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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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729회 작성일 2014-04-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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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해설 김재환

 

청동기시대 무덤형태

 

1. 인류의 등장과 선사시대의 시작

 

1) 인류의 등장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35억 년 전 바다에 미생물이 나타났으며, 그 후 약 2억 9천만 년 전에 공룡이 지구에 나타났다. 그리고 약 400만 년 전 인류의 첫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나타났고, 한반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70만 년 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그 증거로 단양의 굴에서 동물의 뼈와 도 구들이 발견되었으며, 충청북도 청원군 두루봉에 있는 동굴 여러 곳에서 지금은 멸종된 동굴 곰 화석이 발견 되고 4만 년 전에 살았던 흥수아이의 유골도 발견되었다.

1만 년 전쯤 빙하는 완전히 물러가고 날씨가 따뜻해져 얼음이 녹고 바다가 높아져 오늘날의 환경과 비슷해 졌으며, 바다에는 커다란 고래도 살고 물고기도 많았고, 썰물 때에 갯벌에 나가면 조개를 쉽게 잡을 수 있었 다.

(주) 흥수아이 :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화석 인류는 1983년 발견자 김흥수의 이름을 따서 흥수아이 라는 이름을 붙였다 흥수아이는 약 4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5살 때 이 동굴 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뒤통수가 튀어나와 요즘의 말로 표현하면 짱구였다. 흥수아이가 세계적 으로 주목받는 것은 장례풍습에 의해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1983년 발굴당시에 흥수아이는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 있었는데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놓고 고운 흙을 뿌렸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2) 구석기시대 ~ 철기시대의 변천과정

 

(1) 구석기 시대

·70만년전 - 곧선사람이 한반도에 들어오고 찍개 주먹도끼 같은 뗀석기를 사용함.

·50만년전 - 평안남도 상원 검은모루 동굴에서 사람이 살았다.

·만2천년전 -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

※ 1984년 서울대학교 조사단이 손양면 도화리 일원에서 전기 구석기에 속하는‘아슐리앙’계통 의 토기가 출토되어 이시기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

 

(2) 신석기 시대

·기원전 8천년경 - 한반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환경이 오늘날과 비슷했다.

·기원전 6천년경 - 움집에서 살았으며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를 만들었으며, 양양 오산리에서 신 석기 인들이 살았다.

·기원전 5천년경 - 서울 암사동에서 신석기 인이 움집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하다.

·기원전 2333년 - 단국 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

 

(3) 청동기 시대

·기원전 2천년경 - 중국 만주지역에서 청동기 사용 시작하였다.

·기원전 1천년경 - 한반도에서 민무늬토기를 만들고 청동기 사용함.

·기원전 8백년경 - 고조선이 발전하여 중국 제나라와 교역을 하다.

·기원전 450년경 - 중국 쑹화강 상류에 부여가 세워지고 한반도 남쪽에는 진국이서다.

(주) 진국 : 초기철기문화를 배경으로 기원전 3∼2세기경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살았던 정치 집단이다.

 

(4) 철기 시대

·기원전 400년경 - 한반도에 철기 문화가 들어오다.

·기원전 221년 - 연나라의 공격으로 고조선 서쪽 땅 2000여리를 빼앗기다.

·기원전 194년 -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다.

·기원전 109년 - 한무제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다.

·기원전 108년 -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이 멸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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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사인 들의 도구

 

1) 뗀석기 종류

뗀석기는 말 그대로 떼어낸 돌이다.

찍개는 가죽을 벗기거나 땅을 팔 때 썼고

밀개는 나무껍질 등 단단한 껍질을 밀어내 부드럽게 만들 때 썼다.

찌르개는 사냥을 할 때 쓰려고 끝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주먹도끼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 만능 찍개였다.

 

2) 뗀석기 쓰는 법

주먹도끼는 사냥을 하거나 털과 가죽을 분리할 때

긁개는 짐승 가죽을 벗겨 손질할 때

찌개는 나무를 자르거나 사냥할 때

뚫개는 옷감을 만들거나 구멍을 뚫을 때

 

3) 뗀석기 만드는 법

모루떼기는 돌을 쥐고 땅위에 있는 큰 돌에 내리쳐 떼어내는 방법

간접떼기는 뼈나 뿔을 이용하여 [끌(뼈, 뿔)과 망치돌]을 이용하여 떼어내는 방법

눌러떼기는 뾰족한 뿔 도구로 돌감을 가공해서 정교하게 잔손질을 하는 방법

직접떼기는 돌을 쥐고 망치 돌로 때려 떼어내는 방법

※ 선사인 들의 도구였던 주먹도끼에 날 하나를 더 만드는데 수천 년 어쩌면 수 만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3. 고조선의 건국

고인돌은 한 씨족이나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족장과 그 가족의 무덤으로 그 무덤을 세우려면 우두머리의 힘 이 아주 커야했으며, 그 시기에 사람들이 청동기를 각기 시작하면서부터 큰 힘을 가진 우두머리가 등장했는 데 한반도에도 그런 힘을 바탕으로 우리겨레의 나라가 처음 탄생했는데 바로 단군 왕검이 세운 고조선이다.

조선이라는 말의 기원은 대체적으로 조용하고 신선한(鮮) 아침(朝)햇빛이 처음 비치는 곳이란 뜻이라고 학 자들은 보고 있다.

고조선의 수도는 아사달이며, 아사달이란 말은 임금이 사는 큰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아사달이 실 제 어디를 말하는지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세워진 고조선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며 더욱 강한 나라가 되었다. 고조선 이후 만주지역에는 부여와 고구려 한반도에는 옥저 동예 마한 변한 진한이 등장했다.

 

 

 

4. 청동기 시대

 

1) 청동기의 시작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자 지배자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농사가 점점 중요해지면서 농사 짓기에 좋은 땅이나 필요한 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이 일어났는데, 마을로 쳐들어와 추수해 놓은 곡식을 몽땅 차지하는 자들 이 나타났다.

사냥한 짐승을 빼앗기면 며칠 굶으면 되지만 거두어들인 곡식을 빼앗기면 일 년치 식량이 없어졌고 게다가 싸움에 지면 집을 잃고 끌려가서 노예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 겨레가 금속도구를 처음 사용한 시대는 BC 1,000년 전인데, 대체로 청동기 문화는 BC10세기 무렵부 터 중국 요령 지방에서 한반도로 들어왔는데, 이들이 예족과 맥족, 곧 예맥족이 우리의 조상이기도 하다.

청동기시대라고해서 모든 사람이 다 청동무기를 쓴 것은 아니다.

고인돌 안에서 발견되는 청동화살촉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은 모두 제사를 지낼때 쓰는 도구다. 따라서 고인돌에서 나온 청동검도 사실은 적을 무찌르는 칼이라기보다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도구였으며 특히 지도자 는 8개의 방울이 달린 팔주령을 들고 제사를 지냈다.

 

2) 청동기의 종류

(1) 무기 - 비파형동검, 꺽창, 세형동검, 투겁창 등

(2) 공구 - 청동끌, 청동칼, 청동도끼 등

(3) 치레거리 - 청동단추, 청동방울, 청동거울 등

 

3) 청동검 만드는 법

(1) 구리(Cu)에 주석(Sn) 또는 아연(Zn)을 넣고 불을 피운뒤 온도(약600도)가 올라가면 쇳물을 얻을 수 있다.

(2) 거푸집에 쇳물을 붓고 거푸집은 끈으로 묶는다.

(3) 거푸집이 식으면 청동기를 꺼내어 숫돌에 갈아서 날을 세우거나 다듬는다.

 

4) 화폐로 사용된 쇠 덩이와 명도전

우리조상들은 쇠 덩이가 매우 귀하고 중요한 물건이라 마치 화폐처럼 사용 했는데, 경남 창원 다호리에서 는 날을 세우지 않고 자루도 끼우지 않은 쇠도끼 2점을 엇갈리게 포갠 뒤 끈으로 묶어서 무덤에 묻은 것이 출토되었다.

전국시대의 중국연나라에서 사용하던 명도전이 고조선영토에서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중국 연나라와 무역을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명도전은 겉면에 한자로 밝을 명(明)자 비슷한 글자가 새겨져있고, 모양이 칼과 같으며 끈이나 줄 따위로 꿰어 여러 개를 간수 할 수 있도록 손잡이 부분에 구멍이 나 있으며 칼 도(刀)자를 써서 명도전(明刀錢)이라고 했다.

 

5) 농경(벼농사)생활의 발전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그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차이가 있지만, 최근에는 후기신석 기시대에 유입되어 청동기시대에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에서 볍씨가 불에 탄 이 볍씨를 탄화미라고 부르는데, 경기도 고양 일산, 여주 흔암 리, 충남 부여 송국리, 충북 청원 소로리에서 나왔다.

고고학자들은 이 볍씨들을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알아보니 충북 소로리에서 나온 볍씨는 1만 3천년에 서 1만 5천 년 전의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인정받았다.

소로리 볍씨는 재배종과 야생종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한반도에 살았던 후기 구석기인들이 쌀을 가장 먼저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6) 양양지방의 청동기시대 유적

1970년대 초반 감곡리와 범부리 고인돌이 확인된 이래 최근까지 포월리, 수여리, 학포리, 상양혈리, 하광 정리, 조산리, 사천리, 강선리, 기정리, 밀양리, 포매리, 원포리, 지리, 임호정리, 입암리, 등 비교적 많은 곳 에서 다수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많은 이들이 주요 하천의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삶의 터전을 가꾸면 서 살았음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아울러 일정한 규모의 토착집단이 거주하였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 유적 중에서 포월리유적, 밀양리유적, 임호정리유적, 지리유적이 발굴되었으 며 최근 영동지방 최초로 청동기시대의 분묘유적인 송정리 토광묘 1기가 새로이 조사되었다.

발굴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돌창, 민무늬토기, 구멍무늬조각, 밑동조각, 반달돌칼, 돌작살, 화살촉, 돌도 끼, 숫돌, 돌끌, 돌대패, 홍자귀, 가락바퀴 등이 출토되었다.

 

 

 

5.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우리나라 고인돌

 

2000년 12월 2일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WHC)는 전남 화순, 전북 고창, 강화도의 고인돌 떼를 세계문 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 고인돌의 종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형식 가운데 하나가 고인돌이다.

유럽을 비롯해 인도 동남아 중국의 절강성과 요령성 그리고 일본 규슈 지역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있다.

평안북도와 함경북도 산간지대를 제외한 전국에 고르게 분포하며 그중에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평안 남도와 황해도 그리고 전라북도 등 서부지역에 밀집되어있는데, 전라도 지역에만 약 2만 여기가 분포한다.

강화도의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이었다면 전라도 고창과 화순지역에는 고인돌이 때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곳은 부족의 공동무덤이었다.

고인돌은 그 짜임새에 따라 크게 2가지 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북방식(北方式)이며, 다른 하나는 남방식(南方式)이다.

북방식은 그 형태에 따라 탁자식 으로 부르며, 조사된 지역의 대표적인 지명을 붙여 오덕형(五德形)으로도 부른다.

남방식은 변형(變形) 또는 조사된 지역의 대표적인 지명을 붙여 침촌형(沈村形)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북방식은 주검을 안치하는 곳, 즉 주검 칸이 지상에 들어나 있으며, 남방식은 주검칸에 지하에 설치된 것이다.

남방식은 다시 큰 윗돌[上石]이 괴임돌로 고여진 바둑판식[支石式]과 괴임 돌이 없는 개석식[無支石式]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형태에 따라 탁자식고인돌, 바둑판식(기반식)고인돌, 개석식(구덩식)고인돌, 위석식고인돌을 4가지 로 분류했는데 이는 고인돌의 생김새를 보고 지은 이름이다.

 

(1) 탁자식고인돌 -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모양이 탁자와 닮았다. 두꺼운 판돌 4개 를 세워 네모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으로 무덤방을 지상에 노출시키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대게 2-4m정도가 보통이나 8m이상인 것도 있고, 전체높이가 2m이상인 경우도 있다.

 

(2) 바둑판식고인돌 - 바둑판식은 탁자식과 반대로 당속에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돌을 올 려놓은 것이다. 땅위에 놓인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바둑판고인돌이라 불리고 주로 전라도 경상도 한강 이남지역에 분포되어있다.

 

(3) 개석식(구덩식)고인돌 - 덮개돌과 지하 돌방 사이에 받침돌이 없어 덮개돌이 직접 무덤방을 덮고 있는 형 식으로 무지석식 도는 놓인 형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를 바둑판식 고인돌에 포함시키기도 합 니다. 이고인돌은 한반도 전역에 분포되어있어 우리나라 고인돌의 대표적인 형식이라 볼 수 있다.

 

(4) 위석식고인돌 - 제주도에만 분포하고 있으며, 덮개돌 아래에 자연석이 고임돌로 돌려져 그 자체가 주 검 칸을 겸한 형태이나 외형적으로는 고임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임돌은 덮개돌 아래에 6~16매가 돌려져 있는데 고임돌을 잇대어 놓은 것과 고임돌을 작은 돌로 쌓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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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인돌 만드는 방법

 

(1) 바위 돌 쪼개기 : 먼저 사용할 돌을 찾아낸 다음 바위덩이에서 돌 판을 떼어낼 경우 바위 결을 따라서 난 틈에다 깊은 홈을 파서 나무 말뚝을 박고 홈에 물을 채운 후 나무가 물에 불어 팽창하면서 바위가 갈 라진다.

 

(2) 바위 돌 옮기기 : 먼저 길을 따라 큰 통나무를 기차 길처럼 깐 다음 그 위에 다시 통나무를 얹고 돌을 통 나무위로 옮겨놓고 밀면서 앞으로 나간다.

 

(3) 굄돌 세우기 : 무덤을 쓸 곳에 돌을 옮겨 바침으로 굄돌을 세우고 양 옆에는 굄돌이 넘어지지 않도록 쐐 기돌을 박는다.

 

(4) 덮개돌 올리기 : 굄돌을 세운 윗부분 까지 흙을 덮어 양쪽으로 비탈길을 만든 다음 줄을 이용하여 덮개 돌을 끌어올린다.

 

※ 덮개돌은 수백 톤이〈사진-5〉넘는 것도 있으며, 이 커다란 돌을 옮기려면 백여 명도 넘는 사람이 필요 하였을 것이다.

 

(5) 무덤방에 시신안치 : 무덤방 안에 흙을 제거하고 시신을 안치한 뒤 큰 돌로 문을 막으면 고인돌이 완성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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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양지방의 고인돌 현황

 

(1) 범부리 1호고인돌

범부리 1호고인돌의 덮개돌은 장방형판석으로 크기는 길이 2m 너비 0.83 ~1.45m 두께 40cm 덮개돌 밑 에는 판석으로 구성된 석관 형 하부구조의 석실은 동벽은 2매 서벽은 1매 판석이고 남벽과 북벽은 결실되고 바닥은 1매의 판석을 깔았다.

 

(2) 범부리 2호고인돌

이 고인돌은 1호고인돌과 인접해 있으며 덮개돌 크기는 길이2.06m 너비 0.77m 두께 40cm 이다

 

(3) 수여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마을에서“칠성바위”로 불리고 있으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덮 개돌 형식의 돌은 동~서 방향으로 길이 3.1m 너비 2.35m 두께 30~40cm이며 덮개돌 사방으로 1~1.4m 거 리에 두레돌이 세워져 있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4) 금강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금강리 고인돌로 알려져 왔으나 그 위치가 수여리에 소재하고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 길이 2.5m 너비 1.8m 두께 40cm 길이 80cm 두께30cm 크기의 장대석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다.

 

(5) 기정리 고인돌

이 고인돌은 포월리 48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으며 덮개돌의 길이는 2m 너비 60cm 두께가 50cm이다

 

(6) 포월리 1호고인돌

이 고인돌은 폭 1m 내외로 덮개돌 중간 부까지 쌓여있고 덮개돌의 방향은 남에서 북향이며 크기는 길이 2.5m 너비 1.7m 두께 20cm이다

 

(7) 포월리 2호 3호 고인돌

이 고인돌들은 1992년 양양군에서 포월리 농공단지 조성 시 강릉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으며 2기 중 1기는 유물의 보전과 후세의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이전 원형대로 복원하여 전시중이며 나머지 1기는 매몰처리 되었다.

 

 

 

4) 순장제도

고대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몸은 없어지더라도 영혼은 불멸한다고 믿었다.

구름도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고 겨울에 땅 밑에 숨었던 식물들도 봄이 되면 끊임없이 새로 피어난다. 사람 들은 이 같은 자연의 순환을 보고 모든 것이 부활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죽음은 이승의 삶이 저승까지 이어 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았을 때 쓰던 물건들과 부리던 시종 곧 노비를 함께 매장했다. 많을 경우에는 100 여명 적을 경우에는 수십 명에 이르는 노비가 주인의 무덤에 같이 묻혔다. 이렇게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잔인한 풍습을 순장이라고 한다. 순장은 현재의 지배자들이 죽음의 세계에서도 현세 때의 영화를 누리려는 의도에서 만든 장례방식인데, 소모품처럼 산 사람을 일부러 죽여 묻거나 산채로 묻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