서 우리가 에어를 확 뿌리고 올라가서 둘을 실어 냈는데,결국 두분은 돌아가셨지요.
굴 안에 휴게실 시설에 식탁도 해놓고 의자도 놓고, 거기 보면 전 기 곤노[일본어: 히터]로 달궈서 위에다 라면도 끓여 먹고 밥 싸온 사 람은 밥도 데워서 먹고 그랬는데 그 안에 전기시설이 다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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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22> 당시 이의삼씨 표창장 1974.3.10
착암기를 조립하다가 에어펌프가 터지면서 손을 다쳤어요. 그래 서 작업을 못하고 병원에 갔어요. 그래서 이제 착암기에서 일 못한 다고 하고 목수 조수로 선광과로 들어갔어요.
선광장 건물이 3층까지 있고 거기에는 철광석을 갖다 붓는 슈트 가 있어요,거기에 광석을 슈트에 실어서 보내는 과정인데,손이 벨 트에 잘못 걸려서 끌려 들어가서 다치는 사고도 있었다.
사고 난 사람은 기본금에 의해 일정부분을 주었고 호프만방식, 게 르만방식.두 개의 계산 방식이 있는데,담당자를 제외하고는 내용 을 알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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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23> 당시 이용석씨 표창폐 1982.7.1
임시부로 3개월 동안 일하다가 상시부로 안 시켜주면 한 일주일 간 집에서 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다시 일주일 뒤에 입사하 는 식으로 해서 임시부 6개월을 일하고 그러다가 3년 동안 임시부로 일하다보면 상시부가 되고 그랬다.

사례 4
낙반사고
대한철광시절에는 논화항 도목항 양양항 수항 탑동항 5개 항이 있었다.가장 어려웠던 일은 죽은 사람 끌어 묻는 일이었다.가장 많이 일어나는 사고는 낙반사고,광차 추돌 사고였다.
수항의 수직 굴 지름은 약 4~5m정도 되고,수직으로 약450m 정 도 내려간다. 우리나라 기술진이 뚫지 못해서 독일 기술진이 와서 뚫었다.논화항,탑동항,도목항,양양항은 사항(45도 기울어 뚫은 굴)이였다.
한50m이상돌이엉켜서 안 내려와요. 그럼 화약을 가지고 올라 갑니다.화약을 장전해놓고 발파를 하는데,중간이 무너져서 피신할 곳이 없어요.재라찡(다이너마이트)이라고 그걸 돌돌 말아서 붙여놓 고 내려오는데,뒤에는 무너져서 피신할 곳은 없지,다이너마이트는 ‘칙 칙칙’타 들어가고, 돌은 죽일 듯이 차서 나오고 그러면 참 당황 하고 불안했다.
수항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산산조각이 났죠.차장이라는 사람 이 유족한테 보일 수 없다고 그래서 보여주지도 못했죠.
천정에서 이슬이 떨어지는데,거기 아래에 사람이 있었네,그래서 내가 큰소리로“피해”라고해서 사람들이 다 피하자마자 돌이 떨어 지기도 했지.

사례 5
반복되는 정전사고
처음에 한전 전기가 들어오 기 전에 광업소 자체 발전기에서 400마 력짜리 2개, 900마력짜리 1개를 돌리면서 광업소 자체에 전기를 들어 왔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한전이 전기가 들어왔는데, 1971년도에 한전에 서 전기 값을 올리겠다고 하루저녁에 정전을 7번을 시키더라고, 그 러니 그때는 무법천지죠.처음 정전이 되었을 때는,광산 전체가 정 전이 됐었어요. 그때 문 열고 나가면 발전소에는 밧테리 로다가 비 상등이 딱 들어 오길레,한전 전기 메다를 보니 메다가 안 떠요.근 데 그때 당시 선광 수선부들이 한 40여명이 있었거든요. 아까말했 던 큰 컨베이어 벨트가 있는 거기에서 광석이랑 폐석이랑 골라내요. 근데 정전이 되어서 올 스톱이니까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키스타 임이라고 막 소리를 질러요.조금 있다가 보면 다시 불 들어와요. 그럼 송전을 해요 제일 급 한데가 선광 여자들 일하고 있는 곳에 공 식적으로 제일 먼저 줘야 해요 여자들 건드릴까봐 그리고 각 항 압 기실이나 펌프실에서는 차단기 전원을 안 내리면 과부하 걸리면서 다시 전기가 떨어지니까 전기를 송전한다고 전화연락을 취하고 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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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24> 당시 발전실 배전판 모습 1957년경

사례 6
야간에 전기 송전은 여자들이 일하는 선광장이 최우선이다
3번을 딱 정전되고 나니까 나도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그래서 우리 주임한테 연락하면 해서 연락받은 주임은 전기계장한테 연락 하고 과장한테 까지 전화가 들어가니까 과장이 한번만 더 그러면 발 전기 돌려버려라 그러더라고.하여 송전되고 나서5분정도 되니까 또 정전 시키더라고요.그래서 혼자서 발전기3개 다 돌리는데 제일 잘 터지는 발전기는1호에요.그래서1호만 돌려놓고는 한전에서 자 꾸 저러니까 밧데리는 아껴야 되니까 치워버리고 우리 수전으로 집 어넣어요. 한전 스위치 다 차단 시켜놓고 그래 혼자서 이리 뛰고 저 리 뛰고 해놓으니까 과장이랑 계장이 막 뛰어오더라고요. 다른 데로 송전하지 말고 여자들이 한 50명이 작업하는 선광장에만 먼저 송전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발전실의 작업장은 정전이 30분만 되면, 자동적으로 일어나 서 싹 올라오게 되어있어요 비상이니까.그런데30분 전에 다 올라 왔더라고요.
그때 과장이 발전기를 분리시켜 주더라고요. 과장도 부애가 났지 계장도 부애가 났지 한전에 전화했더니 광업소 기계가 오 작동 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그래서 그 과장이 파워가 있었어요.그래서 한 전전기 쓰지 말자 그러고 발전기3대를 완전 풀 가동 했는데, 1,500kw면 되니까 그냥 쓰자고 해서 일주일동안 했어요. 조수와 같 이 작업실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일했죠.
하도 이런 곤욕을 반복적으로 치르게 되니 광업소에서는 한전전 기 안 쓴다고 하고 다 떼어 가라고 하고 하기도 했다.
자격증은 계장만 갖고 있었지, 그 외에 사람은 자격증이 하나도 없었어요.

사례 7
광석 선별공정 과정
선광과에는 상,중, 하단이 있는데, 상에서는 채광에서 철을 받고, 크게 선별을 하고 난 뒤에,중단과 하단에서 씻고,재차 선별하는 작 업과 오야삥에서 오함마로 8인치 규격의 크기로 잘게 부스는 작업 을 하였다.
오함마로 부슨 광석이 아래로 빠지고 나면 다음부터는 수작업이 종료되고 기계로 작업을 하는 공정인 쪼크레샤로 조금 작게 돌을 빻 고, 그 다음 자이라 라는 큰 맷돌에서 더 잘게 빻은 다음 그 밑에 있는 볼밀기계에 들어가서 분쇄하면 가루는 밑으로 빠지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선별작업을 하게 된다.
그때 당시에 월급은 공무원들보다 조금 더 낫게 받은 것 같다.
교대시간은 갑반이08:0~16:00 /을반이 16:00~24:00 / 병반이 24:00~ 08:00까지 이고 3교대이고 오후 22시부터 06시까지 심야수 당은 기본수당의 1.2배 로테이션 들어가니까 월급의 차이는 없었다.

사례 8
사고자의 시신을 가족에게 어떻게 보여줘요
항내는 위험수당이라고 해서 7~8% 더 주었지만. 콤프레샤는 항외 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 보다 위험수당을 더 주었다.
압기실의 콤프레샤는, 500마력 350마력 125마력짜리가 돌아가는 데 그 깜깜한 곳에 서 G모씨와K모씨는 기계소리가 그렇게 시끄러 워도 깨지 않고 잘 잤다.
굴 안이 자연 통풍이 되는데 통풍이 잘 안 되는 곳은 그 안에 또 환풍기가 또 있어요.넓은데도 있고,2m 되는데도 있는데 사항은 수 항보다 직경이 더 적은 4m가 되는 것이 있고6m가 되는 것이 있 어요. 수항은 처음부터 수직으로 들어가고 사항은 안에서 수직으로 뚫어 있다.
수항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광석이 오르내리는 광석전용이 있 고,사람이 오르내리는 임차전용 이 있는데,광석전용 수항에서 떨 어진 사람은 광석 오르내리는 수항에 발을 헛디뎌서 떨어져서 사망 하였다.
광업소가 놀 적에 일요일 같은 날에 가서 일하는데, 권양공이 권 양기를 내려야 되는데,내리다가 올렸지.그래서 산소통 맨 둘은 옆 으로 떨어져서 쓰러지고 하나는 냅다 올라가니까 뛴다는 게 400m 직 선인 데에서 빠졌지.살점이 다 떨어저서 창고에다가 쌓아놨는데,유 족은 그걸 보여 달라고 했지만 그걸 어떻게 보여줘. 전부다 산산조각 이 나고 말았는데.
양양광업소가 뭐든지 사고가 나게 되면, 높은 사람은 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며 배경이 있는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그걸 알아보고,좀 높은 사람이면 보상을 좀 더 주고,아무것도아닌 사람 은 그냥 적당히 보상해주고 말았으며, 회사에서 선임한 변호사가 있 어서 상대방과 말싸움 하다가 안 되면 조금 더 주더라도 그렇게 했 어요.

사례 9
결혼날짜 받아놓고 일 나 왔던 사람이...
공작명이라는 운반부가 집에서 결혼날짜가 나왔는데, 하루라도 더 벌겠다고 나왔는데 잔치 할 사람이 뭐 하러 나와 가지고 막장에 서 딸딸이라고 있는데 한쪽에서 하면 이쪽으로 떨어지거든 근데 이 사람이 뭔 생각을 하는지 슈트 쪽으로 돌았어. 이쪽으로 가서 둘이 넘겨야 하는데 이 사람이 거기에 없잖아.아니이게뭐 어떻게 되었 는지 거기다가 대고 그 사람이 또 쏟아서 떨어져서 죽었다. 그래서 잔치 지내기로 한 사람이 사람 죽어서 장사를 지냈으니 얼마나 기가 맥히는 일인지...
압기실에서 내다보면 하룻밤에 둘씩 죽어나가요,그럼 경찰서장, 소장,경비원들 오면“아 오늘 또 사람이 죽었구나” 어느 날은 둘이 죽어나가고 또 어느 날에도 하나가 죽어나가고. 감독도 사다리를 타 다가 죽고 그랬다.
어떤 사람이 출근 중에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여자들이 눈이 보였 다 그러면 기분 나쁘니까 그 사람 일하러 나오지 말라고 그래요. 그 래서 사원들이 살던 사택에서도 아침에 여자들이 나오질 않았어.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항장 할 때 유난히 사고가 많았어. 그래서 선 광장에서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으면 좋게 보이기도 했다.

사례 10
눈칫밥 먹는 임시부들
그때 밥도 못 먹을 때인데 광산을 다니니 밥을 먹으니 별천지지. 임시부들은 밥 먹을 때가 없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먹었는데, 임시부 대표와 싸움도 많이 했어요.밥도 상시부 먹는 시간 따로 있고,임시 부는 저 땅 끝에서 빌빌 놀다가 하나 들어와서 먹던가, 아니면 저 구석에서 하이바 깔고 앉아서 먹다가 상시부들이 다 먹으면 거기서 먹고 그랬지요. 물도 임시부들이 물통에 물 받아서 갖다놓고 그랬 다.
그 당시에는 차별이 엄청 심했는데, 상시부는 트럭이나 버스타고 출근을 했지만,임시부들은 걸어 다녔으며,또한 임시부들 에게는 쌀도 주지 않아 나중에 임시부들이 하도 항의하니까 그때부터 옷 도 주고 그랬으며,상시부들은 작업복을 한 벌씩 내 주었는데,임시부 는 바지하나 줄때 있고 윗도리 하나 줄 때 있었다.
광업소에는 영업하는 식당은 꽤 많았으며,정육점이 있었는데,그 래서 사는 것이 좀 풍족하게 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그것 도 채광부만 한 달에 고기 두 근 나누어주고, 임시부들은 고기 전표도 안 나왔다.

경비를 하다가 돈 차이가 나니까 직종을 바꾸고 채광과 항내인 도 목항에 들어가서 일을 했던 그 북한 땅굴 발견한 사람은 수더분하 게 일은 잘했다.

광부사택,영화관,목욕탕,병원,이발소,약방(개인 약방), 당구장 이 있었으며,
공급소는 노무자들의 직번이 있었는데, 1번2번.직번만 대면 공 급소에서 돈이 없어도 물건을 외상으로 살 수 있었고, 쌀도 직 번만 있으면 계속 받을 수 있고 임금에 일정부분 쌀을 신청하면 그 금액 을 제외하고 월급과 쌀을 함께 받았지만, 임시부들에게는 그러한 혜 택이 없었다.
체육행사는1년에 한번 있고,개광기념일(매년7월1일)에 장승분 교 학교 운동장에서 했으며. 광부들을 위한 특별한 위로 행사는 없 었고,체육 행사 때 사은품 없이 경기 상품을 주었으며,막걸리는 회 사에서 많은 지원을 했다.
체육 행사는 축구,씨름,배구,육상 마라톤 등을 했고,가족단위로 했다.
노동조합에 문화부라고 있어서 연극을 초가을에 많이 했다.
광부들이라든지 관리부서에 의한 행사로 광부들의 사기를 돋우어 주었다.


(구술자 서문리 황만식70세)
사례 1
직장예비군 훈련
1968년1월21일 청와대에 무장공비가 침투하자 국가에서는 국민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고자 1968년4월1일 예비역 장병들로 하여금 향 토예비군을 창설하였는데 평시에는 사회생활을 하고 유사시에는 향 토방위를 전담할 비정규군 조직인 예비군을 편성하였고 국가에서 산업현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직장민방위대를 조직하였 는데 양양광업소의 예비군중대장은 경비주임이 담당하였으며 동원 예비군은 군부대에서 실시하는 훈련을 별도로 받지 않았으며 광업 소 일반예비군과 마찬가지로 광업소야외사격훈련장에서년2회사 격훈련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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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25> 당시 사격훈련중인 황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