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오색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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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70회 작성일 2014-04-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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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석사

해설 이규환

 

 

오색석사와 그 옛터

 

 

유 래

 

■ 양양군 서면 오색리의 남설악 골짝에 경영되었던 사찰이다. 전하건대 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파의 개산조사인 도 의국사(道義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정영호 박사)

※ 大韓佛敎曹溪宗宗祖(한 종파를 처음 세운사람)-道義國師

 

■ 고운 최치원선생(孤雲崔致遠先生:통일신라말기의 학자·문 장가, 868년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의 나이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의 고운집(孤雲集)에 의하면 오석사(五石寺)에는 오색 석(五色石)이 있는 고로 오석사(五石寺)라 이름 한 것이다.

 

■ 오색석사는 그 옛날, 오색령을 넘나들던 나그네들의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했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까지 이름이 현곡사 였는데 현대에 들어 성국사란 이름을 어느 교수가 지었다고 전한다.(속초 향 토사학가 박익훈 선생 낙수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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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유적

 

■ 현재 오색석사 옛터에는 법당 자리와 많은 초석들, 신라 3층 석탑(보물 제497호)이 건립되어 있고 별도 의 석탑재와 석사자, 장대석 등이 남아있으며 신라시대의 연화문·수막새·당초문·암막새 등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진 평기와 등이 수습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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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이르러 인법당(因法堂: 불당(佛堂)이 따로 없는 작은 절에서 승려가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곳) 1동을 지어 한 때에는 성국사(盛國寺)라 하였으나 사찰 규모로는 미흡한 점이 많다.

 

■ 3층 석탑의 건조양식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 식 일반 형이다. 이 석탑은 9세기에 이르러 유행된 양식과 기법을 보이고 있어 오색석사가 법등을 크게 밝히고 있을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한편 다른 기록에 현곡사(玄谷寺)가 오색천 상류에 있다고 하였는데 오색석사 옛터 이외에 상류에 올라 갈수록 골짝이 좁아졌으며 사찰을 건립할만한 대지가 없으므로 오색석사 사지를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무염선사 (無染禪師)

 

■ 무염선사는 신라 애장왕 2년(801년)에 출생하여 진성여왕 2년(888년)에 입적한 당시 제일의 고승이었 다. 성은 김씨, 호는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라고도 한다. 태종무열왕의 8세손이며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뛰어나 해동신동(海東神童)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 12세에 출가하여 이곳 오색석사에 들어가 법성(法性)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에 법성대사는 당나라 양이 새겨진 평기와 등이 수습된 바 있다.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왔으며 무염에게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주고 당나라 유학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 그 후 무염은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려 했으나, 도중 풍랑으로 배가 흑산도(전남 신안군 흑산면 진리)에 기착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이후 헌덕왕 13년(821년)에 다시 정조사(正朝使)를 따라 당나라에 가서 성남산 지상사(至相寺)의 화엄강 석(華嚴講席)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때 당에서는 이미 선종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무염도 불광사(佛 光寺)의 여만(如滿)을 찾아가서 선법을 문의하였다.

 

■ 무염을 맞이하여 선법을 논한 뒤 여만은“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의 젊은이는 본적이 없다. 훗날 중국이 선풍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 라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 이후 무염은 마곡산의 보철(麻谷山寶徹)을 찾아가서 인가를 받아 법맥을 이어받고 중국의 여러 곳을 다 니면서 고독한 사람, 병고를 겪고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폈다. 이렇듯 10여 년간 보살행을 실천하 니 그의 이름은 당나라 전역에 퍼졌고 사람들은 무염을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 신라 문성왕 5년(845년)에 귀국하였는데 이때에 왕자가 성주사에 머물기를 간청하였다. 이후 무염은 성 주사에 주석하면서 이 절을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근본도량으로 삼아 40여 년간 교화하였다.

 

■ 성주사지에서는 백제시대의 연화문, 수키와 등 백제의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어 백제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량임을 알 수 있으며 이때에 이르러 무염선사가 선문의 본산으로 삼을만한 곳이다.

 

■ 이후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6국왕이 모두 그를 존경하며 법을 물었고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불도를 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 때 최고의 고승인 무염이 출가한 역사적인 사 찰이 바로 오색석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