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하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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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942회 작성일 2014-04-2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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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대

해설 이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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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대의 유래

 

● 양주지 전설편에 보면

이들(하륜과 조준)이 이곳 하조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가 쇠퇴해져 나라 안이 어지러울 때 이 두 사람이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으나 나라 안의 정세를 미루어 보아 고려왕조의 왕통이 지탱할 수 없으니 새로운 왕조를 건립하여야겠다는 뜻을 품고 벼슬을 버리고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소일하 면서 새 왕조 건국 모사를 하여 새 왕조가 등극하자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두 사람이 함께 떠났다고 한다. 그들이 이곳에 있는 동안 혁명을 꾀했고 이곳에서 꾀한 혁명이 성취되어 후일 그들이 현관이 되자 그들의 성자를 따서 하조대하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양주지)

 

옛날 하광정리 하조대 근처에 하씨성을 가진 준수한 청년이 있었는데 이웃 조씨 가문에 혼 기가 찬 두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이 처녀들은 하씨 청년의 준수함에 반해서 둘이 다 같이 한 청년에게 애정을 품게 되었다. 두 처녀는 한사코 양보를 하지 않으므로 해결책이 없자‘저 세 상에는 도덕이니 윤리이니 하는 번거로움이 없을지도 모르니 우리 다 같이 저 세상에 가서 함 께 살자고 합의하여 이들은 하조대 절벽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고한다. 그 후 이곳을 하조대라 고 불렀다고 한다.(양주지)

 

하륜은“1388년 최영(崔瑩)이 요동(遼東)을 공격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유배되었다가 위화도 회군 후 복관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조준은“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고, 윤소종(尹紹宗)·허금(許錦)·조인옥(趙仁沃)·유원정(柳爰廷)·정지(鄭地)·백군녕(白君寧) 등과 교우를 맺 으면서 우왕의 폐위와 왕씨 부흥을 꾀하다 1388년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에게 발탁되어 지밀직사사 겸 대사 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에 발탁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은둔생활을 하면서 우왕의 폐위를 꾀하던 조준이 우왕으로부터 유배되어 양양에 머물고 있던 하륜을 찾아 우왕의 폐위를 논했을 것으로 이들이 현관이 되자 이들의 성(姓)을 따서 하조대(河趙臺)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2009년 12월 9일 명승 제68호로 지정되었다.

정자는 조선 정종 때 최초로 건립하였고 이후 수차례 중수를 거듭하였는데 1940년 세웠던 것이 6·25한국 전쟁으로 소실(燒失)되었고 이후 1955년, 1968년, 1998년 세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다.

1820년대 기록인 양주읍지(襄州邑誌) 형승(形勝)편에 조선 숙종 때 양양부사와 대사헌을 지낸 이세근(李世 瑾)이‘하조대’라 크게 세 글자를 정자 앞에 있는 바위에 새겨놓았다고 전한다. 우의정을 역임하신 명재 윤증 (明齋尹拯)이‘비를 무릅쓰고 하조대에 올라 바위에 기대 하염없이 시를 읊었다.’라는 시가 기록되어있다.

하조대와 관련한 한시는 12편이 전한다.

 

 

● 하륜(河崙)

 

개 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공진(珙辰)의 후예로,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 事) 시원(恃源)이고, 아버지는 순흥부사 윤린(允潾)이다. 어머니는 증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360년(공민왕 9)에 국자감시(國子監試), 1365년에는 문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인복(李仁復)·이색(李 穡)의 제자로, 1367년에 춘추관검열·공봉(供奉)을 거쳐,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문객 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고공좌랑(考功佐●)·판도좌랑(版圖佐●)·교주찰방(交州察訪)·제릉서영(諸陵署令)·지평·전리정 랑(典理正●)·전교부령지제교(典校副令知製敎)·전의부령(典儀副令)·전법총랑(典法摠●)·보문각직제 학·판도총랑(版圖摠●)·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전리총랑(典理摠●)·전교영(典校令)·대사성 등의 관직을 거치고, 1380년(우왕 6)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3년 상을 마친 뒤 우부대언·우대언·전리판서·밀직제학을 거쳐, 1385년에 명나라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 1388년 최영(崔瑩)이 요동(遼東)을 공격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 로 유배되었으나, 위화도회군 이후로 복관되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가 가짜임을 밝혔다가 오히려 광주(光州)·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윤이(尹彛)·이초(李初)의 변이 일어나자 의혹이 풀려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 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경기좌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신도(新都)를 계룡산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 중지시켰다. 1394년(태조 3)에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 院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러나 곧 기복(起復)되어 예문춘추관학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명나라와의 표전문(表箋文) 시비가 일어나 자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鄭道傳)을 보낼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명나라에 들어가 일의 전말을 상세히 보 고, 납득을 시키고 돌아왔다.

 

그러나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는데, 그 때 항왜(降倭)를 도망치게 했다 하 여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충청도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이방원(李芳遠)을 적극 지지하여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 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진산군(晉山君)에 피봉되었다.

 

그리고 그 해 5월 명나라 태조가 죽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종의 왕위계승을 승인받아 귀국, 참찬문하부사·찬성사·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사사·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을 거쳐 진 산백(晉山伯)으로 봉해졌다.

 

이 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했다가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 공거(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 (楮貨)를 유통시키게 하였다.

 

1402년(태종 2)에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 성제 (成帝)의 즉위를 축하하고 조선의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1405년에는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 다음 해에는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어 변계량 (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그 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역임하고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 진 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 되었다.

 

그는 태종의 우익으로 인사 청탁을 많이 받고 통진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 200여 섬 지기를 농장으로 착 복,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공신이라 하여 묵인되었다. 치사한 뒤에도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의 능침(陵寢)을 돌아보던 중, 정평군아(定平郡衙)에서 죽었다. 인품이 중후, 침착, 대범하였다. 저서로 문집 ≪호정집 浩亭集≫ 약간권이 있다. 태종의 묘정(廟庭)에 봉안되었다. 후대에 그를 한나라의 장 자방(張子房:張良), 송나라의 치규(稚圭)라 일컫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조준(趙浚)

 

개 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齋) 또는 송당(松堂). 문하시중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아 버지는 판도판서 덕유(德裕)이다. 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 태종과는 사 돈이 된다.

 

원래 평양 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하여 역관(譯官)으로서 출세, 충 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는데,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했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생 애

 

1371년(공민왕 20) 책을 끼고 수덕궁(壽德宮) 앞을 지나가자, 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馬陪行首)에 보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년) 함과에 급제하고,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으로서 통례문부사(通禮門 副使)를 겸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뽑혔는데, 정치를 잘하여 이민(吏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 다.

 

이어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1382년 병마도통사 최영(崔瑩)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 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를 징벌하고 병마사를 참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뒤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된 뒤에는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평하여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올랐 다. 그러나 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 고, 윤소종(尹紹宗)·허금(許錦)·조인옥(趙仁沃)·유원정(柳爰廷)·정지(鄭地)·백군녕(白君寧) 등과 교우를 맺으면서 우왕의 폐위와 왕씨 부흥을 꾀하였다.

 

그가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 무렵이다.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중망(重望) 이 있는 조준을 불러 일을 논의하고는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에 발탁,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자문하였다. 이에 그는 크게 감격하여, 아는 것을 모두 이성계에게 이야기하는 등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 였다.

 

그 해 이성계·정도전(鄭道傳) 등과 전제 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의를 얻고, 같은 해 7월 처음으로 전제 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였다.

 

또 다음해 8월과 12월에 잇달아 전제개혁소를 올려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변안열(邊安 烈)·권근(權近)·유백유(柳伯濡) 등 전제 개혁 반대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관제·신분·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고, 지문하부사 겸 대사헌(知門下府事兼大司憲)으로 추충여절좌명공신(推忠勵節佐命功 臣)이 되었다.

 

이어 조민수(曺敏修)·이인임(李仁任) 등 권신을 탄핵하고 창왕을 폐위,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이 성계·정도전 등과 더불어 중흥공신에 서훈되었다. 1389년(공양왕 1)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평리 겸 판상서 시사(評理兼判尙瑞寺事)에 올라 전선(銓選)을 주관했고, 다음해에는 찬성사로 승진하여 1391년 성절사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정도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정몽주가 죽자 풀려나와 찬성사·판삼사 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이 해 7월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피봉되고 문하우 시중(門下右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정치적 실권이 점차 정도전에게 집중되자, 그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세자책봉에 대해 정도전은 방석(芳碩)을 지지했으나, 조준은 이를 반대하여 개국에 공이 많은 방원(芳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면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요 동공벌을 계획하던 정도전과 대립하여 공요운동(攻遼運動)을 반대하였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자연히 이방원과 가까워져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고, 평소 방원에게 ≪대학연의 大學衍 義≫를 주고 읽기를 권장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戊寅靖社, 혹은 鄭道傳亂) 때 백관을 이끌 고 적장(嫡長)을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한 후,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피 봉되었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있으면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에게 무고되어 한때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고 좌정승·영의정부사에 승진, 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그는 사학(史學)을 잘하고 경학(經學)과 시문에도 능했으며, 문집으로 ≪송당집≫을 남겼다. 한편, 검상조 례사(檢詳條例司)에게 국조의 헌장조례(憲章條例)를 모아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간행하게 했으니, 이는 뒤에 ≪속육전≫·≪육전등록≫ 등으로 보완되어 ≪경국대전≫ 편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전제개혁안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목표를 둔 것이었다. 즉, 제1차 상소에서는 녹과전(祿科田)·구 분전(口分田)·군전(軍田)·투화전(投化田)·외역전(外役田)·위전(位田)·백정대전(白丁代田)·사사전(寺社 田)·역전(驛田)·외록전(外祿田)·공해전(公●田) 등의 설치를 통해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2·3차의 전제개혁상소에서는 세신거실(世臣居室)이 경기 이외의 외방에까지 사전(私田)을 두려는 움직 임을 저지하고,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하였다.

 

1391년 5월에 정해진 과전법은 그의 개혁안이 토대가 된 것이나, 구분전·투화전·백정대전에 대한 분급 규정(分給規定)이 빠져 있고, 그 대신 중흥공신전의 세습에 대한 규정이 첨가되었다.

 

그가 여말에 올린 국정개혁안은 ≪주례 周禮≫에 바탕을 둔 것으로 광범위한 사회개혁안을 포괄하고 있다. 즉, 총재(●宰,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간과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며, 양천신분제(良賤身分制)를 확립하 여 국역체제를 강화하고, 경연과 서연제도를 실시하며, 학교(향교)제도를 강화하여 사장(詞章)을 폐하고 사서 오경을 배우도록 할 것,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시행할 것, 의창(義倉)과 상평창(常平倉)·사창(社倉)의 법 을 시행할 것, 향리의 출사(出仕)를 억제할 것, 환자(宦者)의 정치 참여를 막을 것, 과거시험에 복시제(覆試制) 를 시행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그의 관제 및 사회개혁안은 정도전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많으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및 ≪경제문감 經濟文鑑≫ 편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 다.

 

 

 

● 누정대(樓亭臺)의 구분

 

■ 누각(樓閣) - 빈일루, 설악루, 죽서루 등

 

“휴식(休息)을 취하거나 놀이를 하기 위해 산이나, 언덕, 물가 등에 높이 지은 다락집, 주변의 풍광(風光)을 즐길 수 있도록, 대체로 문과 벽이 없이 사방으로 트여 있다.”라 하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樓重屋也”라고 하여 루(樓)는 중옥(重屋)이라고 하고 중옥은 복옥(複屋)과 구별하였다. 중옥은 사람이 거처 할 수 있는 집이나 복옥은 사람이 거처할 수 없는 집이라고 하였다. 루(樓)는 좁고 굽어진 곳에 위치한다. 높 은 산이나 언덕 위에 위치하지 않아서 앞이 훤히 트이지 않았으며 온 고을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집 앞에 강, 호수, 하천, 연못이 있다. 건물은 2층이라고 할 수 없으나 옹색한 곳에 위치하며, 밑기둥을 높이 세워 높은 마루 아래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다.

 

■ 정자(亭子) - 이화정, 독송정, 청간정 등

 

“자연경관(自然景觀)을 감상하면서 한가로이 놀거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주변경관(周邊景觀)이 좋은 곳 에 아담하게 지은 집, 벽이 없이 지붕만 있으며 단층이다.”라 하였다. 『대한사전(大漢韓辭典)』에“觀覽處也” 라 하여 매우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인 것처럼 보인다. 정(亭)은 정자(亭子)의 약어(略語)이다. 정자(亭子)의 “자”(子)는 다만 조사(助辭)일 뿐이다. 정자는 놀이를 목적으로 마을과 다소 거리가 있는 산수가 좋은 곳에 지 은 집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亭民所安定也”(정은 백성이 안정하는 곳)라 하였다. 이것은 정현(鄭玄)이 註를 달아 풀이하기를“잠을 잘 수 있으나 잠을 자지 않는 곳으로 마치 지금의 정자에 방이 있는 것과 같다.(宿可止宿若今亭有室矣)”라고 하였다. 정(亭)은 방은 있지만 밤에 유숙하는 곳이 아니라 다만 산수 좋 은 곳에서 그저 편안히 즐길 수 있는 놀이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대(臺) - 의상대, 하조대 등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 사방을 볼 수 있게 만든 곳.”이라 했다.『 문체명변(文體明辯)』은 대(臺)는 네모나고 높이 위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觀四方而高者也”라 하여 사방을 바라볼 수 있는 높 은 위치에 있는 집이라 하였다. 『대한한사전(大韓漢辭典)에“●築土觀四方而高者”라고 하여 높은 위치에 흙 을 높이 쌓아 집을 지어 사방을 조망할 수 있게 한 집을 뜻한다고 하였다.

 

 

 

● 하조대 관련 한시

『玄谷集』詩〔현곡 조위한(玄谷趙緯韓) 1567~1649〕

현 곡 집

仙臺●●接蓬壺(선대표묘접봉호) / 선대는 아득하니 봉래산과 접하고

二子遐●問釣徒(이자하종문조도) / 두 아들이 멀리 와서 낚시꾼에게 물렀다.

落日獨登招海若(낙일독등초해약) / 해질녘에 혼자 올라 해신을 부르니

臨風長嘯響山都(임풍장소향산도) / 휘파람이 바람을 타니 산이 울렸다.

東南無際迷封域(동남무제미봉역) / 동남이 무한하니 봉역은 미혹하고

上下皆空沒宇區(상하개공몰우구) / 상하가 모두 비었으니 집터 잠겼네.

憐我杳然如一粟(연아묘연여일속) / 아득하고 멀어 내 가련하니 한 알의 좁쌀 같고

不知何處着微軀(부지하처착미구) / 천한 이 몸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十淸軒集』〔십청헌 김세필(十淸軒金世弼) 1473∼1533〕

십 청 헌 집

河趙臺(하조대) 祥雲南指一長亭(상운남지일장정) / 상운 역말의 여관에서 남쪽을 가리킨 곳

疊石爲臺入海汀(첩석위대입해정) / 바닷가에 불쑥 층층 돌 위에 대가 있구나.

蜃氣接天成殿閣(신기접천성전각) / 하늘에 접한 신기루의 전각을 이루고

浪花環坐浸階庭(낭화환좌침계정) / 헛꽃 앞에 둘러앉으니 계정은 잠기네.

扶疏松竹生淸韻(부소송죽생청운) / 무성한 송죽은 맑은 음향을 일으키는데

出沒魚龍見怪形(출몰어룡견괴형) / 어룡이 출몰하는 괴이한 형상을 보았네..

徙倚乾坤懷抱在(사의건곤회포재) / 아주 넓은 천지간엔 회포가 있는데

杯樽今日酌東溟(배준금일작동명) / 오늘은 술독에다 동해물을 잔질하네.

 

『明齋遺稿』〔명제 윤증(明齋尹拯) 1629∼1714〕

명 재 유 고

河趙臺(하조대) 奇峰突兀入波心(기봉돌올입파심) / 파도 속으로 불쑥 솟은 기이한 봉우리여

十里松間冒雨尋(십리송간모우심) / 솔 사이 십 리 길을 비 맞으며 찾아 왔네

遊子何知河與趙(유자하지하여조) / 나그네는 하륜과 조준을 어찌 알 것인가

倚巖空復費莊吟(의암공복비장음) / 바위에 기대 부질없이 시 한수 읊었다오

『澤堂先生集』〔택당 이식(澤堂李植) 1584∼1647〕 택 당 선 생 집 河趙臺(하조대)

臺名河趙自何年(대명하조자하년) / 하조대란 이 이름 시작된 게 언제 인고

形勝兼將姓氏傳(형승겸장성씨전) / 멋진 경치와 더불어서 성씨까지도 전해 오네

●●千尋爭巨浪(희희천심쟁거낭) / 엄청난 물결과 맞싸우며 천 길 우뚝 솟은 누대

灣●一曲貯深淵(만회일곡저심연) / 한 굽이 돌 때마다 깊은 연못 물 고였네

初疑砥柱當橫潰(초의지주당횡궤) / 격류 속의 지주런가 처음에 눈을 의심타가

更覺桑田閱變遷(갱각상전열변천) / 문득 상전벽해(桑田碧海)세월의 변천을 깨달았네

從古爽鳩遺此樂(종고상구유차낙) / 상구씨(爽鳩氏)가 이 즐거움 물려준 뒤로부터

幾人陳迹逐風煙(기인진적축풍연) / 속인의 발길 그 얼마나 이 풍광을 좇았을 꼬

 

『白軒先生集』卷之十一[이경석(李景奭) 1595~1671]

백 현 선 생 집 권지십일

自祥雲至河趙臺.路中記見(자상운지하조대.노중기견)

處處饒佳景(처처요가경) / 곳곳이 너무 좋은 가경이라

徐行日暮歸(서행일모귀) / 천천히 돌아가니 해는 저물어.

蒼松夾路立(창송협로립) / 푸른 솔 사이 길에 서있으니

白鳥近人飛(백조근인비) / 백조는 내 옆을 날아다니네.

漁戶依沙岸(어호의사안) / 어촌의 집들은 바닷가에 지어졌고

鯨波●客衣(경파천객의) / 큰 파도일어서 객의 옷은 젖었다오.

長風掃雲霧(장풍소운무) / 바람이 불어오니 운무는 살아지고

海月吐淸輝(해월토청휘) / 바다에 뜬 달은 맑은 광채 토하네.

 

『鶴洲先生全集』卷之一[김홍욱(金弘郁) 1602~1654]

학주선생전집 권 지 일

登河趙臺(등하조대) 在襄陽(재양양)

氣母當年巧琢磨(기모당년교탁마) / 당년에 기모가 교묘히 닦고 갈려서

荒巖白石勢嵯峨(황암백석세차아) / 황암백석의 기세는 울쑥불쑥하구나.

不知河趙何如者(부지하조하여자) / 하조는 알 수 없는데 어찌 같다하는가

吾欲同乘上漢●(오욕동승상한사) / 은하수에 뗏목 띄워 내 같이 타려 한다.

 

『希菴先生集』卷之十六詩峴山錄[上] 蔡彭胤仲耆甫著

희암선생집 권 지 십 륙 시 현 산 록 상 채팽윤중기보저

河趙臺示雲丞(하조대시운승)

蒼蒼偃盖界官途(창창언개계관도) / 창창한 솔 그늘 덮인 관활 구역 안에

馬首鵑紅萬萬株(마수견홍만만주) / 말이 향하는 곳마다 진달래 엄청 많구나.

河趙臺空滄海闊(하조대공창해활) / 하조대의 하늘은 창해같이 트이었고

蓬萊島近彩雲孤(봉래도근채운고) / 봉래섬 근처의 채운이 고상도하구나.

督郵肯許廻金勒(독우긍허회금륵) / 찰방이 쾌히 허락하니 말머리 돌리고

醉守何妨枕玉壺(취수하방침옥호) / 취해 술병 베고 누운 수령 어찌 깨우리.

得出風塵是輕擧(득출풍진시경거) / 경거망동하여 풍진에 벼슬 얻었으나

神仙未必世間無(신선미필세간무) / 이 세상엔 신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其二(기이) 風●空中轉(풍등공중전) / 빙글빙글 바람이 공중으로 오르고

烟濤兩畔開(연도량반개) / 뽀얀 물결에 하늘과 바다가 열리네.

春寒芳樹懶(춘한방수라) / 봄 날씨 싸늘해 꽃나무 게으르고

日暮遠帆催(일모원범최) / 날 저물어 멀리서 돛단배 서두네.

咫尺三山色(지척삼산색) / 지척의 온산은 삼색으로 물들고

層溟一酒杯(층명일주배) / 저 너른 바다는 한 잔의 술인가.

英雄有遺跡(영웅유유적) / 영웅의 끼친 자취 남아있고

長嘯意悠哉(장소의유재) / 긴 휘파람에 정취가 한없네.

 

『樗村先生遺稿』卷之五詩〔저촌 심육(樗村沈●) 1685~1753〕

저촌선생유고 권지십일

河趙臺(하조대)

石骨●●海流(석골릉증한해류) / 해류를 막아 선 험준한 돌산에

姓傳河趙至今留(성전하조지금류) / 하 조 성자가 지금까지 전하네.

高厓大字欲磨滅(고애대자욕마멸) / 꼭대기의 세 글자 마멸되어 가는데

去後居然三百秋(거후거연삼백추) / 삼백년이 지난 지금도 완연하도다.

逈出松陰幷馬來(형출송음병마래) / 빼어난 소나무 그늘에 나란히 걸어와서

春風倚醉上高臺(춘풍의취상고대) / 술기운에 봄바람 안고 높은 대에 올랐네.

危岩突兀當空碧(위암돌올당공벽) / 위험하게 높이 솟은 바위는 벽공에 닿았고

勢抱滄溟萬里廻(세포창명만리회) / 창해를 껴안은 기세로써 만 리에 뻗쳤구나.

 

『樗村先生遺稿』卷之五詩關東錄

저 촌 선 생 유 고 권 지 십 일

河趙臺(하조대)

英豪初未遇(영호초미우) / 영웅호걸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닌데

書劒昔遊斯(서검석유사) / 문과 무가 옛날에 여기서 놀았다네.

草澤●淪久(초택침륜구) / 가난한 선비는 오래전에 고경에 빠졌다가

風雲際會奇(풍운제회기) / 풍운아는 끝내 기이하게도 만나게 되었네.

千秋遺迹在(천추유적재) / 천년의 유적이 남아있으니

百尺古臺缺(백척고대결) / 백 척의 고대가 일그러졌네.

片石留荒字(편석류황자) / 돌 판에 크나큰 글자 남아있으니

今人豈解誰(금인기해수) / 지금 사람 누가 뭐라 해독하려나.

 

『知退堂集』卷之二詩〔지퇴당 이정형(知退堂李廷馨) 1549~1607〕

지 퇴 당 집 권 지 이 시

登河趙臺(등하조대)°次申企齋光漢韻(차신기재광한운)

一上高臺豁客愁(일상고대활객수) / 객의 수심 풀고자 혼자 높은 대에 오르니

波間隱約見瀛洲(파간은약견영주) / 삼신산의 숨은 이야기를 파도에서 보누나.

騷人物色分留少(소인물색분류소) / 시인이 읊은 물색이 적지 않게 남아있으련만

取次陳言記遠遊(취차진언기원유) / 차례차례 케케묵은 말로 기록하며 오래 놀랐다.

 

 

白軒先生集卷之十一詩稿海上錄自金剛歸路°仍作海上之遊°

백헌선생집권지십일 시고해상록 자금강귀로 잉작해상지유

河趙臺.與襄高兩使君把杯,見鯨魚露背噴波(하조대.여양고량사군파배,견경어로배분파)

策馬登臨萬●岡(책마등림만인강) / 만길 산등성이 말을 몰아 올라서서

笛聲吹捲海雲長(적성취권해운장) / 피리부니 바다에 뜬구름은 걷히누나.

醉來欲喚群鯨起(취래욕환군경기) / 취한 김에 부르고자하니 고래 떼 솟구치며

噴雪層空舞夕陽(분설층공무석양) / 눈을 뿜듯 공중에 뿜으니 서양이 춤추누나.

湖陰雜稿卷之三關東日錄 호응잡고권지 삼관동일록 河趙臺(하조대)

本朝河崙,趙浚共遊之地,後人因以名臺云(본조하륜조준공유지지후인인이명대운)

凌虛臺上逢微雨(릉허대상봉미우) / 가랑비 맞으며 하늘을 능멸하듯 높은 대에 올라서

河趙峯頭看晩晴(하조봉두간만청) / 산꼭대기 하조대에서 저녁에 비개인 풍광을 보았네.

風色偶乘今夕好(풍색우승금석호) / 오는 저녁 경치는 짝지울대 없이 좋은데

登臨還想昔人情(등림환상석인정) / 대에 올라서니 옛사람의 정이 돌이켜지네.

名惟不朽傳悠久(명유불후전유구) / 생각건대 이름은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지는데

物固無窮亦變更(물고무궁역변경) / 아무리 단단한 물건이라도 오래되면 변경되더라.

只愧往來渾漫興(지괴왕래혼만흥) / 다만 부끄럽게 왕래하나 흥치가 흐릿하니

峴山羊子莫愁生(현산양자막수생) / 현산의 양호(羊祜)와 두예(杜預)의 생각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