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철광산의 문화사-2

鑛夫들의 이야기-태평실 및 선광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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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373회 작성일 2013-04-25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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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 연창리 백태균82세)
사례 1
반공포로 출신이 근무한 태평실
평안남도 덕촌 출신으로 반공포로로 나와서 57년도부터 군사 혁 명 때 까지 재직
55년도 양양광업소 초대 사장 백홍석(평안남도 덕천 출신)이 전역 과 동시에 상공부에서 초대 사장으로 왔다.
55, 56년에 철을 캐기 시작했고, 일본에 유태화가 우리나라 대사 인데, 그때는 철을 일본사람들이 사가지 않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기 만 하지 수출은 하지 못했다.
일본 미쓰비시에 수출을 하지 못 하게 되어 문을 닫을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었으나 수출 활로가 없어서 사람을 줄였다.
영주에서 노무자 100명을 받았지만, 임금을 돈이 아닌 쌀로 내주 었다. 58~9년도에 다시 수출활로를 찾았으며,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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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25> 당시 철광석을 하역하는 모습 1957년경
한때에는 선광장에서 철을 실은 차가 태평실로 오면 무게를 달아 보고 톤수가 미달되거나 초과되면 태평실 앞에 있는 철을 어레이철 사로 만든 삼태기]로 퍼 담아서 차에다 발판을 놓고 타고 내리면서 규정 톤수를 채워서 보냈는데 나중에는 그냥 무게만 달아서 차를 보 냈다. 철은 통상 한 학구에 2Ton 정도 나갔다.
차 드나드는 만표를 했고 20톤 짜리 태평으로 차량 무게 측정을 하였다.태평실에서 부조리에 대한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사례 2
대포 외항에 화물선이 좌초되다
태평실은 2교대. 12시까지8시간 근무한다. 늦게 들어와도 저녁 6시면 끝이 났고 태평실과 연관이 있는 속초 사무소도 광석 취급하 는 곳이 있었는데 그 당시,속초 출장소에 하역을 하고,배에 실어서 묵호까지 가는 루트와, 속초 부두에서 대포항까지 작은 배에 철을 싣고,본선(일본가는 배)에 적재를 했다.
대포 앞 바다에 철을 싣는 배(5000Ton)가 암초에 걸려서 물에 빠 진 적이 있었다.


(구술자 서문리 한종성83세)
사례 1
이북서 피난 나온 노무자들
회사에서 국가 유공자라고 해서 입사하게 되었다. 내 몸이 좀 불 편하니까 업무에 있어서 일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자리로 옮겨주니 까,일하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상이군인 경비들과 노무자들을 포함해서 2~30명이 같이 근무했다.
광업소 일하면서 노동자들이 월급일 이전에 가불을 해가서 술집 에서 술 받아먹고,그러다가 돈 없으면 가서 외상으로 먹고,다음 월 급날 되면 외상값 갚 거라 다시 가불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많았다.

사례 2
남녀가 눈이 맞아 소문이
수선부들이 선별하는 걸 그땐 손으로 다 골라냈다. 폐석을 여자들 양쪽에 마주서서 폐석을 골라내지만 남자들도 그 모퉁이에서 벨트 를 조정하는 일을 하면서 서로 어울려 일을 했다.그속에서 남여가 서로 눈이 맞아 누구누구와 연애한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난다. 이 북사람들도 더러 있었고,당시 피난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아군들이 압록강 까지 갔다가 후퇴할 적에 대부분 휩쓸려 나온 사람들인데 월남한 사람들도 여기 광산 사람들과 똑같이 일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