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6호

襄陽獐里의‘校界’刻字의성격을어떻게볼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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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05회 작성일 2015-06-0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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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발표 ●

襄陽 獐里의‘校界’刻字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규대(강릉원주대학교 교수)

 

 

 

 

 

1. ‘校界’의 字典的 의미

2. 양양지방 황장금표는 두 곳에 설치되었다.

3. 獐里 마을 형성과 특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4. 獐里 ‘校界’ 禁標가 갖는 의미와 과제?

 

 

 

 

 

襄陽 獐里의 ‘校界’ 刻字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규대(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양양지방은 전통 문화도시이다. 고대사회로부터 翼縣 襄州, 德寧, 襄陽都護府로 발전하면서 문화전통을 키워왔고, 이제 그 문화적 역량은 미래 지향적인 양양의 발전상을 담보할 것으로 본다.

양양지방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동향은 주목할 만하다. 불교·유교 문화로부터 서민들의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고 있다. 문화원을 중심으로 조직화 된 연구원들이 보여 주는 지방문화에 대한 애정과 열의는 이 지방 문화발전의 추동력이 될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오늘 이 토론회도 문화원의 연구실을 산실로 하여 추진된 것으로 본다. 이번 주제를 주목하면서도 여실히 느끼는 바이지만, 지방사 연구에서 자료 내지 사료를 확보하는 작업은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극복하고 해결해야할 성질의 과제이기에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외면하기 어려운 심정이다.

근간에 문화원 연구반에 의해 ‘校界’라는 각자가 발견되었다. 양양 현북면 장리에서 발견된 이 각자의 의미와 용도를 파악하는 것이 이번 토론회의 과제이다. 필자는 지난번 문화원 모임에서 이것이 禁標라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고, 이들과 함께 현장을 답사하여 각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손병섭이 쓴 논문 한편도 얻어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연구원의 견해를 정리한 문건도 얻어 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이들 자료를 방향타로 삼고 몇 가지 내용을 첨부하는 형태로 과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1. ‘校界’의 字典的 의미

 

『世祖實錄』권 27, 8년 2월 18일. 친히 『兵將說』을 짓다.

 

度我人, 則如之何? 觀天運, 校將士, 計曲直, 參勞逸是也,

 

내 사람을 헤아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천운을 살피고, 장수와 사졸을 살피고, 곡직을 헤아리고, 노일을 참작하는 것이다. 校計 : 하나하나를 헤아리다. 사전적 의미 - 계산하다. 하나하나 따지다.

 

『成宗實錄』권 218, 19년 7월 9일.

 

○苑囿提調啓事目:

一, 禁山外可獵之山數多, 而諸邑守令進上依憑, 日日馳獵, 未便。 山勢看審立禁標, 使不得私獵, 犯者論罪。

 

원유 제조(苑囿提調)가 사목(事目)을 아뢰기를,

“1. 금산(禁山) 외에 사냥할 만한 산의 수가 많은데 여러 고을 수령이 진상(進上)을 빙자하고 날마다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적당하지 아니하니, 산세를 살펴보고 금표(禁標)를 세워서 사사로이 사냥하지 못하게 하되 범하는 자는 논죄(論罪)한다.

 

漢韓大辭典』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校獵 : 나무로 울을 만들어 짐승의 도주로를 막고 사냥함. 널리 사냥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漢書, 成帝紀』冬 行幸長楊宮 從胡客大校獵.

「顔師古注」此校謂以木自相貫穿爲闌校耳…校獵者. 大爲闌校以遮禽獸而獵取也.

漢, 司馬相如,『上林賦』於是乎背秋涉冬 天子校獵.

唐, 杜甫『冬狩行』君不見東川節度兵馬雄 校獵亦似觀成功.

 

 

2. 양양지방 황장금표는 두 곳에 설치되었다.

 

양양지방에 황장목 금표는 2곳에 설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편, 『관동읍지』총록 상편에서 관련기사가 확인된다. 이로서 금표에 대해서는 양양지방에서 익히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며, 『양양의 땅 이름』과 손병섭 씨의 논문에서 그 실체가 파악되고 있다. 다만 ‘부연동금표’는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으나, ‘전림동금표’는 그 실체가 아직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그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關東邑誌』總錄 上, 黃腸 四十一處.

襄陽二 處

 

箭林洞封山 周回三百五十里 自官門一百里 東至盈德七十里 西至春川界七十里.

 

夫(?釜)淵山封山 周回三百里 自官門八十里 東至茅無洞六十里 西至旀(?綿)玉峙六十里

南至江陵界七十里 北至獐洞八十里.

 

먼저 하나는 箭林洞에 封山이 설치되었다. 지정된 봉산은 邑治로부터 100리 거리에 위치하며,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는 구역의 둘레가 350리 이다. 동쪽으로는 영덕에 이르기까지 70리 이고, 서쪽으로는 춘천과 경계를 이루는 지점까지 70리 이다.

다른 하나는 夫淵洞에 봉산이 설치되었다. 지정된 봉산은 읍치로부터 80리 거리에 위치하며,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하는 구역의 둘레는 300리 이다. 동쪽으로는 모무동에 이르기까지 60리 이며, 서쪽으로는 면옥치에 이르기까지 60리 이며, 남쪽으로는 강릉 경계에 이르기까지 70리 이며, 북쪽으로는 장동에 이르기까지 80리 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금표의 존재는 확인된다. 여기서 주목되어야 할 점은 금표가 파악되었다면, 이와 관련되는 생활상이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황장목을 벌목을 한다면, 그로 말미암은 노동력은 이곳 주민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이를 위한 인력 차출은 부역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삼척지방의 사례에 의하면 부역의 배정은 마을 단위로 分定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부역의 苦歇 문제는 관아를 상대로 치열하게 저항하는 형태가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사 이야기는 마땅히 주목되어야 하지만, 실상은 근거 자료의 부족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금표와 관련하여 이러한 자료가 생성되었음은 여타 시군의 사례에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에 대한 관심이 모아져 지속적으로 이어진다면 자료 확보의 기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3. 獐里 마을 형성과 특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먼저 조선시대 면리제는 邑治를 중심으로 편제되는 특성을 가진다. 洞山縣의 읍치를 중심으로 현북면과 현남면이 편제되고, 양양의 읍치를 중심으로 부내·동·서·남·북면이 편제된 것이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면리제는 사회경제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읍치 외곽이 개발되면서 정착된다. 그 초기 형태는 방위면체제라 할 수 있다. 이른바 동·서·남·북·내면 체제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방위면 체제하에서 새로이 형성되는 촌락이나 기존이 촌락이 分洞하는 형태로 면리제는 발달한다. 예컨대 신촌, 그리고 큰 마을과 작은 마을, 윗마을과 아랫마을 본동과 새마을 등을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자신들의 고유한 이름을 가지는 면리 명칭이 설정된다. 반면에 방위면의 명칭은 개명되면서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남면이 남1리면과 남2리면으로 분화되었다가 다시 그 명칭이 근덕면과 원덕면으로 개명되는 예를 살필 수 있다.

 

이 점에서 면리제는 도시발달사적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물론 그보다 중시되어야 할 사항은 마을 단위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상징적 祭儀를 가진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 城隍堂이다. 성황당은 자신들의 안위와 풍요를 기원하는 공간이지만, 마을의 독자성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도 주목되어야 한다.

예컨대 이곳 양양지방도 모든 마을에 성황당이 설치되어 있다. 물론 도시 중심부에서는 개발에 밀려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러나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어느 마을을 막론하고 설치되어 있다. 이것이 보편적 의미라고 한다면, 그곳에 모셔진 神의 모습 내지 神像의 의미는 각 마을마다 다양하여 그 차이를 보인다. 이것이 특수성이고, 이것이 마을 공동체의 독자성 내지 독립성을 상징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상의 개설적 내용을 전제로 장리 마을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세종 때 편찬되는『세종실록지리지』양양 편, 중종 때 편찬되는『신증동국여지승람』양양 편, 영조 때 편찬되는 『여지도서』양양 편, 19세기에 편찬되는 사찬읍지로서 『현산지』, 1976년에 편찬되는『향토지』등에서 현북면 장리 마을 공동체 확인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官撰邑誌와 私撰邑誌에서 장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1976년에 편찬된 읍지에서 장리는 “自古로 山獐이 많았으므로 獐里라고 부른다.”라고 부기하였다. 따라서 이 기록만으로는 어느 시점에서 마을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散居하는 주민들이야 일찍부터 이곳에 들어 와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지만, 이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결속을 도모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시기는 상당히 늦은 시기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또 한 가지는 官撰邑誌에서는 양양지방의 특산물 내지 생산물로서는 대부분 해산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19세기에 편찬되는 私撰邑誌에서는 “虎皮·熊皮·獐皮·獤皮·黃毛·豬毛·狸毛·猯皮 등이 이 지방의 생산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장리의 공동체적 역할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능할 수 있다.

 

 

4. 獐里 ‘校界’ 禁標가 갖는 의미와 과제?

 

○ ‘교계’ 각자는 금표로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금표는 일반인들의 범접을 통제하여 동식물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세워지는 것으로 보면, 이번에 발견된 각자 역시 그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 ‘교계’를 수렵·사냥과 관련하여 이해하고자 한다. 마을 이름이 獐里가 아니었다면, ‘교계’는 향교와 관련된 금표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이럴 때 1687년(숙종 13)에 향교를 현북면 면옥치로 획정하여 본군에 상신한 즉 府使 金演이 허락하였다고 하였다는 기사는 주목되었을 것이다.(『향토지』문화재 편, 133쪽) 다만 여기서는 마을 이름과 관련지으면서 사냥을 위한 금표로 보고자 한다.

 

○ ‘교계’의 각자에서 ‘교’자는 울타리나 사냥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자전은 물론 실록 자료에서도 그 전거가 충분히 확인된다. 이 점에서 ‘교계’는 사냥을 위한 금표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리 마을에 “장흥사(獐興寺)‘라는 사찰이 존재하였고, 마을의 뒷산을 ’덕울산‘이라고 하였다는 점도 ’교계‘의 성격을 사냥과 관련하여 볼 수 있는 전거가 된다고 본다. 다만 이번에 주목하는 ’교계‘ 각자와 기존의 문헌자료에서 파악되는 2곳의 ’황장금표‘와 상호 관련성은 앞으로 주목되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에 주목하는 ‘교계’는 양양지방의 생활문화를 풀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로서 가치를 가진다. 물론 금표의 성격 하나만으로도 그 가치와 의미는 충분히 보존될 가치를 가지지만, 나아가 양양지방 사람들의 생활문화 즉 사냥 내지 수렵 문화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단초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생활문화는 진정한 지방사로서 가치를 가진다고 본다.

 

○ ‘교계’ 금표와 관련하여 장리 마을의 자연과 인문 환경이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금표가 세워졌다면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생활의 변화상은 일차적으로 장리 마을에서 추적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예컨대 ‘뱃터말(舟基洞)’의 어원을 개울물이 모여 있었다고 하든 지형이 배 모양이라는 데서 찾든 그것은 사냥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고, ‘샛터말(新垈洞)’을 이주민들이 들어와 새마을을 이루었는지? 기존의 마을이 분동하여 이루어졌는지? 어느 쪽이라고 하더라도 마을 가호의 증가를 상징하는 것일 수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여야 할 것이고, 이러한 현상이 사냥과 상관관계가 설명될 수 있는가를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 ‘당상귀미’ ‘당산동’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들은 성황당과 관련된 지명으로 풀이되고 있다. 여기서 성황당의 형태는 당집인지? 당목인지? 신상은 어떤 모습인지? 장리 마을 안에는 몇 개의 성황당이 있는지 등의 상황은 장리 마을을 설명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이러한 상황들과 금표 즉 사냥과 연계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