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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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60회 작성일 2014-04-2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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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해설 이규환

 

◆ 낙산사 전설 ◆

 

고려 중 익장(益莊)의 기문에,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부처를 거룩하게 이르는 말) 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 배례(展坐拜禮)하였다. 7일간씩 2회에 걸쳐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 래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바로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그루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 (像設)을 안배하라.’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 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 는바, 이절이 곧 낙산사이다.

조선 태조(李成桂)의 증조부(曾祖父)인 익조(翼祖)께서 정숙왕후(貞淑王后)와 함께 여기에 와서 후사〔後嗣: 대(代)를 잇는 아들〕를 점지〔자식을 잉태(孕胎)하게 하여 줌〕하도록 기원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가사(袈裟: 승려가 입는 법의)를 걸친 중이 와서 알리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은 선래(善來)다.”하였 다. 얼마를 지나서 도조(度祖)를 낳으므로 드디어 선래라 이름 하였다.

조선 태조가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윗사람의 명령이나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하는 사람〕를 보내 사흘 동안 제(祭)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항규〔恒規:보통 있는 흔한 예(禮)〕로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양양도호부 불우 편)

 

 

 

낙산사 일원 (1)

 

- 사적 : 국가지정문화재 제495호 (2008년 12월 18일 지정)

- 위치 : 강현면 전진리 55

- 면적 : 92,637㎡(28,022평)

낙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로서 해변에 위 치하며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낙산은 산스크리트〔고대 인도 아리안 말, 불경이나 고대인도 문학은 이것으로 기록 됨〕어의 보타락가(補陀洛伽)에서 유래한 말이며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곳을 뜻한다.

낙산사는 신라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친견하 고 창건 했다는 사찰로 수차례 전화로 파괴와 복원이 되풀이되면서 현재에 이른 동해안을 대표하는 관음도량 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일원은 2005년 4월 5일 산불로 인해 원통보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소진되었다. 옛 모습을 되찾으면서 문화재로서의 중요도가 재인식되어 2008년 12월 18일 국가지 정문화재로 승격 지정되었다.

 

 

 

홍 예 문 〔2〕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1971년 12월 16일 지정)

세조 13년(1467년) 왕이 직접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키 위해 세조의 명으로 당시 도내 소속 26개 고을에서 석재를 하나씩 추렴[出斂]해서 사찰의 입구에 만든 무지개 모양의 석조문(石造門)이다. 또 인근 마을의 이름이 정암리가 된 것도 이들 석재를 다듬던 동네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홍예문 위 누각은 1963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김유성〔金有 聲.1763~1764〕이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세이켄사〔淸見寺〕’주지의 요청에 의하여 그곳에 그려 놓고 온 낙산사도(洛山寺圖)에 홍예문 누각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18세기 이전에 누각이 있었다고 본다. 지금의 누각은 2005년 산불로 전소 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낙산사 담장 〔3〕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1971년 12월 16일 지정)

낙산사 원통보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세조 때 낙산사를 중수할 때 처 음 쌓았다고 하는데 기와와 흙을 차례로 다져 쌓으면서 중간에 원형 돌을 박아 넣 어 조형미가 뛰어나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형으로 남아 있던 담은 원통보전 배면에 쌓은 5.8m와 좌측 21m, 우측 8m에 불과 하였다. 2002년 태풍 루사 때 피해를 입어 보수하였다. 그러나 2005년 산불로 또 훼손 되어 보수하였는데 담의 평균 높이는 약 3.8m이며, 총길이는 220m이다.

 

 

 

칠층석탑 〔4〕

-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499호 (1968년 12월 19일 지정)

석탑은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3층으로 건립하였는데 조선 세조 때에 현재와 같이 7층으로 다시 건조한 조선 초기 다층 석탑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양식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기단부의 지대석은 2단으로 자연석 위에 정방형을 올린 형태이며 윗면에는 한 변에 6개씩 총24개의 겹 연꽃무늬를 초각(●刻)하였다.

이러한 문양은 고려시대 이후 양식으로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제87호)과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에서 볼 수 있다. 세조는 숭유억불정책을 표방했던 조선왕조에서 세종, 명종과 더불어 불교를 지원한 왕이었다.

 

 

 

건칠관음 보살좌상 〔5〕

-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362호 (2003년 2월 3일 지정)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조선시대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불상 으로 나무, 종이, 천으로 만든 불상 위에 건칠을 한 뒤에 도금한 것으로 강원도에 서는 거의 유래를 볼 수 없는 건칠기법의 불상이다.

높이 1.44m로 적당한 크기의 이 불상은 후대에 만든 금속제 8각 대좌 위에 결가 부좌(結跏趺坐)한 상태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약간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는 형상으 로 앉아 있다.

세조 년간 인 15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조성 년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는 상태이다.

전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이후 인근 양양읍 화일리 영혈사에서 옮겨왔다고 알려 져 있는 데 이로 인해 두 사찰 사이에 논란이 있고, 2005년 산불 때 낙산사 스님 들이 재빨리 옮기는 덕에 피해를 입지 않고 현존하고 있다.

 

 

 

공중사리탑 〔6〕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5호 (1982년 11월 3일 지정)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진 사리탑으로 부도형 사리탑은 현존하는 사례가 많 지 않아 가치가 높다.

2006년 4월 28일 옥개석을 해체 보수하던 중 탑신 상부에서 사리장엄구(금제 함, 은제함, 청동제 외함, 관련기록물 등)가 발견되어 새로이 주목받게 되었으며 홍련암 근처에 있는 해수관음 공중사리비에 기록된 공중사리탑과 관련된 내용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9년(1683년) 홍련암 개금불사 도중 공중에서 사리가 떨어져 이를 봉안키 위해 사리탑을 세웠고 이로 인해 공중사리탑으로 불린다고 했는데 실 제로 사리가 발견되어 비문의 기록이 확인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격상되 었다.

홍련암 인근에 있는 높이 2.12m의 해수관음 공중사리비도 이현석〔李玄錫, 1647∼1703년〕이 춘천부사로 있던 1693∼1694년에 썼다고 하는 비문의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 지정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의상대 〔7〕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1974년 9월 9일 지정)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하여 이 일대를 의상대라고 불렀다 고 한다.

의상대의 정확한 창건연대와 존치여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근대 이전에 폐허가 되었던 듯하다. 1925년에 낙산사 주지 김만옹(金晩翁)스님이 이곳에 정자를 중건하였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고, 스 님은 그 소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하였으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져 1937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해안 절벽위에 위치한 전국 굴지의 아름다운 곳이지만 해풍에 약하여 부식이 잘 되는 취약점도 있다. 따라서 1975년, 1995년, 2005년 각각 세차례 중건되어 현재 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곳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낙산사와 함께 일출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어 예나 지금이나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새해 해맞이 행사 때에는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홍 련 암 〔8〕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1984년 6월 2일 지정)

의상대사가 문무왕 16년(676년)에 창건하였다. 의상대사가 동굴 속으로 들어간 파랑새를 쫓아가서 석굴 앞 바위에서 기도하다 붉은 연꽃 위의 관음보살을 친견하 고 세운 암자로 낙산사의 모태가 되는 곳이다.

이후 수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렀는데 중요 중건기록은 조선시대 4 회〔광해군 11년(1619년), 영조 28년(1752년), 정조 21년(1797년), 고종 6년(1869 년)〕와 일제강점기인 1911년과 광복이후 1975년 2002년 각각 중건 되었다.

홍련암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불전 내부 바닥의 구멍을 통해 해안절벽 아래 관음굴을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산불로 주변이 대부분 불탔으나 필사적인 소화작업으로 불전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아 영험함을 더해주고 있다.

 

 

 

해수관음상 〔9〕

-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

이 해수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 서 약 700여 톤을 운반해와 높이 16m, 둘레 3.3m, 최대너비 6m로 조각(彫刻)한 것이다.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옆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했다. 관 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甘露水甁)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手印)을 짓고 있으며, 해수관음상 앞에 는 기도처인 관음전이 있다.

 

 

 

보 타 전 〔10〕

- 보타전은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요, 우리나라의 대 표적 관음도량임을 상징하는 전각으로서, 1991년 7월 짓기 시작해서 1993 년 4월 10일에 완공했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는 처음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성관음(聖觀音)·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준제관음(准堤觀音)·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상과 32응신 상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앞면 중앙에 천수관음을 비롯해서 좌우로 6관음, 그리고 뒤쪽으로 천오백관음 상이 있다. 천수관음은 입상이며, 나머지 6관음은 좌상이다. 낙산사 천수관음은 32관음신상으로도 불러지는데, 그 뒤쪽으로는 목각 후불탱이 조성되었다. 보타전 안에는 그밖에 동종과 금고(金鼓)가 있다. 전각 외부벽화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불교설화 〔11〕

- 범일국사(梵日國師)

신라 헌덕왕 2년(810년)에 태어나 진성여왕 3년(889년)사망하였다. 속성은 김 (金)씨이고 흥덕왕 때 당나라에 유학하다 847년에 귀국하고 851년에 강릉시 구정 면 학산리에 굴산사(掘山寺)를 세우고 수도하였는데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다.

굴산조사로 추앙받은 범일 스님은 젊은 시절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에 있는 개국사(開國寺)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왼쪽 귀가 잘린 한 스님이 말 석에 앉아 있다가 스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저도 신라 사람입니다. 집은 명 주 부근 익령현 덕기방에 있지요.

스님께서 훗날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제 집을 지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님 은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이역만리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반가움이 컸는지 깊이 생 각하지 않고 일단 승낙하였다. 유학을 마친 스님은 신승으로 유명해지면서 강릉 굴산사를 세웠다.

10여 년이 지난 858년의 일이었다. 2월 보름날이었는데 꿈에 전에 당나라 명주 (明州)땅 개국사(開國寺)에서 만났던 귀가 잘린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은 범일 스님의 처소 창문 밑에 와서 말했다. 전에 명주 개국사에서 스님과 언약을 하여 이미 승낙을 하셨는데 어찌 이렇게 실천이 늦습니까? 스님은 놀라 깨어났다.

그제야 10년 전 자신이 약속했던 일이 떠올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익령(翼嶺) 부 근 덕기방(德耆坊)이 집이라는 것도 생각났다. 날이 밝자마자 사람들을 데리고 익 령에 가서 덕기방이라는 곳을 찾았으나 그런 지명은 없고, 단 여인이 낙산 아랫마 을에 사는데 그 이름이 덕기라고 했다. 스님은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여인을 찾아 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여인은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했다.

그렇지만 여인이 말하기를 자신의 여덟 살 난 아들이 늘 마을 남쪽에 있는 돌다 리 근처에 나가 놀곤 했는데 며칠 전에는 같이 노는 아이 가운데 금빛 나는 아이가 있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놀랍고 기쁘기도 하여 아이를 데리 고 그 아이가 놀던 다리 밑에 가보니, 물속에 돌로 만든 보살상 하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꺼내어 보니 왼쪽 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영락없이 예전 중국에서 만났던 그 스님이었다.

스님은 단박에 이 보살이 정취보살인 것을 깨달았다. 이에 범일 스님이 절 지을 곳을 점쳐보니 낙산 위가 좋다고 하므로, 헌안왕 2년(858년) 낙산사의 상방(上方) 에 불전(佛殿) 3간을 짓고 돌부처를 봉안(奉安)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