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선림원지 (禪林院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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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970회 작성일 2014-04-2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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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지 (禪林院趾)

해설 이철수

 

1. 양양의 불교 문화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이다.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년)에 신라는 법 흥왕 15년(582년)에 이차돈의 순교한 후 공인되었음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이 렇듯 삼국시대 4세기 후반부터 불교가 수용되었는데 처음에 삼국이 그들의 왕도에서 포교되면서 점차 각 지 방으로 알려져 전파되었다. 양양지역 불교의 전래는 신라 불교가 들어왔다. 고대부터 근현대까지의 문헌들에 의하면 낙산사, 영혈사, 명주사, 신흥사, 진전사 등 28개의 사찰이 유명한 대사들의 창건 유래를 가지고 창건 되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대부분 폐사되고 현재까지 법등을 밝히는 사찰은 많지 않다.

 

 

2. 선림원지 -沙林寺(사림사) 강원도 기념물 53호

양양군 서면 황이리 미천골에 있었던 사찰로 일명 사림사라고도 부르는데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선림원 절터 조사에 의하면 해인사를 창건 한 순응법사 등이 창업하였음을 알 수 있고 연대 는 신라 애장왕 5년(804년)으로 추정된다. 이는 1948년 10월경 이 절터에서 숯을 굽던 사람들에 의해 신라시대의 범종이 출토되었으며 이 범종의 주조연대가 애장왕 5년으로 밝혀져 이 절도 이때 에 창건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범종은〔貞元(정 원) 二十年銅鐘(동종)〕으로 알려져있는데 1949년 11월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져 사용하다 6.25전쟁때 소실되어 여러조각으로 파손된채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곳이 38선의 접경이므로 조사 후 범종만 옮겨왔을 뿐 조사연구를 하지 못하다가 1965년 수복지구의 문화재 실태조사를 진행하던 중 이곳의 유적 유물을 발견 조사하여 흩어진 유물들을 원위치로 옮 겨놓았다. 도괴된 유물들을 수습하여 3층석탑(보물 444호), 석등(보물 445호),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 홍각선사부도(보물 447호) 등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원위치에 보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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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당시에 이 절은 화엄종의 사찰이었는데 그후 경문왕 무렵에 弘覺禪師(홍각선사)가 이 절에 주석하게 되었고 헌강왕(875~885년)때 크게 중창하여 선종의 도량으로 많은 교화를 행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홍각선사는 신라 헌강왕 때의 이름난 선사이나 그의 탄생과 입적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홍각선사에 관한 모든 사항이 적혀있는 석비가 미천골의 절터에 있었으나 파손된 상태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碑 題(비제)는 弘覺禪師碑銘(홍각선사비명)이라 하였는데 碑身(비신)이 파손되고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그러 나 홍각선사가 書史(서사)에 해박하며 불경을 깊이 연구한 뒤 영산의 선석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하였고 수 양이 깊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법도를 구하였던 당시의 고승이었다는 사실만은 판독하여 알 수 있다. 1985년 동국대학교 발굴조사단의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로 추정되는 정면 3칸, 측면 4칸의 거눌지가 확인 되었다. 9세기경 산사태로 사찰이 매몰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절터는 1982년 11월 3일 강원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다.

 

 

3. 3층석탑(보물 444호)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하고 있으며 석 탑의 전체 높이는 약 5m , 2중의 기단 위에 3층 의 탑신부를 올리고 상륜부가 일부 남아 있는데 상부 기단의 면석에 조각된 팔부신중상을 비롯한 전체적인 구성과 조형이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 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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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부는 2중으로 구성하였고 하부기단의 지대 석은 모두 6매의 판석으로 짰으며 하대중석갑석 은 양 끝에 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둔 형식으로 상부기단과 동일한 구성을 보이는데 하대갑석은 6 매의 판석으로 상부는 둥근 형태로 2단으로 깎아 상층기단의 중석을 바로 받고 있다.

 

상부기단 중석의 면석에는 각 면에 구름위에 앉아있는 팔부신중상을 2구씩 돋을새김하였고, 상대갑석은 4 매의 판석으로 아래에는 부연을 조각하고 상면에는 하대갑석과는 달리 각진 형태로 2단을 깎아 탑신석을 바 로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1석으로 쌓았고 탑신에는 모두 기단부 중석과 마찬가지로 양모서리는 기둥형식으로 깎았고 옥개석은 받침을 5단으로 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면서 추녀끝에서 약간 올라가면서 낙수면은 완만한 물매를 이루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추녀부분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방형의 노반 위에 일부 남아 있는 원형의 보륜을 올렸는데 노반의 중앙에는 직경 10.5cm의 찰주공이 있다. 상단부에 새겨진 팔부신중상은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유사한 조형을 보여준다.

 

 

4. 석등(보물 445호)

팔각형을 기본으로 기단부가 상·중·하대로 구성된 통일신라시대 팔각석등으로 1966년 9월 21일 보물제445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는 2.92cm인 이 석등은 4 매의 사각형 지대석 위에 기단부의 상·중·하대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으며 중대 부분이 북 모양의 竿柱(간주)로 장식된 고복형 석등으로 상부에 화사석과 옥개석 그리고 보주를 제 대로 갖추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팔각석등의 기본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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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부의 하대는 맨 아래 팔각형으로 각 면에 안상을 음각 한 하대받침을 놓고 그 위에 중앙에 귀꽃 장식을 한 8개의 복 련을 조각하고 복련상부는 1단 중인 형태로 구름모양을 새기 고 다시 1단 중인 팔각형 중대받침을 모두 1개의 석재로 구성 하였다. 중대는 중간부분에 띠를 두르고 위 아래로 원형형태 의 단을 구분하며 넓혀가는 고복형으로 중간에 타원형 꽃잎 이 8곳에 배치된 띠를 두르고 위는 대칭적인 연화판을 새겼 고 위 아래의 간석 상·하단에는 권운문이 있으며 상대석에는 복판팔엽의 앙련이 있다. 상대석 상부에는 팔각의 굄대와 화사받침을 2단으로 구성하고 있다. 화사석은 8각 형으로 4개의 장방형 화창을 뚫었으며 화창을 비롯한 팔각형의 각 면 아래에는 가로로 장방형 형태로 액을 마련하고 그 안에 안상을 새겼다. 옥개석은 팔각지붕형식으로 처마선이 직선화되고 낙수면이 급한 물매를 이 루고 있으며 전각에는 화려한 귀꽃을 장식했는데 일부는 없어진 상태다. 팔각의 합각은 사선이 뚜렷하고 옥 개석 상부에는 복연무늬를 새겼고 그 위에 상륜부를 올렸는데 상륜부는 작은 원형의 연화대석만이 남아 있 다. 석등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사한 양식을 보이는 석등으로 전북 임실 용암리 석등(보물 제267호),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전남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호)이 있어 이들 석등이 9세기에 조 성된 것으로 본다. 특히 891년에 조성된 개선사 석등과는 아주 유사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5. 홍각선사탑비(보물 446호)

거북모양의 귀부와 용이 어우러진 모양의 비석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 있고 비신은 파괴된 홍각선사탑비는 비문을 통해 신라 헌강왕 12년(886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 탑비로 1966년 9월 21일 보 물 제 44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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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형상을 한 비석의 하단부인 귀부분의 높이는 73cm, 이수부의 높이는 54cm로 비신은 대부분 파괴 되고 일부만 남아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2008년 비신부를 복원하여 전체적인 형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홍각선사는 합천 영암사와 여주 고달사 등지에서 정진하였는데 이름은 利觀(이관), 시호가 弘覺(홍각)이다. 귀부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거북형상을 받치고 지대석은 모서리를 곡면처리 하였으며 귀부의 육각 거북등무늬는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정수리 부분에 긴 흠이 있어 용뿔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네 발의 끝은 구름모양으로 등 위로 올라가 있으며 꼬리는 오른쪽으로 18도 돌아 위쪽으로 향하다 약간 오른쪽으로 꺾여있다. 비신 받침에 는 안상을 음각하였는데 정면에는 2개, 배면에는 3개, 좌우 측면에는 1개씩 배치하였고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는 원래 없었으나 근래에 복원하였고 이수받침에 연 꽃무늬를 새겼으며 비머리는 반용과 소용돌이형 태의 구름무늬가 뒤섞여 있다. 이수의 전면 중앙 에 사각형의 제액을 만들고 그 안에 홍각선사비 명이라는 글씨를 새겼는데 해서에 가까운 전서체이다. 전액의 글씨는 崔徑(최경)이 쓰고 비문은 雲澈(운철)스 님이 왕희지의 글씨를 모아 새겼다고 하는데 1,340자 정도로 추정되는 비문 중 현재까지 약 710자를 확인하 여 비문에 복원하였다. 탑비의 건립연대는 홍각선사가 880년에 입적하자 헌강왕 12년(886년)에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6. 선림원지 부도(보물 447호)

홍각선사탑비와 더불어 홍각선사의 부도로 알 려져 있는 9세기경 팔각원당형 부도로 현재 기단 부만 남아있으며 1966년 9월 21일 보물 제447호 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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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부만 남아있는 이 부도는 사각형 지대석 위에 팔각형의 하대석을 올렸는데 각 면에 안상 을 새기고 번갈아가며 안상 안에 사자 한쌍을 조 각하였다. 중대괴임은 아래 받침을 겹연꽃을 둥 근 모양으로 새겼고 위는 팔각으로 모서리가 명 확하게 꺾여있다. 중대와 상대석은 하나의 석재 로 구성되었으며 중대는 위로 갈수록 약간 줄어드는 원통형으로 용의 수염, 입술, 혓바닥 등이 사실적으로 묘 사되어 있다. 상대석은 중대석보다 큰 전형적인 양식으로 원형의 복련 받침을 두고 그 위에 팔각형의 탑신괴 임이 있다. 산사태로 묻혀있던 것을 1965년 복원했는데 현재보다 약 50m 위의 뒷산 중턱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