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3.1만세운동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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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457회 작성일 2014-04-2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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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유적비

해설 김양식

 

 

3.1 운동사

 

가) 원인과 배경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 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했다. 그리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을 박탈하였고,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으로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하였으며,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으로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나) 준비 과정

1)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외의 항일운동세력은 국제사회에 일제의 조선강 점의 불법성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2) 상하이[上海]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장덕수(張德秀)·김철 (金澈)·선우혁(鮮于爀)·서병호(徐丙浩)·한진교(韓鎭敎)·조동호(趙東祜)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 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3)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 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 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 출하였다.

 

4) 만주와 연해주에서도 1918년 12월 조소앙(趙素昻)이‘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呂準)·김좌진(金佐鎭)·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김교헌(金敎獻)·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 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무오년(戊午年)에 작성되어‘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이라고도 불리는‘대한독 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5)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 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金淳愛)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 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6)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東京]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속여 모임을 갖고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서춘(徐椿)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 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宋繼白)과 이광수(李光洙)를 국내 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7)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선우혁은 이승훈(李昇薰)·양전백(梁甸伯)·길선주 (吉善宙)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고, 송계백도 최린(崔麟)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孫秉熙)·최남선(崔南善)·송진우(宋鎭禹)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 기독 교와 여기에 한용운(韓龍雲)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8)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대표들과 합류했다. 또한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사가 각지에 서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등을 추진했다.

 

9) 1910년대에 민족개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에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거점이 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0) 농민들도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다.

 

 

 

다) 주변국가의 정세변화

 

1)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세계정세의 변화도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 간의 힘 관계가 재조정되어 국제정치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2)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등에서 전제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 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 치하의 압박을 받던 민족들에게 민족자결의 원칙을 선언하였다.

 

3) 이어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라) 전개 과정

 

1) 1단계(점화기) :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 배포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이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2) 2단계(도시 확산기) : 3월10일 전후로 전국의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 천 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강한 평안도·함경도·황해도의 주요도시들로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 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 3단계(농촌 확산기) : 3월 중순부터는 도시뿐만 아니라 전국농촌에도 시위가 확산되었다. 시위의 양상 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4) 드디어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의 거행장소를 군중들이 모여 있던 탑골공원에서 서울 인사동 의 태화관(泰和館)으로 변경하고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29명은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 학생인 서영환(徐永煥)을 통해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그리고 오후 3시 한용운(韓龍雲) 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에 일본 경찰에 통고하여 스스로 체포되었다.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장 소 변경에 당황하여 강기덕 등을 민족대표들에게 보내 항의하기도 했으나, 오후 2시 30분 무렵에 따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두 갈래로 나뉘어 종로·서울역·정동·이화학당·서대문 등을 행진하며 대대적인 시위 를 벌였다.

 

5)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였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수 가 시위운동에 참가했고 서울의 학생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6) 3월 10일 이후에는 시위가 경상도·전라도·강원도·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되어 전국적 규모 로 확산되었다.

 

7) 청년과 학생들이 주도한 비밀결사는 전단과 격문 등을 제작·배포하여 투쟁열기를 높였는데, 일부 지역 에서는 지방신문을 만들어 민족의 총궐기와 결사항쟁을 촉구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에 발간되었던 신문은조선독립신문, 노동회보, 반도의 목탁, 충북자유보, 혁신공 보, 각성호외보, 광주신문, 강화독립회보 등 30여 종에 이르렀다.

 

8)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화성 제암리·천안 아우내·정주 곽산·남원 광 한루·익산 이리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등 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집회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3,089명에 이르렀다. 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 15,961명이 상해를 입었고 46,948명이 구금되었으며,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전소되 었다.

 

 

마) 양양지방의 3.1운동과 만세고개의 유래

1)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일본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2월 20일 밤에 현산공원에 이종만을 비롯 유림 20명이 모여 이석범외 10명이 인산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이석범선생이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례를 하고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왔고, 양양감리교회 전도사 딸 조화벽이 개성의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개성만세운동에 깊히 관여하고 있었는데 독립선언문을 버선 속에 감추어 3월 말 대포항으로 들어왔다.

 

2) 이석범선생(당시 도천면)은 동생 이국범과 아들 이재훈, 이재형과 함께 1919년 4월 4일 장날을 기해 만 세운동을 계획하고 4월 3일 양양읍 선생의 고향 임천리 마을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준비하던 중 정 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에 의해 마을 주민 약 2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음날 4월 4일 손양면 가평리 마을 이장이던 함홍기열사는 경찰서로 군중과 함께 몰려가 잡혀온 이들을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 자 경찰서장실의 화로를 집어 던지려다 일경의 칼에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를 본 손양면 권병연열사가 다 시 항의하자 일경의 칼에 맞아 쓰러지고 세 번째로 김학구열사가 뛰어들자 이번에는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3) 이에 격분한 도천면 이국범과 이재훈, 장세환을 필두로 4월 5일 물치 장날을 기해 약 1,300여 주민들이 합세하여 물치장터와 대포주재소 주변에서 가장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만세운동을 벌렸고 양양으로 까지 나 와 필사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양양문화원에서는 매년 물치장터에서“물치만세운 동”기념행사를 하고있다.

 

4) 또한 4월 9일에는 현북면에도 확산되어 면사무소에서 궐기대회를 한 후 양양 장마당에 들어가 만세운동을 할 계획하였으나 정보가 노출 되어 감시가 심하자, 그 계획을 변경하여 기사문리 경찰주재소를 공격하 기로 하고 약 천여 명의 군중이 당시 관 고개를 넘어 기사문리 주재소 앞에서 일본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만세를 부르고 있었는데, 이때 언덕 밑 계곡 숲속에서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본경찰의 발포로 인해 현장에서 9명이 피살되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치열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후 8.15 광복 후 부터 이심전심 으로 자연스럽게 관고개가“만세고개”로 지명을 바꿔 부르고 있다.

 

5) 1919년 4월 3일~4월 9일까지 일주일 동안 양양군 관내 7개면 132개 리에서 15,000명 이상이 만세운동 에 참여하였고 사망자 12명과 부상자 43명, 체포 142명, 그중 실형 73명, 태형은 수없이 많았다.

 

참고문헌:3.1운동사 조용희. 양양군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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