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임희교(任希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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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368회 작성일 2015-04-2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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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任公希敎興學碑(부사임공희교흥학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영조 31년(1755년) 7월 ~ 영조 33년(1757년) 7월 [2년]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44cm, 너비 50cm, 두께 17cm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앞의 임희교(任希敎,1719년∼미상)비는 재직 중  학문과 인재양성에 전력하였으므로 흥학비를 건립 하였다.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유가(孺可)이며, 영조 26년(175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같은 해 10월부터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전적(典籍)ㆍ병조좌랑(兵曺佐郞)ㆍ정언(正言)ㆍ이조정랑(吏曹佐郞)ㆍ지평(持平)ㆍ장령(掌令) 등 내직을 두루 엮임하고, 영조 31년(1755년) 7월 17일 사헌부 장령에서 襄陽府使로 제수 받고 부임하였다. 영조 33년(1757년) 사헌부 집의(執義)로 이임한 후 필선(弼善)ㆍ보덕(輔德)ㆍ사간(司諫)ㆍ수찬(修撰)ㆍ부교리(副校理)를 지내고, 영조 38년(1762) 집의로 재직 시 상소에 대간의 주장을 수용할 것, 처벌받은 언관을 용서할 것, 대간으로 부적한 인물을 용서할 것, 비변사 회의를 자주 열 것,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762년 12월 부모의 봉양을 위해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자원하였다. 1764년 1월 내직으로 들어와 집의로 복귀하고 종부정(宗簿正)ㆍ응교(應敎)등을 역임하고, 향리에서 비루한 행동을 하는 지평 채위하(蔡偉夏)를 탄핵하여 조정의 분란을 야기 시키기도 하였다. 이후 승지(承旨)로 승차하고, 영조 47년(1771년) 병조참의(兵曺參議)ㆍ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었다가 공조참의(工曹參判)에 특채되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된 후 관직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정조 3년(1779년) 11월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어 외직으로 한성우윤(漢城右尹)ㆍ여주목사(麗州牧使)를 지내고 1783년 대사헌에 다시 기용되었다가, 정조 9년(1785년)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나갔다.


參考文獻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방목』, 『강원도사』,
 『양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關聯金石文

 府使任公希敎興學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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