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전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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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43회 작성일 2014-04-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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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마대 (遞馬臺)

 

상운관의 동쪽으로 내려다보면 왼편으로 바다가 임하고 오른편으로 연포를 낀 백사창송 넓 은 곳에 중앙으로 큰 길이 통하고 있는 곳이 체마대이다. 이 대는 조선조 상운역시대에 우 마가 교체하던 곳이다. 물론 그 시대에 찰방이 주차(駐箚) 하고 수의사도(繡衣使道)가 내려 홍백패(紅白牌)가 날릴적에 산천초목이 벌벌 떠는 듯 이대에서 위풍이 선듯선듯 하였을 것 이다. 그런데 이것이 시대가 옮겨지고 역제도가 철페된 오늘날의 사람으로서는 이 대의 이 름조차 기억할 수 없다. 신설된 동해철도 연변에 버려진 채 비오고 바람 찬 긴 세월을 지키 는 동안 무정한 봄풀이 폐허의 눈물을 저어낼 뿐이다.

 

 

 

 

 

관덕정 (觀德亭)

 

고월산 줄기가 동으로 수여리 뒤를 싸고 흘렀다. 바로 양양에 대가인 흥덕가댁 뒤 산록이 다. 뒤로는 남대천을 등에 지고 앞으로는 동면 평야가 놓였으며 동으로는 오봉과 수산봉수 대를 가까이 바라보고 서로는 구탄봉이 내려다 본다.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수백년동안 자 양해오는 우로의 자연완부를 받으면서 울울창창하여 자연정을 이루어서 경색도 청숙하지 만 조선시대에 예인재사(藝人才士)들이 모여들어 궁예를 습득하던 수도장이다. 논어에“군자무소쟁야 기쟁야일군자(君子無所爭也其爭也一君子)”라 하였으니 여기에는 가 히 덕을 볼 수 있는 것이라 해서 정의 이름을 관덕정이라 한 것이지만 왜적이 우리나라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내정을 간섭하며 오영문군사 (五營門軍士)를 해산하던 당시 한 국인의 궁예술까지 금지하는 바람에 폐지되어 빈 정자로만 내려오다가 약50년 전에 이 정 송까지도 없어지고 지금은 그 유지만 남아 있다.

 

 

 

 

 

수산굴암자 (水山窟庵子)

 

손양면에서 정동으로 4㎞지점의 수산진 봉수대 아래에 있다. 남쪽으로 하조대를 바라볼 수 있으며 북쪽으로 오봉을 바라보고 있다. 육지로는 수산진의 청룡 끝이다. 산을 타고 바로 내려갈 수도 있지만, 낙산사를 구경하고 일엽편주로 전진바다를 떠나 오봉을 바로보고 해 협을 끼고 돌아 절벽만장하에 다다르면 좌우로 병풍과 같은 석벽이 삭립하고 중간으로 굴 이 통하여 파도가 몰아 들어갔다가 석면에 마주치고 다시 돌아나오니 마치 낙산사 관음굴 을 보는 것과 흡사하다.

관동으로 모여드는 관광객들이 낙산사 석굴암을 보고는 반드시 여기를 찾게 되지만

특히 조선시대에 문장이던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강원감사로서 영동을 순시하다가 이 석 굴을 찾아보고는 노룡잠처운개굴 오수격시해월성[(老龍潛處雲開掘鰲水激時海月聲) : 늙은 용이 잠기는 곳에 구름은 굴을 열었고, 놀란 물이 부딪칠 때에 바다달의 소리로다]이라는 시구(詩句)를 토(吐)한 일까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