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명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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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520회 작성일 2014-04-29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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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사

해설 이철수

 

명주사(明珠寺)

● 위 치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어성전리 만월산

● 소 속 : 대한조계종 제 3교구 (본사 신흥사)

● 창건연대 : 고려 제 7대 목종 12년(1009년)

● 창 건 자 : 慧明(혜명)스님 大珠(대주)스님

● 절 이 름 : 明珠寺(명주사)-혜명, 대주의 한자씩 취하여 지음

 

명주사의 내력

처음 두 스님이 창건할 때는 비로자불을 모셨는데 여러 번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과 유물들이 남아있지 않 다. 고려 제 17대 인종 원년(1123년) 靑蓮庵(청련암)과 雲門庵(운문암)을 창건하였는데 고려시대에는 현북면 을 중심으로 명주사 도량이 창업되고 주변에 암자까지 창건배치 하였음은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 까지 현북면이 불교가 크게 번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낙산사, 원효대사가 창건한 영혈사 등 불교가 호국불교, 국민불교로서 거족적인 종교가 되었다.

 

명주사의 변화

고려시대에 번창하던 불교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배불정책의 사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북면 어성전리를 중심한 지역에는 암자들이 창건되었다. 제 19대 숙종 2년(1676년) 향로암이 창건되었고, 또 숙종 27년(1701년)에 벽옥루가 창건되었고, 제 22대 정조 5년(1781년)에 蓮坡(연파)스님이 원통암을 창건하고 관 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제 24대 헌종 15년(1849년)에 원통암이 화재로 소실됨에 즉시 중건하였고 제 25대 철종 4년(1853년)에 원 통암이 화재가 일어나 다시 중건하였다. 철종 11년(1860년)에 명주사 본사와 원통암, 청련암, 운문암, 향로암 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 이절의 月虛(월허)스님이 명주사를 중건하였고 다음해에 인허스님이 운문암을 중건하고 향로암을 서쪽으로 옮겨 짓고 보련암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제 26대 고종 원년(1864년)에 학운, 정원스님이 개인 사재를 털어 원통암을 중건하였다.

고종 15년(1878년)에 명주사가 화재를 당하자 고종 16년(1879년)에 명주사를 중건하였다. 고종 34년(1897년)에 명주사가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후로는 원통암에서 사찰의 사무를 보게 되었으니 이때의 명주사는 원통 암을 칭하였다.

명주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화재가 종종 일어나 명주사는 물론 암자들도 자주 화재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중건되었다. 이와같이 조선시대에 있어서 양양지구의 불교가 배불숭유정책에도 불구하고 별 탄압 을 받지 않고 항상 불교가 왕성하였다.

예컨대 낙산사는 조선 초기 태조는 원년(1392년)부터 춘추로 사신을 보내어 삼일제를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후 매년 규칙적인 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제 7대 세조는 낙산사에 행차하여 삼층이던 석탑을 7층으로 다시 축조하였고 낙산사를 중창토록 하였다. 제 8대 예종은 교지를 내려 절의 건물들을 중건하고 대종을 주조토록 하였으며 경작지와 노비를 내렸다. 제 9대 성종도 교지를 내려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노역을 격감, 사찰 땅 을 면세토록 하였다. 제 17대 효종은 향로를 하사하였다. 제 22대 정조는 화엄사의 미타암 화응전을 원당으 로 정하고 관음상과 병풍, 궁중의 가마를 하사하며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사표(동,남, 북의 표석)를 정하도 록 하였다. 제 25대 철종때 화재로 소실된 화엄사 본사와 암자들을 중건할 때 조정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주 었다.

이렇게 조선시대 양양지역 불교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면면히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통암이 중건 확장되고 사찰의 면모가 새로워지고 있던 바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1912년 건봉사의 말사 가 되었으며 여러 스님이 바뀌면서 사찰을 보수 중수하고 1926년 명주사의 소속 암자들이 청련암, 운문암, 향로암이 있었는데 모두 폐사하였다. 역대 스님들의 부도와 석비 10여기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해방후 38선 상에 위치하고, 또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명주사는 폐허가 되어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석조건물로 이 루어진 부조밭의 석조부조도와 석비들만 화재에서 살아남고 그 외 건물과 유물들은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1963년부터 중창불사가 시작되어 법당과 삼성각, 추성각, 종각, 요사체 등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 다. 현재 사찰 규모는 큰 편이 아니나 이름난 학승들을 배출한 곳이다.

현재의 명주사는 옛날 암자였고 현판과 인경종(人警鍾)은 보물급에 속한다.

 

명주사의 문화재

특이할 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범종은 숙종 30년(1704년) 2월 높이 85cm의 조선후기 범종으로 1980년 2 월 2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동종 보호각을 개축보호하고 있다. 현판(懸板)과 무량수전은 추사(秋史) 완당(玩堂)의 친필이다. 그리고 부도밭의 석조부도들과 석비가 이 사찰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용뉴와 음통 : 용뉴는 종을 메달기 위한 고리이며 음통은 대롱 모양의 관으로 종의 공명과 관계되는 음향 조절기능을 고려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명주사에서 500m 정도 아래쪽에 중봉당선사탑이라 칭하는 2.5m 높이의 석조부도가 서 있는데 그 앞에 밭이 옛 절터라고 전한다.

명주사 뒷산인 만월산에는 문필봉(文筆●)이라 부르는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절에서 공부하는 승려들이 이 산봉우리에 올라가 기도하면 도를 깨친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어 산행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 수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주사 도량은 물론 이곳 문필봉도 수도의 도량삼아 많은 학승들이 찾아 올라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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