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물

【 김연(金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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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688회 작성일 2015-04-2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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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金公演淸德善賑不忘碑(부사김공연청덕선진불망비) 

시대 : 조선
재임기간 : 숙종 22년(1696년 ) 12월~숙종 25년(1699년) 7월 [2년8월]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112cm, 너비 47cm, 두께 18cm
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청곡2리 도로변 속칭:비석거리
현 소재지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서체 : 해서(楷書)
서자/각자 : 미상

 

‣ 개관(槪觀)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군행리 현산공원 소재 김연(金演,1655년∼미상)비는 양양부사로 재직할 당시 강릉부사 이희무(李喜茂)와 함께 상소하여 두 고을의 재해 상황을 극력 진달하고 명년 봄까지 다른 곳의 곡식을 옮겨 줄 것과 부세를 모두 감해 줄 것을 청하여 숙종임금의 윤허를 얻기도 하였으며, 부임 이래 영세민을 구제하고 장학에 힘썼던바, 숙종 26년(1700년)에 선정비를 세웠다.

숙종 23년(1697년 丁丑) 8월 4일 2번째 기사
○襄陽府使金演、江陵府使李喜茂上疏, 極陳兩邑被災之狀, 請趁明春移粟, 盡減賦稅, 上令廟堂稟處。 備邊司請姑觀諸道狀聞而稟處, 允之。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사익(士益)으로 숙종 1년(1675년) 증광시에 입격하고, 숙종 10년(1684년) 정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1688년 예조좌랑(禮曺佐郞)을 시작으로, 1693년 병조좌랑(兵曹佐郞), 1694년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필선(弼善)ㆍ정언(正言)을 지냈고, 이듬해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1696년 사간(司諫)ㆍ승지(承旨)를 지냈다. 숙종 22년(1967년) 12월 21일 양양부사(襄陽府使)로 제수 받고 부임하여 숙종 25년(1699년) 7월 18일 내직인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로 이임하였다가, 같은 해에 여주목사를 지내고, 1700년부터 병조참의(兵曹參議)와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안주목사를 지냈다.
  숙종 28년(1702년) 3월 21일 강원감사로 부임하였다가, 같은 해인 윤6월 28일 승지로 임명되었으며, 11월 25일 충청감사가 되었다. 1704년에는 형조참판과 경상감사, 1706년부터 한성좌윤ㆍ대사간ㆍ공조참판ㆍ도승지ㆍ예조참판ㆍ경기감사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1711년에는 진주사은겸동지사(陳奏謝恩兼冬至使)의 副使로서 여산군(礪山君) 이방(李枋), 서장관(書狀官) 유명응(兪命凝)과 함께 청나라를 다녀왔다.
  이후 개성유수ㆍ함경감사ㆍ경기감사ㆍ강원감사를 역임하고 경종 원년(1721년)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영전되었다. 1722년에는 원접사(遠接使)로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고, 같은 해 12월 형조판서에 올랐다. 1724년 예조판서에 이어 우참찬(右參贊)과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江原監司와 京畿監司를 두 번 씩이나 지낸 前歷을 가지고 있으며, 밝고 행정업무 처리에 능숙하였다고 한다. 碑에 청덕선진(淸德善賑)에 구휼할 진(賑)자가 들어있어 부민들에게 청렴한 선정과 아울러 백성들의 구휼에도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參考文獻

 『숙종실록』, 『경종실록』, 『승정원일기』,
 『내고장경기도의인물』, 『강원도사』, 『양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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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府使金公演淸德善賑不忘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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