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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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377회 작성일 2014-04-2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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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해설 김양식

 

가. 유학이 들어온 시기

 

1) 儒學은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본다. 이 때 유학의 성격은 孔子의 효재충신(孝悌忠信)과 맹자의 五倫이 중 심이었다.

 

2) 284년 백제는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왕자의 사부 (師傅)가 되었고,

 

3) 372년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에 太學을 설치하여 자녀들을 교육 하였다고 한다.<고구려본기>

 

4) 682년 신라는 신문왕 2년에 國學을 설치하였으나 불교의 융성으 로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5) 1003년 고려는 목종 6년에 서경의 학원(學院)으로 3경 10목에 향 학(鄕學)을 설치하여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생도를 교육하였고 1127 년 인종 5년에 여러 州에 향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려 유교를 국가통 치의 근간으로 삼았다.<增補文獻備考>

 

6) 1398년 조선에 와서는 태조 7년에 성균관이 창설되었으며 문묘(文廟)와 明倫堂이 함께 있어 봉사(奉祀) 와 교육 및 문화적 기능을 확대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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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양양향교 건립 시기

 

1) 우리나라의 향교의 설치 연대는 정확치는 않지만 고구려는 太學과 경당(●堂), 고려의 국자감(國子監)과東西學堂, 조선의 성균관이 개설될 당시에 전국 지방의 향교가 설립되었을 것으로 본다.

 

2) 양양향교(임천리 297)는 고려 충숙왕 17년(1330) 5월에 江陵道존 무사(存撫使)로 임명된 안축(安軸)에 의해 양양부 구교리(舊校里)에 창 건 되었다고 한다.

존무사 안축은 당시 이 지방을 순방하면서 산수가 수려하고 풍광이 뛰어난 지역에서 100여년이 지나도록 인재가 나오지 않음은 예부터 변 방에 인접하여 변란이 자주 일어나 학교가 재건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침 양양지방의 향로(鄕老)들에게 물어보니 구읍(舊邑) 북쪽에 예로 부터 구학(舊學)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향교 설치를 명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구교리를 향교골이라고 부르고 있다.<안축의 양양신학기문>

 

3) 그 후 성종 21년(1490)에 부동일리(府東一里) 城外로 移建되었고 인조 4년(1626)에 확장 중수되었다. 숙종 8년(1682)에 부사 최상익(崔 商翼)이 진사 박호(朴灝), 崔相殷에 의하여 옛 文宣王洞(현 임천리)으로 移建되었다고 한다.<최상익의 양양향교이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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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1946년에는 향교의 모든 토지와 건물은 공산당에 몰수되었고 1950년 9월30일 6.25전쟁 당시에 공산당의 방화로 건물 및 제기(祭器), 제복(祭服), 서적 등 역사적 사료들이 안타깝게도 모두 소실되었다.

 

5) 1951년 수복과 동시에 다시 향교의 모든 재산을 회수하였으며 1952년에는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 西●), 동서재(東西齎) 등을 재건하고 석전제(釋奠祭)를 봉행하였다.

 

6) 1954년에 明倫堂을 중건하여 향교재단에서 명륜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에 열성을 다해오다 1975 년에 패교되여 현재는 석전제를 비롯한 행사에만 그치고 있다.

 

7) 1985년 1월 17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襄陽郡誌>

8)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향교는 1900년에 재건된 충남 보령시의 오천향교(鰲川鄕校)를 끝으로 231개의 향교가 남아 있다.

 

 

 

다. 향교 운영

 

1) 향교의 운영은 교사(敎舍) 등 시설물의 설치·보수·유지, 교수관 (敎授官)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학업활동에 부수되는 제반비용, 그리고 향교를 중심으로 준행되는 석전례, 향음례 등에 이르는 비용을 이른바 학전(學田)과 학노비(學奴婢)로 공급하였고 교생은 무상교육을 받았다.

 

2) 성종 15년(1484)에

제읍향교급전절목 諸邑鄕校給田節目을 제정 하였고, 이것이 토대가 되어 호전(戶田)·학전조로 운영하였다.

 

3) 그 밖에도 중건·중수의 공역이 있을 때에는 관청에서 그 비용을 지급하였고 필요하면 유전(儒錢)을 갹출하거나 그 지방 유지의 보조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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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교육제도

 

1) 향교의 교육과정은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숭덕광업(崇德廣業)이란 유교의 교육목표하에 인격수양과사회기강을 통한 인재육성을 목표로 삼았다.

 

2) 시문(詩文)을 짓는 이른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을 공부하 는 경학(經學)을 교과내용으로 한다. 대체로 小學, 四書, 五經, 性理大全, 三綱行實, 孝經, 近思錄, 通鑑, 鄕約, 家禮, 鄕飮酒禮, 鄕射禮, 居接등을 교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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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관제도는 성종 때 와서 府이상의 고을에는 6품 이상의 교수관(敎授官)이나 7품 이하의 훈도관(訓導 官)을 배치하고 교관의 나이는 40~70세로 제한하고 임기는 900일로 명시되어 있다.

 

4) 학생들의 입학연령은 17세 이상이 정규생으로 정하고, 府, 대도부(大都府), 牧의 향교는 90명, 도호부(都護府)는 70명, 府나 郡은 30~50명으로 정원을 정하고 있다.

5)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생원·진사시험 회시에 직접 응시하는 특전을 부여받거나 일강(日講)·월과 (月課)에 우등한 자는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6) 조선왕조의 유교교육은 양인(養人)과 교화라는 양면적 목표를 삼았기 때문에 국역의 대상이 되는 신분 이라도 누구나 독서를 원하면 향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였다. 세종 때에 신백정(新白丁)에게 향교입학을 허락한 것이나 조선 초기부터 농민들에게 향교교육을 허락한 점 은 그러한 반증이다.

 

7) 일단 교생이 되면 그들의 사회신분이 양반이건 평민이건 법제적으로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재(東齋)·서재(西齋)로 기숙사를 구별하기도 하고, 액내(額內)와 액외(額外)로 양반과 평민 교생 들을 구분하기는 하였으나, 군역의 문제라든지, 과거시험을 응시하는 자격을 얻는다든가 하는 점에서 차별을 두지 않았다.

 

 

 

마. 건물의 구성과 배치

 

1)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건물이 자리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이 배향공간이 나오고 후 면에 강학공간이 오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루고, 대지가 구 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 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룬다.

 

2) 양양향교는 경사진 면에 위치하고 있어 장대석 석축을 쌓아 기단 을 만들어서 건물전체가 위엄이 있고 당당해 보이는 전학후묘형(前學後 廟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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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면에 학생들이 강학하는 明倫堂이 있고 후면에 동재, 서재를 두 고 內三門을 지나 공자의 제자들과 현인들을 위패를 모시는 동,서무(東, 西●)가 위치하고 그 위에 先聖을 祭享하는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4) 전면의 明倫堂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동재, 서재는 명륜당을 중심에 두고 동서에 각각 4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형식의 건물이다. 동재 뒤쪽에 평행으로 교직사(敎直舍)가 있다.

 

5) 東●, 西●는 내삼문을 지나 大成典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마주보며 각각 9현을 모시고 있는 맞배지붕 형식의 전면 3칸, 측면 2칸의 와가이다.

 

6) 대성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익공형이다.

 

7) 향교의 봉사(奉祀) 기능에는 봄, 가을 두 번의 석전제(釋奠祭)가 있다. 중국의 五聖(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孔文10철, 宋朝6현, 우리나라 18현이 서무에 (남계 박세채, 우암 송시열, 중봉 조헌, 우계 성훈, 하서 김인후, 회재 이언적, 일두 정여창, 포은 정몽주, 고운 최치 원) 9위와 동무에 (빙월당 설총, 최헌 안유,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 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사계 이장생, 실녹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9 위에 모두 39위를 서무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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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기념비

 

1) 흥학비 당시 부임 중 향학에 공이 많은 분들로 부사 조공종저흥학비, 부사 안 공경운흥학비, 부사 이공구영거사비, 부사 임공희교흥학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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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양향교중건비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에게 교육과 교 화하는 뜻을 알리기 위해 세운 비(碑)다.

 

3) 공부자묘정비(孔夫子墓庭碑) 유가의 창시자 공자(B.C551~B.C479)의 사상과 인류사에 남긴 영향들을 기록한 碑다.

 

4) 모성단(慕聖壇) 양양읍 선비 이종국, 고성재, 김익수, 조도원, 황낙기, 김윤기, 최선 재, 김용석 등이 단기 4332년 기묘 8월에“양주행우회“라는 모임을 만 들어 유교를 숭상하고 성인들을 흠모하며 향교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단 이 입구에 배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