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5호

현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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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295회 작성일 2014-04-2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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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공원

해설 김양식

 

현산공원은 양주성의 일부로 양주성은 현산공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내리 쪽으로 완만하게 돌아 성황사 (城隍祠)를 애워싸면서 구교리 방향으로 내려오는 형태로 동쪽과 서, 북쪽을 둘러싼 반달 모양의 현산을 따라 축성한 성곽으로 낮은 구릉지대였는데 남쪽면은 남대천이 서쪽에서 동쪽의 동해로 흐르고 있어 마치 광대한 해자(垓字)를 이루고 있는 듯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았으므로 천혜의 요새라 하겠다.

양주성은 양양읍성이라고도 하는데 역사는 약 천 년 전으로 우리나라 중동부 변방의 수어기지로 북호남왜 (北胡南倭)의 숱한 외침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제7대 목종10년(1007년)에 양주 성을 처음으로 축성하였으며, 조선 제3대 태종 13년(1413년)에 도호부를 두면서 동헌을 중심으로 서, 남, 북 문을 설치하고 석성을 길이 430척, 높이 50척의 규모로 쌓고 토성을 길이 2,825척으로 쌓았으며 성 안에는 2개의 우물을 시설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공원에는 충혼탑, 필승탑, 3.1운동 기념비, 행정수복탑, 금석문비(선정비, 홍학비, 기념비 등) 공병탑 이 있다

 

 

 

가) 충혼탑

1) 일제에 항거한 독립열사 22위

2) 공산치하를 항거한 반공 애국지사 106위

3) 6.25 한국전쟁 중 순국하고 월남전에서 전사한 영령 187위

4) 1966년 6월 6일 헌충일 건립 - 총 315위의 충정을 기리는 탑, 1981년 보수, 정명시 군수의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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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행정수복기념탑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양양은 38도선 이북인 관계로 공산치하에 귀속 6.25 한국전쟁 후 행정 수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54년에 건립한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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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독립문

6.25 한국전쟁 종식 후 군단산하 1101야전공병단이 양양지역의 도로, 관공서 및 학교 건축물 등 재건한 공을 기리는 수복기념 공병탑.

당시에는 군청 사거리에 건립 - 양양교 입구 제방 - 현산공원으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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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필승탑

1953년 6.25 한국전쟁 당시 제1군단 부군단장이며 제29사단장을 역임했고 “태권도”정식 명칭을 만들었던 최홍희 장군이 북진통일을 기약하며 직접 자필 로 쓴 기념탑(가로 2.4m 두께 0.5m 높이 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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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3.1운동 기념비

1) 1905년 을사조약 체결 -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2) 1907년 7월 고종황제 호위와 이완영 내각, 사법권 강탈, 국군 해산

3) 1908년 6월 양민 학살 - 함홍기, 김덕기 외 12명

4) 1919년 1월 고종황제 승하 - 독살설, 국장에 참여했던 이석범 (도문동) 주도

5) 1919년 4월3일 임천리에서 22명 체포. 각 면에서 태극기 1,100여개 제작

6) 4월 4일 장날을 기해 각 면별로 양양장으로 집결하여 만세운동 참여

7) 4월 5일 물치 장날을 기해 강현면, 도천면 주민들의 조직적인 만세운동 참여

8) 양양보통학교 학생, 감리교회 청년회, 6개면 82리 마을에서 약 6,000여명 동참

9) 동아일보 창간 45주년 기념사업으로 1974년 동아일보사와 양양군 협찬회 공동으로 건립 - 전국 지방에서는 양양에서 가장 극열하게 만세운동 전개(순국의사 12명, 수형자 73명, 부상자 21명)

10) 독립선언문 전문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 하노라. 차로서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서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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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현산정

1700년 숙종 26년 부사 남치훈이 창건하였다.

남쪽 성문루(현 의회 앞)에 위치 영조 24년 부사 박필정이 중건하고 현판은 채팽윤이 썼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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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政碑(현산공원 선정비)

1) 도호부사 임후목 청덕선정비 - 1433 세종 15년, 흉년에 굶주리는 부민에게 선정, 문중에서 최근 제작. <앞줄 우측에서 2번째>

2) 부사 권 진 선정비 - 1610~1611 광해군 때 문신, 재직 중 혹정하여 부민이 먼저 선정비 세움으로 각성 하여 청렴관후가 된 사례.<앞줄 우측에서 7번째>

3) 부사 이경용 인정비 - 1630~1632 인조 8년.<뒷줄 우측 9번째>

4) 부사 유 항 선정비 - 1633~1635 인조 때, 연화문의 비갓

5) 부사 이상일 선정비 - 1644~1649 인조 22년, 백성들의 억울함을 달래던 타루비, 당시 구교리와 연창 리 사이 길에서 이전.

6) 부사 강호 청덕불망비 - 1660~1664 효종 때 문신, 1669년 강원도 각 지역이 강등될 무렵 원양도 관찰사 제수

7) 현감 한명상 불망비 - 1691~1692 숙종 때, 구름무늬 비갓

8) 부사 김연 청덕선진불망비 - 1697~1698 숙종 23년, 장학에 힘쓴 공.<앞줄 우측에서 5번째>

9) 부사 양중하 선정비 - 1702~1705 숙종 때, 비갓없이 둥근 모양.<앞줄 우측에서 8번째>

10) 부사 정필동 선정비 - 1706~1707 숙종 32년 부임, 풍속교화<앞줄 우측에서 3번째>

11) 부사 채팽윤 선정비 - 1722~1724 경종 때, 정사에 탁월하고 현산정 현판글씨, 동해묘 중수, 당시 읍사 무소 정원에서 발굴 이전.<좌측 별단에 안치>

12) 부사 류경시 선정비 - 1727 영조 3년 부임, 교학 진작시킨 공, 부민이 거문고(양양금) 증정, 현재 경북 안동시“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소장, “경북도유형문화재 제314호 지정”되어 악보와 함께 전시. 문중에서 최근 제작.<앞줄 우측에서 1번째>

13) 감사 유득일 영세불망비 - 1757~1757 영조 33년, 강원도 관찰사

14) 관찰사 강선 영세불망비 - 1765~1767 영조41, 부역 감소의 공<앞줄 우측에서 10번째>

15) 부사 이광식 영세불망비 - 1808~1783 순조 8년, 이후 이조참판 벼슬, 유일하게 양각된 철비이다. <뒷줄 우측에서 6번째>

16) 부사 권중민 선정비 - 1823~1825 순조 23년 부임, 법 질서 확립<뒤줄 우측에서 6번째>

17) 부사 정기풍 선정비 - 1848~1850 헌종14년 부임, 구름 비갓

18) 군수 조관현 불망비 - 1896~1900 건양 1년 일제 때 토비중대장을 겸임 부민 의병을 진압, 비의 절반 이 땅에 묻혀있다.<뒷줄 우측 8번째>

19) 마모 (찰) 확인불가 - 둥근 머리 비갓

20) 김정순선생 교학송덕 기념비 - 개화초기에 현산학원에서 부국강병 역설 한국최초 여교장 부임, 광복 후 양양지방인민위원장 역임, 한국전쟁 이후 작고.

21) 대풍수재조난자 위도비 - 1936년 7월 11일 병자년 포락 시 조난 및 사망자(약 600~1,000명) 위로비, 비문과 휘호는 원창희의 소작이다. 당초 서문리의 노변에서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