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정필동(鄭必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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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426회 작성일 2015-04-2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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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鄭公必東賑飢蠲役善政碑(부사정공필동진기견역선정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숙종 32년(1706년) 3월 ~ 숙종 33년(1707년) 7월 [1년 5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150cm, 너비 57cm, 두께 17cm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구교리와 연창리 사이 도로변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소재 정필동(鄭必東,1653∼1718년)비는 풍속을 교화하고 기근을 구휼하였으며 부역을 감소시켜 민폐를 근절하는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를 세웠다. 본관은 동래(東來), 자는 종지(宗之)이다.
  숙종 10년(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85년 주서(注書)ㆍ전적(典籍)ㆍ예조좌랑(禮曺佐郞)을 지낸 뒤 1690년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재직 중 백성을 착취하고 도로가 조악(粗惡)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94년 부터 충청도사(忠淸都事)ㆍ병조정랑(兵曺正郞)ㆍ정언(正言)ㆍ장령(掌令)을 두루 역임하고, 허균의 시를 간행하여 죄를 입은 박태순(朴泰淳)이 외직에 임용된 것에 대한 인사행정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701년 금산군수(錦山郡守)와 1704년 인동부사(仁同府使)를 지내다가 1705년 장령으로 다시 기용되었다가, 같은 해 9월에는 정언으로서 종친의 정치 간섭 배제, 세자의 정치참여 요청 등의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숙종 32년(1706년) 襄陽府使를 제수 받고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으며 재직중인 숙종 33년(1707년) 7월 6일 승정원일기에 “강원도감사서목。양양부사 정필동은 은구어(銀口魚)의 천신령을 받고 해당관리로서 살피지 않은 죄를 독히 면하기 어려워 물러나다.”라는  기사가 있다.
○江原監司書目。襄陽府使 鄭必東, 以六月令薦新銀口魚, 該封官不謹之罪, 理難獨免, 罷黜事
(강원감사서목。양양부사 정필동, 이륙월령천신은구어, 해봉관부근지죄, 리난독면, 파출사)
  이듬해인 1708년 3월 22일 정언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1709년 울산부사(蔚山府使)로 나갔다가 1710년 장령으로 재직할 때 당쟁을 일삼은 죄로 파직되었으나 복직된 후 부사직(副司直)과 종부정(宗簿正)을 지내다가 1713년 강계부사(江界府使)를 거처 부사과(副司果)ㆍ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한 뒤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1716년부터 내직으로 들어와 승지(承旨)ㆍ병조(兵曹)ㆍ공조(工曹)ㆍ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후 좌승지와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솔직하고 성실하였으며, 정사를 다스림에 있어 아랫사람들을 엄격하게 단속하였다고 한다.


參考文獻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강원도사』, 『양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關聯金石文

 府使鄭公泌東賑飢蠲役善政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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