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鑛夫들의 이야기-창고 자재관리

페이지 정보

조회 2,573회 작성일 2013-04-25 12:38

본문

 

(구술자 서선리 이달형78세)
사례 1
부속품 자재가 1000여 가지
양양항은 1,2,3,4 5번 항까지 있었다.
양양에서 나오는 모든 광석을 운반하는 150마력짜리 권양기가 있 었다.
양양 광업소에서 최초로 레일을 타고 에어로 광석을 퍼 싣는 페이 로다를 사용했다.
페이로다로 레일을 타고 정통을 만들어서 갖다 놓으면 권양기로 끌어 올렸다.
예산 관리실은 양양 광업소에서 사용하는 모든 자재 입출 관리를 한다.
콤프레샤는100마력, 200마력, 600마력(일제, 독일제) 발전기도 100마력부터 600마력 까지 있었다.
부속은 7700가지 정도 되었는데, 자동차 페이로다 등의 부속품의 가짓수와 전기 부속품만 1,000여 가지나 되었다.
항내를 드나드는 차량은 배터리를 이용해서 다녔으며, 항외를 운 행하는 차량은 궤도 위를 다니는 디젤카, 그리고 일반차량은 승용 차, 5톤, 6톤, 9톤차는 몇 대 없었으나, 15톤 차는30여대가있었다.
자재담당은 채광부서도 있고 공부부서도 있고 선광부서 각 부서 에서도 각 각 자재 담당자들이 다 있었고,
전표를 통해서 자재를 받 아갔다. 전표에 도장을 찍어줘야 하는데, 도장이 닳아서 없어질 만큼 바빴 다.
자재창고가 1,2,3,4,5창고까지 있었고, 유류 창고가 하나 있었으 며.크기는약50평정도 있었다.
창고 안에 종류별로 정리를 해 놓고, 이름표를 따로 다 붙여 놓았 고 이름표를 붙이기 위해 야근도 하였다.
각 부서에서 담당자들이 필요에 의한 자재요청을 하면 꼬리표를 붙여서 바로 정리해 놓아 찾아가기 쉽게 만들었다.

사례 2
국회의원들 회계법인이 감사를 나왔다
그 당시 감사는 국회의원들이 회계 법인들을 대동하고 나와서 감 사를 하였다.
회계 감사를 나왔는데, 회계 차액이 2원 발생해서 기합을 주기도 했다. 감사가 끝나고 난 뒤에 그 2원의 차이를 찾기 위해 이틀 밤을 새웠다.

08.jpg
<사진 9-20> 당시 자재창고 모습 2010.5.12
자재관리에는3명이 있었고,1명은 과장이었고, 2명이서 일을 했 다.
자재 관리실 근무자는 자재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부서이 기 때문에 두통에 많이 시달렸다.
막바지에 광업소에서는 자재창고에 재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건을 새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광업소에서는 한국 전력에서 내어주는 전기 뿐 아니라 광업소 자 체에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사용하게끔 장려하였다.
사무차장 밑에 총무과, 노무과, 경리가 있었으며, 예산관리실은 사장 소장 직속 사무실이었다.

사례 3
강릉상고 출신의 경리계 직원들이 구인광고 붙이러 다녔다
사무실 사람들은 강릉상고 출신 경리계통이 많았고, 예산관리실 에서 구인 광고를 고성에서부터 강릉까지 일일이 다니면서 광고지 를 부착했다.
신입 사무직원이 들어오게 되면,교육을 시켰으며,현장 실무자는 사고 예방교육 및 현장 실습을 하였다.
구인 광고 부착 후 홍천하고 고성사람들이 많이 왔다.
퇴직할 즈음에 광업소에서 울산으로 여행 겸 산업시찰 등을 시켜 줌.
또3일간 경주 시찰을 함.
광업소가 사람이 한창 많을 때는 노동자만 1600명 까지 됐다.

사례 4
50인총의 유래
50인총이 탑동에 들어가게 되면 대밭 골로 가는 길이 있고 진골 로 가는 길 양 갈래로 나눠져 있다. 좌측 길로 들어가게 되면 지금 양주 개발에서 한 500m 가면,고심철 이라고 하는데 가 있는데,옛 날 할아버지들이 쇳돌을 캐가지고 흑간리(거문간)에 올라가서 안산 절터에 좋은 물이 흐르는데 그 물가에서 쇠를 녹여가지고 나온 곳이 다.다시말하면풀무간으로 사용하는 광산을 개발하기 전부터 제일 먼저 뚫은 굴이라고 한다.
왜 50인총이냐고 하냐면, 시대는 알 수 없는데 광부들이 쇳돌(광 석)을 캐러 패랭이를50개 벗어 놓고 굴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굴이 무너지면서 사람이 다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굴을 50인총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