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안경운(安慶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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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09회 작성일 2015-04-2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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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安公慶運興學碑(부사안공경운흥학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영조 20년(1744년) 12월~영조 23년(1747년) 9월 [2년9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35cm, 너비 52cm, 두께 15cm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리 향교 앞의 안경운(安慶運,1683년∼미상)비는 양양부사로 재임 중 영조 23년(1747년) 사림사(沙林寺)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가 산화(山火)로 인하여 절단되었던 것을 부고(府庫)에 간직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부사께서는 학문을 장려하고 향교재산을 증식시켜 흥학비(興學碑)를 건립하였다.
  본관 순흥(順興), 자 선여(善餘), 경기도 광주에서 안건(安鍵)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종 1년(1721년) 진사에 합격하고, 영조 1년(1725년)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영조 2년(1726년)부터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부사정(副司正)·장영전별검(長寧殿別檢)·전적(典籍)·감찰(監察) ·병조좌랑(兵曺佐郞) 등 내직을 역임한 후, 영조 7년(1731년) 함경도사(咸鏡都事)로 제수 받고 재직 중, 갑산(甲山)·경성(鏡城)·경원(慶源)·경흥(慶興)·삼수(三水)·온성(穩城) 등지에 기근과 재난이 발생하자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감면해줄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낸 후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1733년 외직인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나갔다.
  1733년부터 부사과(副司果)ㆍ장령에 임명된 후 1736년에는 조정(趙廷)의 상소가 경솔하다는 지적을 하였던 일과 이석표(李錫杓)의 죄목을 지적한 일이 화근이 되어, 관직에서 교체되어 진해현감(鎭海縣監)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738년 1월 전라도 고부군수(古阜郡守)로 부임해 같은 해 10월 백성을 잘 보살피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금되기도 하였다.
  1739년 내직으로 장락정(掌樂正)·필선(弼善)·정언(正言)·장령을 역임한 후 이듬해인 1740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제수 받은 이듬해인 741년 7월 태풍으로 큰 피해가 발생하고 이듬해에는 극심한 흉년이 드는 등 악재가 계속되자, 백성들이 부담하는 전세(田稅)에 대해 전액 감액 조치를 내리고 조정에 진휼곡 5천 섬을 요청해 굶주린 제주 백성들에게 공급했다. 제주목사로 재임하고 3년이 지난 1743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강계부사(江界府使)·병조참의(兵曺參議)를 역임한 후 영조 20년(1744년) 12월 2일 襄陽府使를 제수 받고 부임 후 3년 만인 1747년 제차 병조참의로 제수 받고 이임하였다. 이후 영조 24년(1748년)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제수 받았다.
  그는 그의 선조 안축의 시문집인 『근재집』을 펴냈다. 여기에는 안축의 대표작인 경기체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 시(詩,) 전(傳), 묘지명(墓誌銘) 등이 실려 있다.


參考文獻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강원도사』, 『양양군지』,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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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安公慶運興學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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