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문화26호

연암 박지원과 양양군 스토리텔링 - 주제발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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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784회 작성일 2015-06-05 15:30

본문

[주제발표 1]
연암 박지원과 양양군 스토리텔링
이학주 (강원대학교 강사)

 

 

목차

 

1. 연암과 양양

2. 연암의 실학적 원천 법고창신과 스토리텔링

3. 연암을 활용한 양양의 스토리텔링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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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연암과 양양

2. 연암의 실학적 원천 법고창신과 스토리텔링

3. 연암을 활용한 양양의 스토리텔링 방향

 

 

 

1. 연암과 양양

 

연암 박지원(1737-1809)과 양양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연암은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의 나이 55세에 처음으로 벼슬을 한다. 1791년 음직으로 안의현감으로 간 것이 그의 첫 벼슬길이다. 다음은 61세 되던 1797년 면천군수를 제수 받아 지내게 된다.

그 후 64세 되던 1800년 8월 18일 역시 음직으로는 처음으로 양양부사를 제수 받는다. 양양부사를 제수 받고 임지로 부임한 후 9월 29일 정조가 승하하시자, 오지 말라는 문상을 했다가 의금부에 가서 처벌을 받는다. 이후 양양에서 관아의 어려운 살림을 추스르며 많은 곤혹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연암의 재치와 지혜로 인해서 양양부의 창고에 비축미를 가득 채우고 소신껏 일을 맡아 진행한다. 연암의 양양부사 시절은 이처럼 아주 힘들었다.

특히 그가 양양부사를 그만둔 계기는 아전의 농간과 승려의 횡포 때문이라고 한다. 그 해가 65세 되던 1801년 5월 4일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그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선군이 분개하여, “이런데도 비려둔다면 이는 나라에 법이 없는 것이다.”하시고 논죄하여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는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있어서 그 역시 두루뭉실하니 대답을 하여 결론을 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선군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찌 官長으로서 官屬과 僧徒들에게 제재를 당하면서 관리와 백성을 다스리고 政令을 내는 자가 있단 말인가?“ 하시고, 마침내 휴가를 요청해 서울에 올라가 병을 일컫고 사임 하셨다.(<과정록>)

 

인용문에 의하면 연암이 양양부사를 그만 둔 사실이 분명하게 나와 있다. 결국 아전들과 승려의 횡포를 문제 삼은 사실을 강원도 감사가 그냥 넘어가자 병을 핑계로 사임한 것이다. 관직(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 올곧은 정신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올곧은 정신은 다음의 황장목 사건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황장목사건>양양에는 벌목을 금하는 황장목(黃腸木) 숲이 퍽 많았다. 매번 조정에서는 감독관을 파견해 황장목을 베게 했는데 양양부사에게는 으레 사사로운 이익이 많이 떨어졌다. 비록 청렴한 수령이라 할지라도 황장목을 남겨 자신의 장례 때 쓰게 했다. 아버지가 양양에 부임하시자 친지들은 황장목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듣고도 못 들은 척하셨다.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본심을 아느냐? 너희가 혹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후일 나의 장례 때 황장목을 쓸 생각을 한다면 이는 내 뜻을 크게 거스르는 일이다. 황장목으로 나의 관을 짜는 일도 옳지 않다고 여기고 있거늘, 직위를 이용해 이익을 얻는 일이야 말해 무엇 하겠느냐?” 황장목은 감독관의 입회 아래 벌목되어 대궐에 진상되었다. 그러나 진상하고 남은 널빤지들이 온 고을에 낭자했다. 아전들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아버지는 아무아무 곳 시냇가에 옮겨 놓으라고 하셨다. “여기에 다리가 없어 사람들이 다니는데 괴로워한다. 이 나무로 다리를 놓으면 몇 년은 편리하게 지낼 수 있을 게다.” 그리하여 널빤지를 깔아 다리를 설치하셨다. 그 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유언에 따라 해송(海松)으로 만든 널을 썼다.(<과정록>)

 

연암의 올곧은 정신과 양양 백성들을 위해서 황장목으로 다리를 놓은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을 위하는 정신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인용문 하나만 보더라도 박지원이 목민관으로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연암은 자신의 사리사욕은 멀리하고 오직 백성들을 위해서 노력했다.

연암은 양양부사를 그만 두고도 양양에 대한 생각이 애틋했음을 알 수 있다. 양양의 경치를 말하고 있는 경관녹봉에 대한 사례는 연암이 양양의 경치 뿐 아니라 양양백성들의 마음까지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경관녹봉론>고을의 형편이 넉넉하다 각박하다 따지는 사람들을 보시면 곧 씁쓸하니 아무 말씀 않으셨다. 그때 양양에서 돌아오셔서 이웃 여러분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바야흐로 일찍이 거친 고을들의 봉급이 많고 적고를 서로 말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양양은 어떠했는지 묻자 선군은 우수개로 “일만 이천이었습니다.”하셨다. 듣는 사람이 놀라서 “어찌 그리 많을 리 있습니까?”라고 하자 “사실이 그렇답니다.”하셨다. 여러 사람들은 그렇다 아니다 하는 사람이 절반씩이어서, 어서 상세한 내용을 듣고 싶어 하였다. 선군은 웃으며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만 냥은 될 만하고 고을의 봉급이 이천 냥이니, 넉넉히 금강산 일만이천봉과 서로 나란하다 할 만 하지요.”하니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과정록>)

 

물론 우수개소리로 말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연암이 양양에 대한 갖는 마음이 아주 특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양양의 경치가 빼어나기도 했겠지만 그 경치를 세계 최고의 경관을 가진 금강산의 경치와 같이 대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결국 연암이 양양에 대한 생각, 곧 양양 백성들에 대한 특별한 생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연암의 이런 기발한 발상은 어디서 나왔으며, 또 그런 발상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스토리텔링이라는 차원에서 보기로 한다.

 

 

2. 연암의 실학적 원천 법고창신과 스토리텔링

 

연암의 실학적 원천은 溫故知新에서 비롯했다. 이를 연암은 法古創新이란 말로 스토리텔링을 했다. 연암 박지원이 법고창신의 정신을 가진 원천은 儒學에 있었다. 따라서 연암이 가지고 있던 스토리텔링의 원천은 조선조 당시 시대의식을 지배했던 유학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연암의 학문 기저가 유학적 소양에 있었고, 그가 이뤄낸 스토리텔링의 백미라 할 한문소설의 주제 또한 그 당시 유학자들이 지향해야할 선비정신의 바탕을 나타낸 것이다.

<허생>에서 허생이 학습에서부터 장사로 시험을 해 본 일과 마지막에 이완 대장을 만나 국정에까지 참여하는 일련의 과정은 선비정신의 구현이었다. 무인공도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 꾼 것도 유학적인 선비정신의 발로였다. 향상 새롭게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매진하는 선비정신이 이상적인 無人空島를 생각하게 한 것이다.

<예덕선생전>에서는 엄항수란 똥을 줍는 늙은 역부를 내세워서 선비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고 있다. 작품에서 엄항수는 연암이 추구하는 참 선비로 당시 선비가 추구하던 바로 성인이며 군자인 것이다. 가장 낮은 층의 사람을 聖人으로 형상화하여 물욕에 물든 세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만족과 행복을 엄항수를 통해 보여 준 것이다. 이는 연암의 자서에 명백하게 나와 있다

원래 儒學은 선비정신을 구현하고자 새로운 학문이란 의미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것이 세월이 오래 되면서 원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구태의연해지자, 신유학파들이 생겨나게 된다. 바로 이 신유학파를 후대인들이 일러서 실학파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 실학은 결코 새로운 학문이라기보다는 원래의 유학 개념을 받아들여서 타락한 유학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원래 유학이 가지고 있던 실용적인 학문과 실생활에 적용되던 학문을 조선후기의 신유학파들이 계승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실학파들이 주창했던 실용 중심의 학문은 옛 것을 본받아서 새롭게 한다는 취지의 것이다. 이는 곧 법고창신이라는 단어가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법고창신은 연암의 경우 ‘利用厚生正德’과 ‘生生의 法則’으로 나타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용후생정덕은 <서경>에서 나온 ‘정덕이용후생’을 앞뒤로 바꾼 것이고, 생생의 법칙은 <주역>의 이론을 계승한 것이다.

연암은 이런 법고창신의 사고를 바탕으로 그의 소설창작 및 일기 등으로 스토리텔링을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곧 일기를 매체로 <열하일기>를 작성했으며, 소설을 매체로 <허생>, <양반전>, <예덕선생전>, <마장전>, <호질>, <민옹전>, <김신선전>, <광문자전>, <우상전>, <열녀함양박씨전>을 지었다. 이밖에도 다양한 글쓰기 매체를 활용해서 시대의 욕구에 맞춰 작품을 썼다. 그것이 현재 전하는 <연암집>이라는 문집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의 아들 박종채도 <과정록>이라는 글을 통해 아버지 연암 박지원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景觀祿俸論’도 아들 박종채가 저술한 <과정록>에서 언급한 것이다.

그러면 본고에서는 연암 박지원이 스토리텔링을 한 근원인 법고창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방법으로 알려진 이용후생정덕과 생생의 법칙이 나온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1) 이용후생정덕론

 

<利用厚生正德> ↔ <正德利用厚生>

연암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의 사상 속에 잠재해 있었고, 중국의 <春秋左氏傳>에서 비롯하여 <易經>에 이르러 집대성된 陰陽思想과 <書經>「虞書」의 「洪範」篇에서 일상생활의 利用厚生을 위하여 그 성질과 효용을 나타낸 五行說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洪範羽翼序>에서 글방 선생님의 말을 빌려, 「洪範」篇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漢代 이후에 학자들이 원래의 뜻을 왜곡해서 점성술에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개탄해 하면서, 아래 인용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올바로 사용할 것을 나타낸 말에서 잘 나타난다. 아울러 그의 문집 전반에 걸쳐 이와 같은 관심과 易의 원리를 이용하여 사물의 자연법칙을 이해하고자한 것은 이미 고구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利用然後可以厚生厚生然後德可以正矣”라는 이론은 연암의 생활철학이 되었으며, 그의 유학, 곧 實學的 이론의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릇 五行이란 것은 하늘에서 만들어 내고 땅에 쌓아둔 것이니 사람들이 얻어서 사용하는 재료다. … 그 ①내용인즉 바른 덕을 펴고 물건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요. ②작용인즉 천지가 조화를 이루어 온갖 물건을 생성하는 것일 뿐이다. ③왜냐하면 이용한 후에야 후생 할 수 있고 후생한 후에야 덕을 바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연암집>권1<홍범우익서>)

 

생활에서 사람들의 유익과 조화를 펴서 물건을 생성하는 것으로 이용후생정덕을 한다고 했다. 이를 내용과 작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곳에 연암의 두 가지 스토리텔링의 원리가 담겨있다. 이 원리는 곧 연암의 학문적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본고에서 논의하는 ‘이용후생정덕’과 ‘생생의 법칙’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기존에 있는 것을 활용하여 새롭게 하는 법고창신의 원리를 항상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미 있는 물건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서 시대에 맞는 상품으로 새롭게 꾸며가는 것이다.

연암이 추구한 이용후생정덕의 이론도 그의 법고창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미 있었던 <書經>「虞書」의 <大禹謨>편에 “正德利用厚生”이라는 말을 연암이 “利用厚生正德”으로 고쳐 쓴 것에서도 법고창신을 볼 수 있다. <서경>에는 오행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가 이르시되 오호, 황제여! 생각하소서. 덕은 정사를 좋게 하고, 정사는 백성을 보양하는 데 있나니, 물과 불과 금과 나무와 흙과 굳셈을 잘 다스리며, 덕을 바르게 하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삶을 두텁게 함이 고르게 되어, 이 아홉 가지 공이 펴서 아홉 가지 폄을 노래하거든 경계하되 선하게 하시며, 독려하시되 위엄으로 하시며, 아홉 가지 노래로써 권하시어 그르치지 않게 하소서.(<서경><우서>)

 

이처럼 <서경>에서 오행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정덕이용후생이 언급되었으며, 연암도 오행을 설명하면서 이용후생정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행은 우주를 이루는 구성체이다. 그 구성체를 바탕으로 인간 삶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는 가에 따라 인간 삶이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곧, 이용후생을 정덕 앞에 둘 것인가, 아니면 뒤에 둘 것인가에 따라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곧 ‘정덕이용후생’과 ‘이용후생정덕’은 얼핏 보면 같은 개념인 듯싶지만, ‘正德’과 ‘利用厚生’의 先後問題로 인하여 개인이 가지는 人生觀의 본질적 차이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조선조 성리학자들은 德을 바탕으로 한 名分論的 정신구조에 치중한 나머지 경제의 허약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四民의 계층의식이 조장되고, 그에 따른 직업의 구별도 이루어졌으니, 경제의 궁핍은 더욱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儒學 원래의 실천덕목은 개인의 명분과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써 왜곡되었으며, 민중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피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반하여 조선조 후기의 실학자들은 물질적 가치를 정신적 가치 보다 우선 하였다. 이것은 심오한 학문의 논쟁보다는 인간의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학문과 실천행위로의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유학이 가지는 원래의 실천덕목을 명분과 실리만 좇는 잘못된 인식에서 회복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곧, 도덕적 이념에 얽매어 사람들의 진정한 삶을 뒷전으로 미루어 두었던 것을 바꾸어 보자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기에 ‘利用’이 ‘正德’에 앞서게 된 것이다. 史馬遷도 <史記列傳>에서 “부유하면 즐겨 그 덕을 행하는 자의 표본이 되며, 오랫동안 빈천하게 살면서 즐겨 仁義를 말하는 패거리도 역시 부끄러운 일”이라고 일찍이 말했던 것이다.

이런 이용후생의 언급은 <열하일기> 서에도 나온다.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城郭)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서는 누가 썼는지는 모르나 연암의 학문적 바탕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쓴 서문임에 틀림없다. 앞서 이야기한 ‘이용후생정덕’이 <열하일기>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연암은 스토리텔링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허생>이라 할 수 있는데, 작중 주인공 허생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학습-이용-후생-정덕-국정’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2) 生生의 法則

 

연암(1737-1809)은 20세 되던 해 李胤永(1714-1759)의 집에서 <주역>을 연구했는데, 이윤영은 연암이 <주역>에 관하여 논설한 바를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연령을 초월하여 교유할 것을 허락했다고 전한다. 이 밖에 易學과 理氣哲學의 대가였던 金錫文(1658-1735)․金元行(1702-1772)․洪大容(1731-1783) 등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師弟關係를 맺고 교유를 했다.

이로 인하여 연암이 중국 여행 시에 그곳 학자들과 대화했던 地轉說은 선배학자들의 영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연암은 이 같은 이론을 단순히 습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깊은 학문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으로 구체화 시켜서 직접 생활과 저서에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易學의 生生法則에 관하여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연암은 <楚亭集序>에서

 

“천지는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生生의 활동이 끊이질 않고 日月은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광명이 날로 새로우며, 서적은 아무리 방만해도 내용의 의미가 저마다 다르다.”

고 하여 ‘生生’의 법칙을 이야기하였다. <熱河日記>序에도 <易經>과 <春秋>와 관련하여 글 쓰는 방법을 서술해 놓았다. 이곳에서는 ‘감춤’(미묘성)과 ‘드러냄’(표현;사건의 기록)이라는 두 축을 이용하여 ‘神明의 경지를 통하고 事物의 자연법칙을 꿰뚫어’ 사물과 인간사의 일체 利用厚生의 방법을 <熱河日記>속에서 나타냈다고 했다.

또한, 연암은 글의 組織方法과 그 運用에 대하여 用兵術에 비유한 바 있다. 이러한 用兵術 곧, 서술책략은 隊伍의 유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오의 조직운용을 얼마나 적절히 이용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암이 이와 같은 용병술을 이용하여 글을 쓸 때, 과거의 구태의연한 책략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며, ‘王褒僮約’이라는 故事를 앞세워 질타의 방패막이로 삼고자한 것도 아니요, 연암 나름의 책략을 꾀해서 작품을 쓰고자 함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앞서 살펴 본 ‘利用厚生’이 ‘正德’에 우선하고, 生生法則이며 法古創新과 같은 이론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론에서 인용한 <洪範羽翼序>의 내용에서도 ‘利用厚生正德’의 작용은 “천지가 조화를 이루어 온갖 물건을 생성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했듯이, 연암이 추구한 법칙은 우주만물의 원리에 따른 생생법칙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周易>의 원리와 일치하는데, 그것의 원리와 스토리텔링의 적용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周易>의 典範은 우주질서에 입각한 君子와 聖人의 思考와 行動樣式을 주체로 삼고 있다. 이것의 기본원리는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순환법칙에 놓여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周易>의 체계는 道(太極)∞兩儀(陰陽)∞四象(老陰․少陽․少陰․老陽)∞八卦∞六十四卦라는 발전론적인 변화 요인을 卦(易의 象)와 辭(經文)로 구성해 놓았다. 卦는 易의 질서를 陰爻(--)와 陽爻(−)로 본뜬 象과 象의 함축적 개념인 卦名으로 나타냈다. 그리고 卦의 해설인 辭(經文)는 卦와 爻의 象을 자연법칙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사에 대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괘 자체는 靜的인 現像을 나타낸다면, 괘와 괘간의 관계는 動的인 움직임으로 보다 앞으로의 변화와 생성을 예고하는 來象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괘 자체로 멈추어 있는 실상은 의미가 없으며, 괘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변화를 유발하고, 그 변화는 生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또한 <周易>의 卦와 辭를 보충 설명한 十翼이 있어 易의 체계를 이해하고 생활에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周易>의 체계는 근본적으로 陰(--)과 陽(−)의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一陰一陽으로 迭運하는 道의 自己展開에 의한 生命의 창조를 그 본질로 하는 유기적 구조로 짜여 있다. 곧, <周易>은 “恒久如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原理를 大前提로 제시해 놓고, 天地自然의 變化現象으로 人間界의 變化現象을 설명하고 있다.” 「繫辭傳」에서는 “역의 도는 자주 변천하는 것이다. ․․․ 오직 변화하는 것만이 적당는 原理다.”고 했으며, 乾․坤 두 괘로 천지만물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변화의 幾微와 生成의 원리를 易의 행동주체와 관련하여 설명해 놓았다. 易의 법칙이 상술한 바적 구이 변화와 생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易 문에 “唯變所適”하고 “고 之謂易”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幾微라는 미묘함과 때를 기매 그움직여야 이익됨이 있다는 전제가 함께 수반되어 있다. 이것은 易의 활용상과 순환법칙을 말는 原理다. 그것은 일눕는 반복구조로 변화지는 기계적며, 도식적인 구조가 고 라, 변화하고 생로 하는반복구조인 유기적며, 상호작용적 구조로 형성돼 있음을 뜻한다. 같은 종류의 생명체일지라설명그 성장의 설명및 크기와 모양 등이 다르게 나타남이나, 그 시기에러나라 성장하고 퇴락 하는과정뱴탕으로이라는 창조성을 본질로 달리 나타나는 것과 같다. 고울러 이러한 으로은 無에서 有를 창조해 내는 것瑀를 大다. 반드시 어떠한 실체를 기본적 바탕으로 하여, 뒤에러올 상황과 관련되어 진행되는 것이다. 곧, 太極瑀를兩儀를 낳고 兩儀는 四象을 낳고 … 하는 파생적인 체제와 괘간의 상호작용이라는 기본 틀을 유지한 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역>의 이론이 곧 연암이 추구했던 법고창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적 요소를 놓고 볼 때, <周易>은 정신과 물질의 生生作用이 일원적 사상체계로 형성되어 있다. 연암도 이와 비슷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곧, 연암은 <答任亨五論原道書>에서 만물의 生은 모두 氣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천지는 大器이니, 가득 차는 것은 氣이고 가득 차게 되는 까닭은 理인데, 陰陽이 서로 부딪치면서 理가 그 가운데 있으며, 氣가 理를 복숭아가 씨를 품고 있듯이 둘러싸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연암이 “一元論的 主氣論의 입장에서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이해”한 것이다. <주역>과 연암의 이기적 입장도 같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주역>의 원리는 곧,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찬다.’는 易의 기본법칙이 단순한 운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현상에는 幾微․時期․相關性 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하여, 生成인 창조를 이끌어 내는 법칙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모든 물질이 계속 그 생명을 유지하고 새롭게 번창해 가는 것과 같이, 스토리텔링도 하나의 유기적 구조로 볼 때, 內․外部的인 영향과 함께 자체 내로 생명을 갖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계속적인 운동을 진행해야 함을 볼 수 있다. 연암의 법고창신 정신과 같이 스토리텔링은 낳고 또 낳는 자기 변화를 계속 추구해야 함을 볼 수 있다. 이때 기미, 시기, 상관성과 연계해 보면, 스토리텔링은 해야 할 기미가 보이면, 그 때를 봐서 해야 하는데, 아무한테나 다 통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상을 잘 살펴서 진행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연암은 문집 곳곳에서 <주역>을 거론하고 있으며, <주역>의 원리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생생의 법칙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 및 생활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허생>의 경우이다. <허생>의 경우 연암이 추구했던 ‘이용후생정덕’과 ‘생생의 법칙’이 잘 나타나 있다. 허생이 독서를 통해서 세상의 이치를 깨치고, 그를 바탕으로 변 부자에게 만 냥을 빌려 장사를 하고 몇 번의 장사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생을 두텁게 했으며,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서 바른 덕을 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이완 대장을 통해서 국정에까지 참여하고 있으나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세상을 등진다. 이런 상황은 곧 연암이 <주역>의 생생법칙을 활용해서 작품을 서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때 생생법칙은 곧 법고창신과 다르지 않다. 이에 연암은 <허생>의 경우만 보면, 법고창신을 활용해서 <허생>을 스토리텔링 한 것이다.

 

3. 연암을 활용한 양양의 스토리텔링 방향

 

지금까지 연암이 추구했던 법고창신의 정신적 바탕은 <서경>에서 언급한 ‘정덕이용후생’을 ‘이용후생정덕’으로 바꾼 것과 <주역>의 생생법칙을 바탕으로 나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연암의 법고창신은 거꾸로 ‘이용후생정덕’과 ‘생생법칙’으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연암은 실제로 법고창신을 어떻게 활용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양양에서는 연암을 바탕으로 어떻게 스토리텔링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알다시피, 연암 박지원은 법고창신의 대가였다. 그것은 다음처럼 <호질>을 쓴 기록을 통해 볼 수 있다. 연암이 열하에 갔을 때 심유붕이란 사람을 만난다. 그 집에 들렀는데 벽에 작은 글씨로 쓴 奇文이 있어서 같이 여행을 하던 정군과 함께 글을 베낀다. 앞쪽은 연암이 베끼고, 중간부터는 정군이 베낀다. 그 마지막 구절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선생은 이걸 베껴 무얼 하시려오?”

하기에 나는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야.”

하고 말을 마쳤다. 사관에 돌아와 불을 밝히고 다시 훑어 본 즉, 정군이 베낀 곳에 그릇된 곳이 수없이 많을뿐더러, 빠뜨린 글자와 글귀가 있어서 전혀 맥이 닿지 않으므로 대략 내 뜻으로 고치고 보충해서 한 편을 만들었다.(<열하일기>)

 

연암이 <호질>을 쓰게 된 내력이다. 인용문에는 <호질>을 쓰게 된 목적과 스토리텔링 방법을 말하고 있다. 곧 법고창신의 방법이다. 기존에 있던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방법은 기존에 있던 것을 매개로 낳고 낳으며, 기존에 있던 것을 매개로 이용하고 후생하고 정덕하는 것이다. 실제 <호질>에서는 범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인간 삶의 모순, 비리, 불합리 등을 꾸짖고 있다. 그리고 비방 등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남의 것을 베꼈다고 했다. 이는 한․중․일전기소설의 작가들이 서문에서 쓴 내용이나 조선조 야담집 작가들이 서문에서 우회적으로 쓴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면서 실제 작품에서는 현실의 모순, 불합리 등을 꼬집어 새로운 이상향을 설정해 주고 있다. 아주 훌륭한 스토리텔링의 방법이다.

이런 방법으로 이제 우리는 연암의 스토리텔링방법을 활용해서 연암과 양양을 연계하여 양양에 보탬이 되는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을 이끌어 내야 한다. 스토리텔링의 과정은 통상 원소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를 이야기 하고 있다. 곧, 스토리텔링은 원형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새롭게 加工하는 것이다. 이를 굳이 단계를 나타내면 원형-발상-연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면 연암과 양양의 原型은 무엇일까? 연암이 양양부사를 지내던 시절은 연암의 학문과 경륜이 절정에 달하던 시절이다. 연암의 일생에 있어 그야말로 耳順의 시절인 것이다. 그 때문에 적은 녹봉에 경관녹봉을 더해 받을 수 있는 재치도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배우고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여 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한편 연암이 양양에 있을 당시의 절정에 이른 경륜과 학문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發想을 할 수 있을까? 절정에 달한 학문과 경륜은 이 지역에 연암의 모든 것을 풀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평생 쌓아 온 모든 재능과 업적을 모두 풀어헤칠 때란 것이다. 연암의 모든 업적을 양양읍내에 풀어 놓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암의 모든 업적을 양양읍내에 풀어놓는 것에서 어떤 聯想을 할 수 있을까? 이에 필자는 양양에 연암의 테마거리를 만들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2012년에 혹자가 주창했던 것처럼 여러 개를 할 수도 있지만, 먼저 가장 구심점을 이룰 바탕을 마련해야 한다. 그 구심점을 ‘연암테마거리’로 하자는 것이다.

연암테마거리는 필자가 주장하는 ‘마을관광박물관’의 개념으로 하면 된다. 박물관을 따로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을 자체를 박물관 개념으로 하자는 것이다. 마을에 기존에 있던 자원을 충분히 살리면서 연암의 테마거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양양읍내에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 상점, 관공서 등등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연암의 업적을 입히면 된다. 가령, 열하일기거리, 허생전거리, 양반전거리, 육방관속거리, 연암산책길 등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21세기의 생활에 1800년대의 생활상을 입혀 공존하게 히는 것이다. 옛 물건도 팔고, 연암의 작품에 나오는 대로 도시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거리에서 주변 및 시대 요구에 맞게 바꾸어주면서 이벤트도 진행하면 되는 것이다.

※경관녹봉론(금강산과 같음을 경관홍보, 지역의 자긍심), 황장목 다리 놓기(축제, 민속놀이 등), 연암테마거리(마을관광박물관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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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동석, “박지원의 양양부사 활동과 작품세계”, <양양부사 녹봉은 일만이천양이라네>(양양문화원, 강원도민일보, 2012), pp. 53-7 참고.
2)위의 논문, pp. 65-8 참고.
3)위의 논문, p. 66 재인용.
4)박수밀, “목민관 박지원과 이용후생의 생태 정신”, <양양부사 녹봉은 일만이천냥이라네>(양양문화원, 강원도민일보, 2012), p. 87 재인용.
5) 김동석, 앞의 논문, p. 61 재인용.
6)연암의 자서에 의하면, “선비가 구복(口腹)으로써 몸을 더럽힌다면 여러 가지의 행실이 결핍될 것이며, 큰 솥에 많은 음식을 쌓아 놓은 이는 음식 탐하는 자를 경계하지 않는 법이다. 이제 엄항수(嚴行首)는 스스로 더러운 똥을 날라서 먹을 것을 장만하고 있다. 그의 자취는 더러우나 그의 입은 조촐하기 짝이 없다. 나는 이제 이 <예덕선생전>을 쓰노라.”했다.(이가원 역, <연암․문무자소설정선>, 박영사, 1986. p. 50.)
7) 金義淑, <韓國民俗祭儀와 陰陽五行>(집문당,1993), pp.43-70.
8) <燕巖集>卷一. 어떤 이는 이 부분에서 연암이 오행설을 부정한 것이라고 하는데(崔光烈,<한 民族史와 思想의 源流>,思社硏,1987.pp.245-6. 金義淑, 위의 책, p.53.), 필자가 보기에는 오행설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잘못 사용한 것에 대해서 바로 사용할 것을 나타낸 것이라 사료된다.
9)이학주, “許生의 人間像 考,” <國語國文學論叢>(太學社,1995).; 이학주,“許生의 人物像과 <周易>,” 한국비교문학회 발표요지,1995.10.21.
10) 이러한 글귀는 <熱河日記> [渡江錄]에서 “嗟乎如此 然後 始可謂之利用矣 利用然後可以厚生 厚生然後 正其德矣 不能利其用 而能厚其生 鮮矣 生旣不足以自厚 則亦惡能正其德乎”라 하여 더욱 구체화 되어 있다.
11) <燕巖集>卷1. 夫五行者天之所賦地之所蓄而人得以資焉․․․其事則不過正德利用厚生之具 其用則不出乎中和位育之功而己矣․․․何則利用然後可以厚生厚生然後德可以正矣.
12)<書經><虞書>의 <大禹謨>편에 “禹曰 於帝 念哉 德惟善政 政在養民  水火金木土毅 惟修 正德利用厚生 惟和 九功 惟叙 九叙 惟歌 戒之用休 董之用威 勤之以九歌 俾勿壞”(<書經>, 한국교육출판공사, 1986. p. 56)
13)이러한 이론은 北學派로 알려진 洪大容.朴趾源.朴齊家.李德懋.柳得恭 등의 저서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 李之菡(1517-1578)을 비롯한 여타의 실학자들도 주장했음을 이미 선학들에 의하여 밝혀진 바 있어 참고가 된다.
14)金泳은 “燕巖의 ‘士’意識과 讀書論”이라는 논문에서 “연암은 書經의 ‘ 正德利用厚生’의 논리를 ‘ 利用厚生正德’이라는 실천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하고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이용을 통한 민중의 복리증진에 기여코자 했다. 다시 말하면 士의 임무는 實用之學과 科學的 知識을 제공하여 ‘民을 이롭게 하고 萬物에게 혜택을 입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 하여 연암의 士意識을 고찰한 바 있다. <東方學志>53집(연세대 국학연구원, 1986), pp.137-8.
15) <貨殖列傳>참고.
16)李家源 譯, <熱河日記>上(良友堂,1988), p.32.
17)이학주, “<허생전>의 구조와 의미”, <한겨레어문연구>1(한겨레어문학회, 2001), pp. 291-314 참고. * 본고의 2장에서 논의한 이용후생정덕과 생생의 법칙은 필자의 본 논문에서 전적으로 도움을 받아 다시 작성한 것이다.
18) 宋旭 譯, [나의 아버지 朴燕巖], <文學思想>통권 20․21호 (1974. 5. 6), p,373.
19)이에 관하여는 朴宗采의 위의 글과 閔泳珪, “十七世紀 李朝學人의 地動說,” <東方學志>16輯(延世大 國學硏究院, 1975) 및 姜東燁,<熱河日記硏究>(一志社, 1988) 등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20) 姜東燁, 위의 책, p.141.
21)이러한 이론은 <燕巖集>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특히 [熱河日記]에 집중되어 있다. 이학주, “許生의 人間像 考, ”앞의 논문과 “許生의 人物像과 <周易>”앞의 글을 참고 할 것.
22) <燕巖集>卷一. 天地雖久 不斷生生 日月雖久 光輝日新 載籍雖搏 旨意各殊.
23) 李家源 譯(1988), 앞의 책, pp.31-2.
24) <騷壇赤幟引><燕巖集>卷一. 이에 대하여는 姜東燁, 앞의 책,pp.48-9. 에서 연암의 문학론을 고구 하면서 상세히 언급 하으며, 金學成,“兩班傳의 作品構造와 主題,” <人文科學>19輯(成均館大 人文科學硏究所,1989).에서 위의 방법을 이용하여 <양반전>을 분석 하였으며, 黃浿江, “[兩班傳]硏究,” <韓國古典小說硏究>(새문社,1983).;成賢慶,“[虎叱]硏究,”앞과 같은 책.;趙東一,“朴趾源,” <韓國文學思想史試論>(知識産業社,1978). 등에서 이미 상술한 바 있다. 글의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생략 한다.
25)이 내용은 필자가  “許生의 人間像 考”와 “許生의 人物像과 <周易>”이라는 앞의 글에서 상술한 바를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혀 둔다.
26) 崔英辰, “[繫辭傳]에 있어서의 善의 成立根據,” <人文科學>第19輯(成均館大 人文科學硏究所, 1989), p. 24.
27) 金敬琢 譯著, <周易>(明文堂,1987), p. 16.
28)易之爲書也 不可遠 爲道也 屢遷 變重不居 周流六虛 上下无常 剛柔相易 不可爲典要 唯變所適.
29)[繫辭傳]上. 易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 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夫易 聖人之所以極深而硏幾也 唯深也 故能通天下之志 唯幾也 故能成天下之務 唯神也 故不疾而速 不行而至 子曰 易有聖人之道四焉者 此之謂也. 「繫辭傳」下. 待時而動 何不利之有.
30)정금철은 易의 태극과 음양을 相生的이자 相同的인 태극∞음/양의 체계로 간주하고, 태극은 일치이고 음/양은 대립이므로 역은 일치 ∞대립의 변증법적구조 (상생적∞상동적)에 기반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시의 기호학적 연구>(새문社, 1990), p,14. 그러나 음/양은 상호작용에 관련하여 파생적인 생성운동을 하고 있음으로, 일치와  대립의 발전론인 변증법적 구조와는 차이가 있다고 판단된다.
31)여기서 말하는 有에서 有로의 生生은 “자연의 도로부터 무(無)로, 무가 유(有)를 낳는다.”(鄭炳碩 譯, <周易哲學의 理解>高懷民 著, 文藝出版社, 1995, p, 588.)는 老子의 說과는 다르다. 太極이라는 요소가 정신과 물질을 함께 공유하고 있음으로, 이러한 실체적 요소가 陰과 陽이라는 또 다른 실체를 낳는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32)위의 책, pp,588 -593. 이 책에서는 “건원, 곤원 이후로 변화하는 현상세계를 한마디로 말하면 모두 태극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정신과 물질이라는 것은 후천적인 구분일 뿐이다.”고 하고, 정신과 물질이 하나로 관통하는 것과 같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원물질도 동시에 생겨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33)이 글에서 연암은 理와 氣의 성질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세히 고구하고, 그 실천 방안까지도 제시하고 있다. 인용문은 趙東一, “朴趾源” 앞의 책, p, 266.의 譯文을 게재함. 아울러 <原士>에서는 理氣論에 너무 집착하여 한 쪽으로 귀착되려고 하면 性情이 어긋나니, 講學에서 조차도 實用에 힘써야 한다고 하여, 치우친 논쟁을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다.
34) 조동일, 위의 책, 같은 곳.
35) 이가원 역(1986), 앞의 책, p. 268.
36) 정호완, “양양의 역사문화성과 연암의 문화콘텐츠”, <양양부사 녹봉은 일만이천냥이라네>(양양문화원, 강원도민일보, 2012), 100-130쪽. 이곳에서 정 교수는 양반전의 아리랑화, 연암문학의 창극화, 연암문학의 마당놀이, 양반전의 실현장르 개발, 양반전과 호질의 융합 콘텐츠풍자개그, 연암문화축제, 연암문학의 판소리공연, 연암문화체험, 연암문예창작마을, 열하일기를 중심으로 한 한-중 문화교류 등을 주장했다. 여기서 <양반전>을 언급한 것은 연암이 양양부사재임시절 <양반전>을 창작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양반전>은 그 배경이 정선이며, 정 교수가 주장하는 아리랑은 아무래도 정선의 이미지가 강해서 양양하고는 좀 문제가 있다. 그리고 정 교수가 주장하는 여러 콘텐츠를 모두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많은 시간을 두고 타당성을 진단해 가면서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