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문화재 / 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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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56회 작성일 2014-04-2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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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金石文)은 금속이나 돌로 만든 각종 유물에 있는 명문(銘文)을 일컫는 것으로 재료와 내 용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재료에 따라 금석문은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으로 나누어진다. 금문 은 금속제의 용기·악기·무기·화폐·인장(印章)·경감(鏡鑑)·조상(造像)·범종(梵鐘)·도량형 등에 주출(鑄出)되었거나 새겨진 문자이다. 석문은 석제의 비(碑)·묘지(墓誌)·조상 등에 새겨진 문자이다. 금문은 중국의 옛 동기(銅器)에서 볼 수 있는 명문이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반면, 서 양에서는 그리스의 비문(碑文)과 묘지명(墓誌銘)이 유명하다. 그러나 동양에서도 석고(石鼓)나 진 (秦)나라 각석(刻石)을 비롯하여 역대의 비문·묘지명·조상비(造像碑) 등에 걸친 석문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금석문은 그 출처나 전해 내려오는 사정이 분명한 것일수록 가치가 크다. 이는 정확 한 문헌이 많지 못한 고대사의 해명에 기여하며, 때로는 문헌상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우리 군에도 많은 금석문이 보존되어 있는데, 자료로는『애향의등불』(내 고장의 비, 양양문화원), 『양양군의 역사와 문화 유적』(1994년, 강릉대학교 박물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의 전통 석조물 도감』(2008년, 양양문화원) 등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선정비(善政碑)]

 

 

1) 부사권진선정비(府使權善政碑)

 

권진은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으로 현(晛)의 아들로 태어나 159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수 원부사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한성판윤에 올랐다. 1610년 2월부터 헌부(憲府)의 계(啓)로 파직되는 1611년 5월까지 양양부사로 재직중 혹정(酷政)을 하였기에 부민이 먼저 선정비를 건립 하여 그의 뜻을 전환시키려고 하였더니 부사께서는 이 비석을 본 후 과연 일기호전(一機好戰)하여 청렴관후(淸廉寬厚) 하여져서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유도술로써 이루어진 이 비는 참으로 선정 비가 되었다고 한다. 1623년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승차하였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연 루되어 양산에 유배 후 이듬해 참형 당하였다.

비(碑)는 비갓이 없어 둥글게 마감된 것이 특징이며 현재 현산공원에 위치해 있다.

 

 

 

 

2) 부사유공항선정비(府使柳公恒善政碑)

 

1633년 5월에 부임하여 1635년에 고만(考滿)으로 이임한 부사 유항의 선정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를 세웠다. 현재 선정비는 현산공원의 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에 있으며 연화문의 비갓이 특색이다.

 

 

 

 

3) 부사강공호청덕선정영세불망비(府使姜公鎬淸德善政永世不忘碑)

 

강호청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조선 효종 때의 문신이다. 1642년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역 임하였다. 1655년 장영헌납(掌令獻納)을 거쳐 1657년에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에 승차 하였다. 1660년 8월에 양양부사로 부임되고, 1664년 정월에 장령(掌令)에 제수되었다. 1668년 승 지(承旨)에 오르고, 1669년에는 강원도의 각 지역이 강등되었을 때 원양도(原襄道) 관찰사(觀察 使)에 제수되었다. 이때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비(碑)를 세웠으며, 연화문의 비갓이 특징이며 현산 공원에 위치해 있다.

 

 

 

 

4) 현감한공명상청덕선영세불망비(縣監韓公命相淸德善政永世不忘碑)

 

한명상은 1691년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여 1692년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제수되면서 이 임하였다. 숙종 신미(辛未)년에 부임한 이래 선정(善政)을 펼쳐 이에 현(縣)의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웠으며, 현재 선정비는 현산공원의 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에 있으며, 구름무늬 비갓이 있다.

 

 

 

 

5) 부사양공중하애민선정비(府使梁公重廈愛民善政碑)

 

양중하는 숙종 때인 임오년(1702년) 6월 양양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여 1705년 2월에 사임하 였다. 재임기간 중 선정(善政)을 펼친 것에 감사한 관민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현재 선정비는 현산 공원의 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에 위치해 있으며, 비갓이 없이 둥글게 마무리 지은 것이 특징이 다.

 

 

 

 

6) 부사채공팽윤선정비(府使蔡公彭胤善政碑)

 

채팽윤은 1722년 2월 양양부사로 부임하고 1724년 11월에 승지(承旨)로 승차하였다. 재임기간 동안 정사(政事)에 탁월하고 문교(文敎)를 진흥시켜 매년 시절(好時節)에 청년을 동반 하여 학사(學舍)나 관루(官樓) 같은 곳에서 글을 짓고 대제사(大堤詞)를 작곡하였으며 문형(文衡)으로까지 칭송되었다. 동해묘(東海廟)를 중수하고 백천문(百川門) 및 현산정(峴山亭) 현판을 썼다. 선정비는 정조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상지이십사계미중건(上之二十四癸未重建)으로 나타 나는 점으로 보아 순조 24년(1823)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89년 4월 12일 당시 양양읍사무 소 정원에서 발굴되었으며 현재의 위치인 현산공원으로 이전되어 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의 우측 에 보존되어 있다.

 

 

 

 

7) 부사정공필동진기견역선정비(府使鄭公必東賑飢益蜀役善政碑)

 

정필동은 숙종 32년(1706년) 3월에 부임하여 동왕 33년에 사직하였다. 부임 이래 풍속을 교화 하고 기근을 구휼하였으며 부역을 감소시켜 민폐를 근절하는 선정을 베풀어 이에 선정비를 세웠 다. 현재 선정비는 현산공원의 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에 보존되고 있다.

 

 

 

 

8) 부사정공기풍선정비(府使鄭公基豊善政碑)

 

정기풍은 헌종 14년(1848년)에 부임하여 철종 1년(1850년) 6월에 병조(兵曹)에 승차한 사람이 다. 현재 선정비는 현산공원 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에 위치해 있으며, 구름모양의 비갓이 특징이 다. 비문의 훼손이 심하여 그의 공적(功績)을 알아보기 어렵다.

 

 

 

 

9) 부사김공연청덕선진불망비(府使金公演淸德善賑不忘碑)

 

김연청은 숙종 23년(1697년) 2월에 부임하여 다음해 5월에 사임하였다. 재임 동안 향교를 면옥 치(綿玉峙: 현 양양군 면옥치리)로 이전할 것을 상신하여 허락을 받기도 했으며, 부임 이래 영세민 을 구제하고 장학에 힘썼던 바 이에 숙종 26년(1700년)에 선정비를 세웠으며 현재 현산공원의 선 정비군지(善政碑群址)에 위치해 있다.

 

 

 

 

10) 감사유공득일영세불망비(監司兪公得一永世不忘碑)

 

감사 유득일은 영조 33년(1757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같은 해 사임하였다. 현산공원의 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에 위치해 있으나 비(碑)의 마모가 심하여 그의 업적을 확인 할 수 없다.

 

 

 

 

11) 관찰사강공선선진견역영세불망비(觀察使姜公銑善賑益蜀役永世不忘碑)

 

관찰사 강선은 영조 41년(1765년) 4월 도승지에서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고 다음해 4월 다시 도승지로 이임하였다. 재임 동안 빈민의 구휼과 부역 감소에 노력한 바 이에 선정비를 세웠다. 현재 선정비는 현산공원의 선정비군지 (善政碑群址)에 위치해 있다.

 

 

 

 

12) 부사이공광식영세불망비(府使李公光埴永世不忘碑)

 

이광식은 정조 7년(1783년)에 진사, 순조 3년(180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좌랑(兵曹佐郞) 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및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고 동왕 8년(1808년)에 양양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 헌납(獻納)을 역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 및 홍문관제학(弘文舍官提 學) 벼슬을 하였다. 신중한 언행으로 원만한 행정을 펼치고 선정을 베풀어 이에 선정비를 세웠다. 현산공원 선정비 중에서 유일하게 양각된 철비(鐵碑)이다.

 

 

 

 

13) 군수겸사령관조공관현불망비(郡守兼司令官趙公觀顯不忘碑)

 

군수 조관현은 건양(建陽) 1년(1896년) 6월에 부임하여 광무(光武) 4년(1900년)에 퇴임하였다. 재임기간 중 토비중대장(討匪中隊長)을 겸임하면서 의병을 진압하였다. 기념비는 현재 선정비를 모아 놓은 현산공원에 위치해 있으나 비신의 반이 묻혀 비문을 확인할 수 없었다.

 

 

 

 

14) 도호부사임후목청덕선정비(都護府使林候穆淸德善政碑)

 

세종 15년 계축(1433년) 윤 8월 2일 세종께서 임목(林穆)을 친히 불러 명하기를“도내(道內)가 근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의 생계가 염려되니 은혜를 베풀고 구제해 주기에 마음을 극진히 하여 굶 주리는 백성이 없게 하고, 또 형벌하는 일을 삼가 행하라”하심에 임지(양양도호부)에서 명을 어기 지 않고 베풀었으므로 선정비를 세웠으며 현재 현산공원에 위치해 있다.

 

 

 

 

15) 부사류경시선정비(府使柳敬時善政碑)

 

류경시는 영조 3년 정미(1727년)에 부임하여 특히 교학(敎學)에 힘쓰시면서 선정하였으므로 퇴 임 후 양양부민이 힘을 모아 선정비를 세웠다. 한편 뜻 있는 갸륵한 인사들이 부민의 정이 어린 오 동나무로 만든 여섯 줄 거문고인 양양금(襄陽琴)을 만들어 기념으로 증정한 바 있다. 경상북도 안 동시 소재『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에 양양금(襄陽琴)이 경북도유형문화재 제314호로 창랑보[(滄浪譜):악보]와 함께 전시 중이다.

 

 

 

 

16) 부사권공중민선정불망비(府使權公中敏善政不忘碑)

 

권중민은 순조 23년 계미(1823년) 3월에 양양부사로 부임하여 2년 후인 1825년 6월에 사임하 였다. 계미년 부임 이래 법으로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로지 백성을 위해 공평하게 다스리면서 특별히 부민을 다스렸으므로, 부민들의 정성으로 선정불망비를 세웠다. 현재는 현산 공원의‘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뒷줄 우측에서 여섯 번째에 세워져있다.

 

 

 

 

17) 부사이공경용인정비(府使李公景容仁政碑) : 몰자비(沒子碑)

 

이경용은 인조 8년 경오(1630년) 9월에 부임하여 2년 후인 1632년 11월에 전라도감사를 제수 받고 양양에서 떠나셨다. 양양부사로 재임당시 어질게 정사를 펼쳤으므로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하 여 부민의 정성으로‘인정비(仁政碑)’를 세웠는데 장구한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풍마우세(風磨雨 洗)하여 문자가 인멸(湮滅)되어 그 기록을 알 수 없으므로 부사 안경운(安慶運)이 농언(弄言)으로 몰자비(沒子碑)라 하였던 것이다. 그후 중구동칭(衆口同稱)으로 몰자비가 되고 알았다. 현재 이 인 정비는 현산공원의‘선정비군지(善政碑群址)’뒷줄 우측에서 아홉 번째에 세워져있다.

 

 

 

 

18) 타루비(墮淚碑)

 

이상일(李尙逸) 부사의 선정비이다. 조선조(朝鮮朝) 인조 22년 갑신(1644년) 7월에 도임하여 5 년간 양양부사로 재임하면서 선정하였으므로 당시 군민들이 선정비를 양양읍내 동편 구교리와 연 창리 사이 길가에 세워 기념하였으며 그 후 백성들은 궁할 때나 억울한 일이 있을 때에 이 비석을 안고 애걸하였다니 이부사가 베푼 선정의 덕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이상일 부사의 선정비를 타루비라 일컫는 것은 중국 진(晉)나라 무제(武帝) 때의 양호(羊祜)가 일찍이 양양(襄陽)에 있을 때 에 늘 현산(峴山)에 올라가 쉬곤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에 백성들이 그 자리에 비(碑)를 세우고 세 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는데, 그 비를 보면 모두 눈물을 흘렀다고 하여 타루비(墮淚碑)라 부른 데 서 연유하였다. 지금 이 비석은 현산공원에 옮겨져 있는데 풍화에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

 

 

 

 

19) 김정순선생교학송덕기념비(金定淳先生敎學頌德紀念碑)

 

개화초기에 현산 학원에서 부국강병을 역설하였으며 한성사범학교 졸업후에는 안동, 양양등지 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여자 교장이 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양양에서 양양지방 인민위원장을 역임한 후 한국전쟁 이후 작고하였다. 이 같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송덕비를 세웠으며 현산공원에 위치해 있다.

 

 

 

 

20) 대풍수재조난자위도비(大風水災遭難者慰悼碑)

 

1936년 7월 11일 양양지방의 대홍수를 양양 사람들은‘병자년 포락(浦落)’이라고 말할 만큼 엄 청난 비가 왔었다고 한다. 1일 강수량이 300㎜가량으로 강릉·양양·삼척등 영동지역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1936년 9월 4일자‘조선일조’보도에 의하면 강릉에서만 1,000여 명, 양양지역에서 공 식사망자가 584명, 비공식적으로 1,000여 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한다. 그 중에서도 양양은 서 면 장리 당상동, 범부리, 수리, 용천리, 손양면 석계리, 양양면의 월리, 남문리, 서문리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 당시의 참변을 영원히 위로하고자 서문리로 가는 노변에 위도비를 세웠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지금의 제방은 병자년 대홍수가 있은 후 1938년에 재차 견고한 축방을 하여 수해의 우려는 없게 되었다. 현재 현산공원에 위치해 있는데 비문과 휘호는 원창희(元昌喜)의 소 작이다.

 

 

 

 

21) 부사임공오상선정비(府使任公五常善政碑)

 

임오상은 철종 2년(1851년) 통천군수로 있다가 양양부사로 부임하였다. 동왕 6년(1855년) 맹산 군수를 끝으로 사임하였다. 영남에서 대흉해를 당했을 때 조정에 구제를 위한 방책을 건의하여 양 양군에는 대두 천석(大豆千石)을 배정받는데 힘썼으며, 부사가 도에 친히 상서하여 이재민들이 추 곡으로 납부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직단(社稷壇), 국적고(國籍庫), 취산루, 남문루 등을 중수한 사 실을 보고받은 어사 강난형(御使姜蘭衡)은 이에 말(馬)을 내주어 치하하였다. 그 공을 기리기 위해 선정비를 세웠다. 현재 비(碑)는 서면 오색리 망월사 입구에 있다.

 

 

 

 

22) 면장김남원선정비(面長金南元善政碑)

 

8·15광복 이후 1952년까지 지금의 양양군 서면 일부가 38°선 이남일 때 강릉군 신서면에 편 입되어 있을 때 신서면장을 7년간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푼 공덕으로 1952년 5월 양양군 서면 서림리 서면출장소 옆에 건립하였다.

 

 

 

 

23) 관찰사조공학연선정비(觀察使趙公鶴年善政碑)

 

조학년은 영조 12년(1736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판결사에 승차한 후, 동왕 18년(1742년) 강 릉 부사로 부임하여 경포대 중수 및 상량문을 지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영조 22년(1746년)에 영월부사로 부임하였다가 고을의 전염병으로 사퇴하고 말았다. 경사(經史)에 밝고 시부(詩賦) 에 뛰어났으며 술을 즐겼다고한다. 선정비에는‘조찰민은 교구환폐(照察民隱矯還弊)’라고 하여 각 종 민의(民意)를 살피는 가운데 특히 환곡(還穀)의 폐해를 줄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부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碑)로 현남면 시변리에 위치해 있다.

 

 

 

 

24) 관찰사신공응호영세불망비(觀察使申公應湖永世不忘碑)

 

관찰사 신응호(1804~1899년)는 조선 고종 때의 문신이다. 철종 3년(1852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 등을 거쳐 대사헌,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 다. 대원군에 의해 우의정에 올랐으나 사퇴한 후, 좌의정에 올라 봉조하(奉朝賀) 신분으로 청나라 를 다녀오기도 했다. 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비(碑)의 좌우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글이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비석의 상단부에 원형문양을 넣은 비갓형상이 새겨져 있고 현남면 시변리에 위치해 있다.

 

 

 

 

25) 부사심공의진영세불망비(府使沈公宜晋永世不忘碑)

 

심의진은 청송 사람으로 면천군수를 역임하고 헌종 2년(1836년) 12월에 부임하여 동왕 5년까지 재임하였다. 부사의 공적은 비(碑)의 마모가 심하여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현남면 시변리 에 위치해 있다.

 

 

 

 

26) 부사조공진상영세불망비(府使趙公鎭常永世不忘碑)

 

조진상은 1842년 12월 익산군수로 있다가 양양부사로 부임하였다. 1846년 12월 영변(寧邊)으 로 이배(移拜)되었다. 공의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휘(諱)는 경규(景逵) 아들은 통덕랑(通 德郞)이요 휘(諱)는 재형(載)이다. 조선조 영조조(英祖朝)에 (1760년경) 양양부사로 재임 중에 선 정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니 공도 있고 열의도 있어 후대로 하여금 잊지 않기 위한 뜻으로 이 비를 현남면 시변리에 세웠다.

 

 

 

 

27) 부사박00선정비(府使朴00善政碑)

 

현남면 시변리에 소재하고 있으나 비의 마모가 심하여 이름 확인할 수가 없다.

 

 

 

 

28) 가선대부중추부사겸오위장정원기불망비(嘉善大夫中樞府事兼五衛將鄭元基不忘碑)

 

철종 10년(1859년) 3월 산불로 양양부에 551여 호의 민가가 소실되고 이재민이 3,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그 피해가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원기와 성균관 진사였던 그의 아들과 함께 백미 천석과 현금 천냥을 군내 이재민들에게 내주어 구휼했다. 주민들이 이 은혜를 철종 임금께 상소하 여 철종 11년(1860년) 철비(鐵碑)를 하사하고 그 공적을 치하했다. 비(碑)와 비각(碑閣)은 강현면 석교리에 있다가 1972년 8월 1일 후손인 정주화가 현재의 자리(양양읍 조산리)로 옮겼다.

 

 

 

 

29) 우인근선생공적불망비(禹仁根先生功績不忘碑)

 

1958년 4월 1일부터 1971년 2월 24일까지 현성고등공민학교에 근무하였던 우인근 선생의 공 로를 기리기 위한 졸업생들이 세웠다. 현재 현북면 어성전리에 위치해 있다.

 

 

 

 

30) 석포선생경주김공두경씨비(石圃先生慶州金公斗經氏碑)

 

현북면 어성전리에 소재하며, 비의 전면에는 석포선생경주김공두경씨비(石圃先生慶州金公斗經 氏碑)라고 쓰여 있으며 후면에는 고종정사입의실임인사십육년 문인십명중대오명부록(高宗丁巳立 議室任寅四十六年文人十名中代五名附錄)과 15명의 좌목이 기록되어 있다. 1917년에 입의하여 1962년에 세워진 비(碑)이다. 문인(門人)과 10명과 중대(中代) 5명이 동참하여 세운 비(碑)이다.

 

 

 

 

31) 엄주석영세기념비(嚴柱石永世紀念碑)

 

엄주석의 호는 황헌(篁軒)이다. 성품이 온후하고 무실근검(務實勤儉)하여 요부성가(饒富成家)하 였고 빈궁(貧窮)한 사람에게 많은 재화를 나눔으로써 관부로부터 표창하고 입비기념(立碑紀念)하 였다. 기념비는 현남면 광진리 광진고개에 있었다.

 

 

 

 

32) 궁내부주사채공상필시혜비(宮內府主事蔡公尙弼施惠碑)

 

채상필은 현남면 광진리에 소재하며 옛 7번 국도변에 있으며 대나무 숲과 잡목에 가려져 있어 쉽게 보이지 않는다. 바로 앞에는 지주(地主) 정호경의 자선비 (慈善碑)가 있다. 비(碑)의 마모가 심하여 그의 공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비의 측면에는‘소화십육년일월십오일 (昭和拾六年壹月拾五日)’이 새겨져 있어 건립 연대가 1941년임을 알 수 있다.

 

 

 

 

33) 지주정호경자선비(地主鄭鎬璟慈善碑)

 

만호(晩湖) 초계정공호경선생(草溪鄭公鎬璟先生)은 우리 동방에서 덕망이 높고 말솜씨가 좋아 공도 있고 열의도 있었다. 몸가짐은 꾸밈새 없이 순박하여 타인의 모범이 되었고 사람들에게 재화 와 환난이 있으면 늘 따뜻한 정을 베풀어 구제하니 면민들은 그 덕을 잊지 않고 모두 추천하여 현 남면장에 뽑혔다. 1928년부터 다음해까지 재임 중 큰 가뭄으로 인하여 큰 흉년이 들어 공의 소작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어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현남면 광진리에 이 비를 세웠다.

 

 

 

 

34) 정용화선덕비(鄭龍和善德碑)

 

강릉에서 대대로 살았다. 공은 성품이 어질고 무던하여 착한 행실을 하며 스스로 배우며 행하였 다. 그러나 때의 운수가 천지자연의 조화에 맞지 않아 변화하여 1928년부터 다음해까지 2년에 걸 쳐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공의 소작인들로 하여금 재해가 많다는 말이 있어 사람을 시켜 실지로 그곳에 가서 조사하여 전량 감해 주었다. 그 후 은혜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공의 너그러운 공을 길 이 후세에 전하자는 뜻으로 비석에 오래도록 잊지 않기 위하여 기록을 실어 현남면 원포리에 세웠 다.

 

 

 

 

35) 군수이건웅송덕비(郡守李建雄公頁德碑)

 

군수 이건웅은 1965년 3월 27일에 부임하여 1967년 12월 1일에 이임하였다. 재임 기간 중이던 1967년에 양양면 송현리(당시 행정구역)에 양수장을 설치하여 송현·수여의 밭밤들과 가평의 가 평들, 그리고 동면평의 넓은 경지를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이에 그의 공 을 기리기 위하여 1967년 4월에 비(碑)를 세워 현재 송현리 양수장 입구에 있다.

 

 

 

 

36) 군수이건웅(李建雄) 유공비(고노동 농로개설 유공비)

 

군수 이건웅은 1965년 3월 27일에 부임하여 1967년 12월 1일에 이임하였다. 양양군 양양읍 월 리 고노동에 농로를 개발한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67년 5월에 양양읍 월리에 이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